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장 (1~4부 통합) —
— 1부 | — 밀려난 집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5-1)
(※본 편에는 폭력·총기 관련 장면과 심각한 상해/치명적 결과에 대한 묘사, 일부 욕설 표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민감하신 분들은 참고해 주세요.)
결국 소년은 집을 나왔다.
그건 도망이라기보다,
밀려난 결과에 가까웠다.
집 안에는 늘 같은 냄새가 맴돌았다.
술과 분노,
깨진 병에서 새어 나오는 알코올 냄새.
아버지는 매일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내가 미쳤지.”
“내가 왜 한국을 떠나 여기까지 왔는지 알아?”
“다 너희들 때문이야.”
“너희 때문에 여기 와서 이 꼴이 된 거야.”
말은 점점 의미를 잃고,
소리만 남았다.
병이 바닥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가
저녁과 밤의 경계를 대신했다.
그 와중에도 형은 말없이 공부에만 매달렸다.
반면 소년과 동생은 점점 집으로 향하는 발길이 늦어졌다.
밖에는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때릴 때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됐고
맞을 때도 침묵이 허락됐다.
하루씩, 한 걸음씩.
“오늘은 늦게 들어가도 되는 이유”가 쌓이면
어느 순간엔 그냥—
집이 아닌 곳이 집이 되어버린다는 걸
소년은 너무 일찍 배웠다.
소년은 비행청소년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학교에 나오지 않는 애들,
집에 돌아가지 않는 애들,
밤을 거리에서 보내는 애들.
그들은 서로의 과거를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각자가 왜 여기 있는지
아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 속에서
소년은 다시, 익숙한 얼굴들을 봤다.
학교 모퉁이에서
자기를 둘러싸고 때리던 애들.
비웃음이 먼저였고,
주먹은 그다음이었다.
담배 연기 사이로
낄낄거리며 흘리던 조롱 섞인 말투.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던 눈빛.
끝난 줄 알았던 과거가
그 순간 아직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살아났다.
“야, 저 새끼들… 너 예전에 말했던 그 새끼들 아니야? 기억나지?”
소년은 그쪽을 가만히 바라봤다.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낮게 중얼거렸다.
“맞아. 그때 나 깠던 새끼들.”
그 말이
소년의 안쪽을 긁었다.
복수심은 뜨거웠다.
하지만 방향은 없었다.
그들과 마찰은 잦아졌고,
사소한 말은
주먹과 쇠파이프, 칼,
심지어는 서로 간의 총싸움으로까지 이어졌다.
골목에서,
공원에서,
지하철 입구에서.
싸움은 점점 커졌고
웃음은 점점 사라졌다.
TV 뉴스가
그걸 증명하듯 흘러나왔다.
— 동양 갱단 간 총격.
— 한국계 청소년 사망.
— 용의자 미상.
소년은 뉴스를 보다가
전원을 꺼버렸다.
그 얼굴들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이 있던 친구들 중 몇몇은
영웅이라도 된 듯
그날의 일을
영웅담처럼 떠들어댔다.
“야, 그때 봤냐? 그 새끼들 눈… 진짜 겁먹은 표정이었어.”
“근데 우리 진짜 좆될 뻔했어. 총알이 조금만 옆으로 갔으면… 넌 그날로 끝이었지.”
“하… 그때 그 새끼들 총 존나 못 쏘더라. 바로 앞이었는데도 한 명도 못 맞추냐?”
녀석은 킥킥대며 비웃었다.
옆에 있던 여자애가 따라 웃더니, 장난처럼 영어를 섞었다.
“Yeah, we were, like, five feet away from them. No joke, bruh,” she said with a snicker.
(자막: 맞아. 우리 걔네 바로 코앞에 있었어. 진짜 장난 아니었다니까.)
웃음이 나와야 할 타이밍인데
웃음은 오래 붙지 못했다.
누군가 담배를 비벼 끄다가
손에서 미끄러뜨렸고,
불씨가 바닥에서 튀었다.
아무도 바로 주워 들지 못했다.
다른 애가 갑자기 말을 빨리 했다.
“나… 볼링장 화장실에서 어떤 놈이 날 따라왔거든.”
“그리고… 이 새끼가 갑자기 총을 내 배에 딱 갖다 대는 거야…”
애는 웃으려고 입꼬리를 올렸지만
턱이 아주 조금 떨렸다.
손바닥이 배 위에서 한 번 더 눌렸다.
“Man… I almost shit myself.”
(자막: 그때… 진짜로 바지에 지릴 번했어.)
“총구가… 차갑더라. 금속이 아니라 얼음 같았어.”
듣고 있던 아이들—
남자도 여자도 가리지 않고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순간,
소년은 알았다.
이곳에서는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이야깃거리가 된다는 걸.
— 2부 | — 평범한 방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5-2)
그 무렵 소년은 여자를 만났다.
평범했지만 성숙했고,
옷차림은 세련됐으며
같은 또래였지만
어딘가 어른 같았다.
이름은 Lisa Kim.(번역: 리사 김)
영어는 태어난 사람처럼 유창했지만
한국말은 조금 서툴렀다.
공부는 잘할 것 같고 똑똑해 보였는데
무슨 일을 겪었는지 공부 쪽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늘 초점 잃은 눈빛으로 멍하니 한쪽만 바라볼 때가 많았다.
꼭 깊은 생각에 빠진 사람처럼.
소년은 그 눈빛이
이상하게 익숙하다고 느꼈다.
자기도 가끔
거울 속에서 본 적 있는 눈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리사는 전혀 담배 필 사람으로 안 보였는데—
그녀 또한 담배를 피웠다.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가 이상할 정도로 자연스러웠고,
연기를 뱉을 때마다
그 초점 잃은 눈빛은 더 멀어졌다.
어느 밤,
아무 말 없이 걷다가
아무도 없는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걷는 동안
발소리만 따라왔다.
차가 지나가면 잠깐 소리가 커지고,
다시 조용해지고—
그 반복이 이상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치 오늘의 결론을
이미 정해둔 사람처럼.
“오늘은 우리 부모님 집에 없어. 들어왔다가 갈래?”
소년은 대답을 크게 하지 못했다.
고개만, 아주 조금 끄덕였다.
거절할 이유도 없었고
따라갈 이유를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의 집은 큰아버지 집에 비교하면 작았고
좀 더 이전에 지은 집,
오랜 이민 생활의 냄새가 묻어났다.
낡은 카펫에서 올라오는 먼지 냄새,
조금 눅눅한 벽지,
어딘가에서 오래 끓인 간장 같은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는
생각보다 크게 울렸다.
그 소리 하나로
밖과 안이 갈라지는 느낌이 났다.
그녀가 소년을 그녀 이층 방으로 데려갔다.
계단은 삐걱거렸고,
그 삐걱거림이
둘 사이의 침묵을 대신했다.
그녀의 방은 넓지는 않았지만
그때 그 시절 유명 남녀 가수 사진들이 곳곳에 붙어 있었고,
그녀가 어려서부터 쌓아놓은 것처럼 보이는 인형들.
딱 봐도 평범한 여자 나이 또래 방처럼 꾸며져 있었다.
그 평범함이
오히려 낯설었다.
소년이 알던 집들은
항상 뭔가가 깨져 있었고
누군가의 기분이 먼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방은
아무도 소리치지 않았고
아무것도 부서지지 않았다.
그녀가 화장대 옆에 놓인 라디오를 틀었고
유행하는 팝 노래가 흘러나왔다.
의미 없는 이야기를 서로 나눴고
웃는 타이밍도 대충 맞췄다.
말은 얇았고
대신 숨소리가 두꺼워졌다.
그녀가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가
연기를 아주 천천히 뱉는 순간,
팝송의 후렴이 그 연기 사이로 끈적하게 퍼지고—
소년은 숨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그녀의 입술이 오기 전에 이미 자기 몸이 먼저 ‘가까워졌다’는 걸 알아버렸다.
그리고…
입을 맞췄다.
처음엔 조심스러웠다.
부딪히는 게 아니라
확인하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심장은 뛰지 않았다.
세상도 멈추지 않았다.
라디오는 후렴을 반복했고,
벽시계는 초침을 밀어냈고,
창밖의 차 소리는
여전히 같은 속도로 지나갔다.
그 순간,
리사의 입술이 소년의 입술에 닿았다.
첫 키스였다.
누군가에게는 가슴이 뛰고,
세상이 잠깐 멈춘 것처럼 느껴질 순간이었을지 몰랐다.
하지만 소년의 안에서는
아무것도 폭발하지 않았다.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심장이 빨라지지도 않았고,
손끝이 떨리지도 않았다.
그저
따뜻한 입김이 스치는 감각만
이상할 만큼 또렷하게 남았다.
오히려 그 현실감 때문에
소년은 더 멍해졌다.
이게 자기의 첫 키스인데도
정작 자기 안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낯설고도 무덤덤했다.
너무 어린 나이부터
설렘보다 먼저
버티는 법을 배워버린 탓이었을까.
기대하기보다 경계하는 일이 먼저였고,
두근거리기보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일이 더 익숙했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처음이어야 할 순간인데도
소년의 안에서는
끝내 아무 감정도 피어나지 않았다.
그때 소년은,
감정도 때로는
닳아버릴 수 있다는 걸
말없이 지나가듯 처음 알았다.
그 후로 몇 달 더 만났고,
연락은 줄었고,
어느 날부터는
아무 일도 없었다.
헤어지자는 말도,
잘 지내라는 말도 없었다.
그 시절엔
문자가 없었다.
그 당시 벽돌만 한 무선전화와
담뱃갑만 한 삐삐가 있었지만,
원래라면
그 나이의 아이가
아무렇지 않게 들고 다닐 물건들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소년은
이미 그런 것들을 손에 쥐고 다녔다.
마치 홍콩 영화 속
너무 일찍 세상을 배워버린
말 없는 어린 주인공처럼.
리사와 소년 사이에는
서로 닿을 방법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기다릴 수도 있었고,
전화를 걸 수도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찾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끝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누가 먼저 끝내자고 말한 것도 아니었고,
무슨 큰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시간이 지나고,
하루가 밀리고,
한 번쯤은 닿았어야 할 마음이
끝내 닿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 관계는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게
조용히 사라졌다.
— 3부 | — 클럽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5-3)
몇 달 후, 다시 맞이한 주말의 목적지는 클럽이었다.
뉴욕의 밤은 과장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서로의 경계를 밟고 다녔다.
차이나타운 근처, 네온이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던 곳.
입구 앞에서부터 담배 연기와 술 냄새가 천장에 눌어붙어, 공기 자체가 눅진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땀 냄새와 향수 냄새까지 섞여 올라왔고,
문이 열리는 순간
음악이 아니라—
벽이 흔들렸다.
베이스가
가슴뼈를 두드렸다.
쿵.
쿵.
쿵.
소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곳은 “즐기러” 오는 곳이 아니라
살아남는 방식으로 버티는 곳이라는 걸 바로 느꼈다.
죽음과 삶이 오가는 걸 알면서도
소년은 자꾸 위험 쪽으로 몸이 끌렸다.
마치 불빛이 아니라—
불빛 뒤에 있는 열을 찾아가는 곤충처럼.
가까이 가면 타버리는 걸 알면서도,
멀어지는 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겁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두려움은 늘 있었고,
다만 그 두려움이 어느 순간부터는
경계라는 습관으로 굳어버렸을 뿐이었다.
보통 사람이 북적이는 거리를 지나갈 때도
소년의 눈은 자동으로 사람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머리 스타일, 옷차림,
시선의 높이,
손이 주머니로 들어가는 속도,
무리의 간격. 무엇보다 그들의 눈빛.
그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를 위협할 수 있는 상대를
먼저 식별해 낼 정도였다.
마치 오래된 본능처럼.
클럽에 들어가면 더 심해졌다.
기본 규칙을 따르는 것처럼
누가 적인지, 누가 친구인지부터 주변을 살피고
출구 위치를 확인하고
벽 쪽으로 몸을 붙이고
시선이 마주치면 먼저 피하지 않았다.
경계하며 들어가는 게
어느새 일상화되어 버렸다.
소년이 영어를 못한 건 게을러서가 아니었다.
그럴 필요가 별로 없었다.
학교에 가면 통역은 늘 준비돼 있었다.
상담실이든 행정실이든—누군가를 부르면
문장은 곧바로 한국말이 됐다.
한국말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교회가 있었고,
동네엔 한국 가게가 있었다.
소년은 자연스럽게
“영어 없이도 되는 동선”으로 하루를 살았다.
필요한 말은 누군가 대신해 줬고,
자기는 고개만 끄덕이면 됐다.
편했다.
하지만 그 편함은 어느 순간
위험이 되기도 했다.
뜻을 못 알아듣는 대신
감정만 먼저 알아듣는 몸이 됐으니까.
지금처럼.
빛은 자주 끊겼고
사람들은 그 어둠을 틈처럼 이용했다.
손이 스치고,
어깨가 밀리고,
누군가의 웃음이 바로 옆에서 터졌다가
금방 사라졌다.
소년은 친구들 사이에 있었다.
웃고 있었지만
웃고 있지 않았다.
몸은 리듬에 맞춰 흔들렸는데
마음은 계속
출구 쪽을 보고 있었다.
여기서는
누가 먼저 건드렸는지 따지지 않았다.
그냥
‘건드려졌다’는 사실이
이유가 됐다.
사소한 시비였다.
정말로.
눈이 마주쳤고,
어깨가 부딪혔다.
소년은 입을 열지 못했다.
단어가 잡히지 않았다.
대신—
옆에 있던 친구들이 먼저 앞으로 나갔다.
소년을 뒤로한 뼘 밀어내듯,
자기들이 앞에 섰다.
“What the f—k! Watch it, you f—ing stupid m—f—ers!”
(자막: 야, 미쳤냐? 앞 좀 보고 다녀, 이 개 같은 것들아!)
“What?”
(자막: 뭐?)
“You’re the one who f—ing bumped me first!”
(자막: 네가 먼저 처박아놓고 뭐래, 미친 X아!)
“What’s up, m—f—er?”
(자막: 뭐야, 이 새끼가. 지금 시비 터는 거야?)
“You want this, m—f—er?”
(자막: 계속할래, 새끼야? 여기서 끝까지 가자고?)
목소리는 음악에 절반이 묻혔는데
눈빛은 끝까지 남았다.
소년은 뜻을 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상황은 이해했다.
눈빛, 목소리의 높이,
어깨가 넓어지는 방식,
무리의 간격이 바뀌는 속도.
언어보다 먼저,
몸이 알아듣는 신호들이 있었다.
누군가가 소년을 밀었고
소년은 다시 밀렸다.
사람들의 몸이 벽처럼 밀려오면서
숨이 얇아졌다.
주먹이 날아왔고,
누군가 쓰러졌고—
컵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다음은
너무 빨랐다.
— 4부 | — 총성의 기억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5-4)
탕!
처음엔
폭죽 같은 줄 알았다.
음악이 너무 커서
총소리조차
음악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사람들이 한 박자 늦게
얼어붙었다.
탕!
탕!
탕!
탕!
이번엔 달랐다.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
사람들이 동시에
숨을 삼키는 소리.
빛이 번쩍였고,
누군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소년은 보았다.
느꼈다.
총구가
사람들 머리 위로 흔들리는 걸.
그리고 어떤 순간엔—
그 끝이
자기 쪽으로 오고 있다는 걸 보았다.
시간이
얇게 느껴졌다..
누군가가 소년의 팔을 잡아당겼는데
그게 구해주는 손인지
끌어내리는 손인지
구분이 안 됐다.
탕!.
소년의 귀 옆에서
무언가가
‘퍽!’ 하고 벽에 박히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몸이 먼저 반응했다.
심장이 뛰는 게 아니라
심장이 떨어지는 느낌.
화약 냄새가
목구멍 안으로 들어왔다.
아까까지 크게 울리던 음악은 더 이상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누가 볼륨을 내린 것도 아닌데—귀가 먼저 멎어버린 것처럼.
베이스는 끊겼고, 남은 건 숨소리와 발소리뿐이었다.
사람들이 흩어졌다.
밀리고, 부딪히고, 욕이 튀고, 누군가는 비명을 삼켰다.
바닥은 끈적했고, 누군가 넘어지며 의자를 걷어찼다.
유리컵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너무 또렷해서 더 무서웠다.
소년과 그리 멀지 않은 곳.
바닥에 쓰러진 누군가가 보였다.
조명은 여전히 사방에서 번쩍였다.
멈추지 않았다.
번쩍—
번쩍—
그때마다 바닥에 번진 피가 빛을 받아
검붉게, 번들거렸다.
너무 선명했다.
너무 진해서
현실 같지 않았다.
…그런데 냄새가 났다.
쇠 냄새.
따뜻한 바닥.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며 끌고 간 자국.
경비원이 달려오며 소리쳤다.
“AH—f—k!. Get back! Move!”
(자막: 아, 씨발! 물러서! 비켜!)
경비원이 한 번 더, 거의 으르렁거리듯 소리쳤다.
“Don’t touch him!”
(자막: 만지지 마!)
누군가는 벽 쪽으로 몰렸고,
누군가는 출구를 찾느라 고개를 계속 돌렸다.
바텐더가 카운터 너머로 몸을 숙이며 외쳤다.
“Call 911!”
(자막: 911 불러!)
어딘가에서 유선전화 수화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딸깍— 덜컹.
누가 받았는지, 연결이 됐는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한 채
사람들은 계속 움직였다.
움직여야만 할 것처럼.
그 순간 소년은 알았다.
이건 화면이 아니었다.
클럽은 아직 번쩍이는데—세상은 이미, 다른 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너무 선명했다.
너무 진해서
현실 같지 않았다.
그 순간
소년은 생각했다.
아, 이곳에선 이렇게 살다 간
정말 죽을 수도 있겠구나.
여전히 남은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누군가는 문 쪽으로,
누군가는 화장실 쪽으로,
누군가는 그냥—
바닥으로.
소년도 뛰었다.
뛰었는데
발이 내 발 같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다
누군가와 부딪혔고
그 사람의 땀과 술 냄새가
한꺼번에 얼굴로 덮쳤다.
밖으로 나오는 순간
차가운 공기가 폐를 찢듯 들어왔다.
그제야
소리가 들렸다.
비명.
욕.
유리 깨지는 소리.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사이렌.
사이렌 소리가
멀리서 시작해
점점 가까워졌다.
소년은 길 한쪽에 서서
숨을 쉬었다.
숨이 쉬어지긴 했는데
숨이 자기 것이 아니었다.
그 밤은
소년의 몸 어딘가에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남겼다.
멍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피처럼 흐르지도 않았다.
대신
가끔 아무 일도 없는데
가슴이 먼저
‘탕’ 하고 움찔하는 방식으로 남았다.
어둠 때문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무슨 일이든
갑자기 시작될 수 있다는 걸
몸이 먼저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며칠 뒤, 우현히 형과 통화를 하고
소년은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매일 밤새
눈물과 기도로
소년을 찾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날 밤도
잠을 자지 않았다는 걸.
소년을 찾으러 다니다가
돌아와서도
불을 끄지 않았다는 걸.
어머니는
방 한쪽에 무릎을 꿇고
밤새 기도했다.
“하나님…”
“제 아들만은 살려주세요.”
“다른 건 다 잃어도 괜찮으니까
저 아이만은…”
기도는 새벽까지 이어졌고
목소리는 갈라졌다.
소년은
그 사실을
나중에 들었다.
그리고
그 사실 하나가
소년을
집으로 돌아오게 했다.
어머니는 소년을 보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바라보다가
울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무사히 돌아와 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꾸짖음도,
질문도 아니었다.
그냥
붙잡는 말이었다.
그날,
소년은
집으로 돌아왔다.
아니,
돌아와야만 했다.
새벽마다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 넘게 맨해튼 세탁소에
일하러 다니면서도
잠을 줄여가며
기도하던 어머니를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한때
전속 모델이었고 사모님이라 불리던
어머니의 얼굴과 손은
이미
많이 달라져 있었다.
손등의 핏줄이 더 도드라졌고,
손바닥은 거칠었고,
눈 밑엔
밤을 견딘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가족은
짐을 쌌다.
텍사스로 가기 위해.
상자에 담기는 건
옷과 그릇만이 아니었다.
이 집에서의 밤들,
깨지는 병 소리,
숨을 죽이고 버틴 시간들이
같이 접혀 들어갔다.
소년은
차창 밖을 보며
처음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꺼내는 순간,
지금까지 겨우 버티고 있던 마음이
소리도 없이 무너질 것 같았다.
소년은 아직 몰랐다.
이 모든 밤들이
다른 곳 다른 장소에선 곧 화면 속 세계에서
다시 다른 방식으로
되살아나게 될 줄은.
그리고 그 화면 속에서는—
주먹도, 총성도, 피도
언젠가 모두 숫자로 바뀌게 될 거라는 걸.
0과 1.
켜짐과 꺼짐.
있음과 없음.
으로 만들어진 코드는
이미 오래전 시작되었고,
사람은 그 위에
돈을 올리고, 관계를 올리고,
결국 자기 자신마저 올려놓기 시작한다.
세상은 결국,
전기가 통하느냐 끊기느냐로 나뉘고
그 단순함은 머지않은 미래에
사람의 얼굴까지 흉내 내게 될 것이다.
그곳에선
주먹의 감각도, 피의 온기도 없이
모든 것이 끝내 빠르게 오고 가는 신호가 될 뿐이다.
소년은 아직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 알게 된다.
현실은 아픈데—
화면은 아프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사람은 때로,
상처 입지 않는 쪽이 더 안전한 세계라고
너무 쉽게 믿어버린다는 것을.
그리고 그 세계가
어느 날은 “안전”처럼 보이고,
어느 날은 “탈출구”처럼 보이다가,
마침내—소년을 삼키게 된다는 걸.
그리고—
아프지 않은 대신,
더 오래 남는 방식으로
사람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는 걸.
소년은 아직
정말로 몰랐다.
—다음: 6장-1부에서…
("아프지 않은" 화면이 소년을 붙잡기 시작한다.)
[업로드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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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시간 기준: 토·일 업로드
— 미국 중부시간(시카고 기준): 금·토 업로드
[안내 — 모방 범죄 주의]
본 작품에는 범죄 수법·수사 절차·법정 장면이 현실적으로 묘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범죄를 미화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함이 아니며, 현실에서의 모방을 강력히 금합니다.
작품 속 사건은 허구 또는 각색이며, 어떠한 범죄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저작권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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