— 2장 (1~2부 통합) —
— 1부 | — 교실의 공기가 바뀌던 때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2-1)
딸깍.
삐—.
아기는 어느덧 어린 소년이 되어 있었다.
서울의 골목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고, 계절도 제때 찾아왔다.
소년은 초등학교 6학년을 지나고 있었다.
학교는 익숙했다.
정답을 말하면 칭찬이 돌아왔고, 틀리면 고쳐 주었고, 다시 하면 됐다.
반응은—대체로 예측 가능했다.
그래서 소년은 아직은 의심하지 않았다.
사람이 주는 반응이 언제나 사람답게 움직인다는 걸.
그런데 아이들의 분위기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교복은 없었지만 옷차림은 달라졌고, 말투도 달라졌고,
웃음 뒤에 숨기는 표정이 하나씩 생겨났다.
“야, 너 그거 봤냐?”
“야, 그거 정말 웃긴다.”
“근데 너 그거 했냐?”
“쉿. 선생님 오신다.”
여자아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잡지에서 찢어낸 연예면 사진을 책상 위에 펼쳤다.
잘생긴 외국 팝 가수 얼굴이 반짝이는 종이 위에서 서로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야, 얘 진짜 미쳤다.”
“아니야, 얘는 내 꺼야.”
“네 꺼는 무슨, 내가 먼저 찜했거든?”
말은 장난처럼 튀었는데, 눈빛은 괜히 진지했다.
소녀들은 괜히 예뻐 보이려고 했고, 그 ‘내 꺼’라는 말로 자기 자리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남자애들은 반대로, 괜히 강해 보이려고 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목소리를 낮추고, 어깨를 들썩이며 떠들었다.
“야, 나 어제 몰래 비디오 봤다.”
“뭔 비디오?”
“너네는 모르는 거.”
근데 이상하게도, 자세한 얘기는 아무도 끝까지 못 했다.
진짜로 본 게 아니라—봤다는 척이 더 중요해 보였다.
말이 부풀어 오를수록, 교실 한쪽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이 더 얇게 퍼졌다.
아이들은 괜히 어른 흉내를 냈다.
괜히 강해 보이려고 했다.
장난을 치다가도 누군가의 시선이 닿으면 바로 표정을 바꿨다.
웃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것도 아닌 척.
그 “척”이 늘어날수록 교실은 전보다 조용해졌다.
소리는 여전한데 감정이 얇아진 느낌이 흘렀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
종이 찢는 소리.
분필이 칠판을 긁는 소리.
그리고—누가 웃는지 모르겠는 작은 킥킥거림.
소년은 자기 자리를 찾았다.
앞에 서지도 않았고, 뒤에 숨지도 않았다.
눈에 띄지 않지만 사라지지도 않는 자리.
그 자리는 안전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러던 어느 날부터 소년의 시선을 자꾸 붙잡는 존재가 생겼다.
같은 반 소녀.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냥—그녀가 움직이는 모든 순간이 소년의 눈에 먼저 걸렸다.
책장을 넘길 때의 손끝.
필통 뚜껑을 여는 소리.
안경을 고쳐 올리는 습관.
안경 너머의 눈은 유난히 커 보였다.
빛이 나는 눈은 아니었다.
대신,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빛을
조용히 품고 있는 눈 같았다.
사슴눈처럼 맑고 여렸다.
소년은 그 눈을 볼 때마다
왜 자꾸 숨을 죽이게 되는지 몰랐다.
괜히 더 오래 보고 싶었고,
상 눈이 마주치면 먼저 시선을 피하게 됐다.
소년은 그 시선을 한 번 보고 나서—자꾸 확인하게 됐다.
친구가 그녀를 불렀다.
“민정아, 이것 좀 봐.”
“아… 잠깐만.”
그 짧은 대답마저 소년의 귀에 남았다.
소년에게 그녀는 이상형이었다.
“이상형”이라는 말이 과하지 않을 만큼 또렷했다.
그런데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백이라는 단어는 목 안에 걸린 가시처럼 쉽게 나오지 않았다.
국민학교 시절, 소년은 비슷한 마음으로 비슷한 용기를 낸 적이 있었다.
“나… 너 좋아하는데, 너는…?”
그다음이 문제였다.
소녀는 쳐다만 보고 반응이 없었고, 소녀 친구들이 옆에서 듣고 있었다.
“어? 쟤 뭐래?”
“야야, 조용히 해 봐.”
“○○이가 뭐라는지 들어 봐.”
누군가 웃는 소리.
누군가 따라 하는 소리.
말이 이상한 모양으로 퍼지는 속도.
소년은 자기감정을 끝까지 설명하지 못한 채 교실 어딘가에 남겨졌다.
그때 소년은 배웠다.
말을 꺼내는 순간 반응은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니라는 걸.
그래서 이번에는 기다리기로 했다.
눈길은 갔지만 입은 열리지 않았다.
친구들이 소년을 보고 물었다.
“야, 너 오늘 왜 말이 없냐?”
소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아냐. 그냥.”
그 무심한 두 글자로 마음을 덮어두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 2부 | — 전화기 안쪽으로 좁아진 세계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2-2)
그날은 소풍을 다녀온 날이었다.
하루 종일 밖에서 뛰어다녔고 다리는 묘하게 풀려 있었고,
가방 안에는 구겨진 도시락 종이와 쓸모없어진 간식 봉지가 남아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 공기가 달랐다.
어른들이 집 안 가득 모여 있었다.
말이 겹치며 터지는 웃음.
손뼉을 치는 소리.
“아이고~” 하고 끌어올리는 목소리.
“이야, 오랜만이다.”
“밥은 먹었어? 앉아, 앉아.”
“여보, 여기 술 하고 과일 좀 더 가져와.”
거실은 이미 어른들의 공간이 되어 있었고,
소년은 그 소음의 가장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앉아 있었지만 계속 바깥으로 밀려나는 느낌.
그때 전화가 울렸다.
따르릉—따르릉—
집 안의 웃음소리를 가르며 또렷하게 울리는 소리였다.
소년(속으로): “어? 전화네.”
“누구야, 이 시간에...?”
소년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먼저 반응하는 걸 느꼈다.
그냥 전화였는데, 왜 심장이 먼저 움직였는지 소년도 설명할 수 없었다.
엄마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잠깐의 정적.
“네…?”
그다음, 아주 미세하게 목소리가 바뀌었다.
“어… 누구니?”
존댓말이 반말로 내려앉는 순간.
엄마는 수화기를 살짝 가린 채 소년을 불렀다.
“○○아, 전화받아라.”
“네, 가요.”
아빠가 물었다.
혹시 더 올 친구인지 확인하는 것처럼.
“누구야?”
엄마는 애매하게 웃었다.
“응… ○○이 친구인가 봐요.”
소년은 주변의 소음을 피해 조심히 일어섰다.
어른들의 웃음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 소리는 마치 다른 세계의 소음처럼 멀게 들렸다.
소년은 수화기를 넘겨받았다.
그 순간—전화기 너머에서 숨소리가 먼저 닿았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새어 나온 것처럼, 미세하고 흐린 숨.
조금 가쁘고, 조금 떨리는 숨이었다.
소년은 본능적으로 수화기를 귀에 더 바짝 가져다 댔다.
거실의 박수 소리 사이에서 그 숨소리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
“……나야.”
소년은 한 번 더 숨을 삼켰다.
“어… 누구?”
“나… 민정이야.”
그 이름이 귀에 닿는 순간, 소년의 심장은 한 박자 늦게 더 크게 뛰었다.
거실에서는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의자 밀리는 소리.
“아이고~” 하고 외치는 소리.
소년은 수화기를 더 꽉 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찼다.
민정이는 잠시 망설였다.
말보다 먼저, 망설이는 숨이 들렸다.
“나… 지금… 말해도 돼?”
소년은 괜히 따라 숨을 죽였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췄다.
“응. 괜찮아. 말해.”
잠깐의 정적.
“나… 너 있잖아...”
아주 짧은 숨이 전화기 너머를 스쳐 지나갔다.
망설임이 묻은 숨이었다.
고백은 늘, 말보다 숨이 먼저 흔들렸다.
그리고 민정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너, 사실 좋아하거든.”
소년의 입술이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목이 바짝 말라 있었다.
거실에서 누군가 크게 말했다.
“야, ○○아! 과일 먹어!”
소년은 반사적으로 “네!” 하고 대답할 뻔했다가,
입을 틀어막듯 더 낮게 속삭였다.
“어… 나도…”
한 박자.
“나도… 널 좋아하고 있었어.”
전화기 너머에서 민정이가 아주 작게 웃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웃을 때의 목소리와는 달랐다.
숨은 더 가까웠고, 말투는 더 조심스러웠다.
민정이가 되물었다.
“진짜?”
소년이 작게 답했다.
“응… 진짜.”
둘은 잠시 웃었다.
하지만 웃음 뒤에는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들이 잔뜩 남아 있었다.
잠시 후, 민정이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럼… 내일 학교에서… 그냥, 평소처럼 있어도 돼?”
소년은 거의 곧바로 대답했다.
“응. 그래도 돼.”
민정이가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그리고 전화는 끊겼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거실의 소음이 다시 한꺼번에 귀로 밀려왔다.
“누구냐?”
“친구야?”
“여자친구냐?”
어른들은 웃으며 던졌고, 소년은 웃지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아니에요. 그냥… 같은 반 친구예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소년은 깨달았다.
자기 마음보다 먼저 세상이 반응해 버릴 수도 있다는 걸
그날 밤, 소년은 알지 못했다.
이 전화 한 통이
머지않아 그의 삶에서 가장 갑작스러운 이별로 남게 될 줄은.
그리고—
그 이별의 첫 조각이
‘사람’이 아니라
미처 거두지 못한 ‘반응’이었다는 걸,
그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다음: 3장 에서…
반응이 흔들리면, 마음도 같이 흔들린다는 걸—그땐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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