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1~3부 통합) —
— 1부 | — 낯선 공기, 낯선 화면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4-1)
(※본 편에는 폭력·총기 관련 장면과 심각한 상해/치명적 결과에 대한 묘사, 일부 욕설 표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민감하신 분들은 참고해 주세요.)
큰아버지 집에서 보낸 첫날밤은,
시차 적응 때문인지
자세한 이유도 모른 채 눈 뜨고
밤을 새우는 날이 일주일쯤 이어졌다.
그러다 서서히, 몸이 시간을 맞추기 시작했다.
잠이 들었다기보다—
몸이 스스로 전원을 꺼버린 것에 가까웠다.
낯선 천장, 낯선 벽지, 낯선 이불의 감촉.
눈을 감아도 마음이 감기지 않아,
소년은 한참을 누워 있다가 겨우 숨을 골랐다.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공기는 놀라울 만큼 깨끗했다.
배기가스와 음식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아니라,
잘 정돈된 거리에서만 나는—아무 냄새도 섞이지 않은 공기.
밤이 깊어도 자동차 소리는 멀리서만 들렸고,
거리에는 소란 대신 질서가 있었다.
여긴 뉴욕이었다.
하지만 큰아버지 집은 탁 트인 바다가 보이는,
소년이 상상하던 뉴욕과는 전혀 다른—나름 부유한 동네였다.
어떤 밤엔 창문을 아주 조금 열었을 때,
바다 쪽에서 갈매기 소리가 느리게 올라왔다.
도시에서 들을 소리가 아니었다.
소년은 그 소리를 한참 듣고 있었다.
“뉴욕”이라는 단어가 그 소리와 잘 붙지 않았다.
몇 달 동안 가족은 큰아버지의 집에 머물렀다.
집은 넓었고, 방도 넓었고, 계단을 오를 때마다
발소리가 공기를 타고 멀리 퍼졌다.
몸은 덜 불편했지만, 마음은 달랐다.
모든 게 낯설었다.
사람들의 모습, 말할 때의 손짓, 웃는 방식,
그리고 무엇보다—시간이 흘러가는 방식.
소년의 하루는 TV로 시작해 TV로 끝났다.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화면은 계속 움직였다.
MTV의 번쩍이는 화려한 영상,
한국에서는 보지 못했던 만화,
영화 속 눈빛과 몸짓.
대사를 몰라도 이해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MTV에서는—소년이 한국에서
한 번도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힙합이 튀어나왔다.
드럼이 아니라 비트가 먼저 박혔고,
노래가 아니라 랩이 먼저 쏟아졌다.
화면 속 흑인 아티스트들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뚫어 보듯 뱉는 말들은
뜻을 모르는데도 이상하게 “싸움”처럼 들렸다.
소년은 볼륨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무섭다기보다… 낯선데 끌렸다.
가사가 아니라 박자만큼은 몸이 먼저 따라갔다.
손가락이 무릎 위를 두드렸다가 멈추고, 다시 두드렸다.
소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말은 모르겠는데… 재밌네.”
그 말이 낯선 나라에서 처음으로 숨을 고르게 해 준 구멍이었다.
그 사이사이—처음 보는 광고들이 쉼 없이 끼어들었다.
광고는 단순히 물건을 파는 게 아니었다.
그 나라가 어떤 리듬으로 숨 쉬는지,
어떤 말을 “당연한 말”로 쓰는지
그걸 아주 빠른 속도로 보여줬다.
예고도 없이 화면이 번쩍 바뀌면
새 차가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빛나는 크롬, 손잡이에 스친 반사광, 웃으면서 키를 흔드는 가족.
누군가가 과장된 표정으로 카메라를 향해 외쳤다.
소년은 말을 못 알아들어도 톤만으로 알았다.
‘지금 당장 사. 지금이 기회야.’
다음 장면에선 햄버거가 슬로모션으로 찍혔다.
치즈가 늘어지고, 소스가 떨어지고, 얼음이 든 컵이 “쨍” 하고 빛났다.
사람들이 한 입 베어 물고 동시에 웃었다.
웃음이 너무 똑같아서 오히려 이상했다.
세제 광고에선 하얀 셔츠가 “기적”처럼 새하얘졌고,
치약 광고에선 치아가 조명처럼 반짝였고,
보험 광고에선 전화번호가 화면 아래에 크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어떤 광고는 음악이 너무 경쾌해서
소년은 멜로디만 흥얼거리게 됐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데도—입에 붙었다.
“Call now—!”
(자막: 지금 전화하세요—!)
“Limited time only.”
(자막: 기간 한정.)
그 말들은 뜻보다 먼저 ‘압박’으로 남았다.
소년은 어느 순간, 리모컨을 쥔 채로 멜로디를 따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영어를 배운 게 아니라, 화면이 소년의 입을 빌린 것 같았다.
브루클린의 다른 친척 집에 놀러 갔던 날,
소년은 거실에서 발을 멈췄다.
사촌형이 TV 앞에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
손에는 이상하게 생긴 조종기 같은 것—조이스틱.
화면 속 캐릭터는 손끝의 움직임에 즉각 반응했다.
신기했다.
소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 그거 뭐야?”
“이게 컴퓨터야?”
사촌형이 눈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컴퓨터는 아니고… 게임기야. TV에 꽂아서 마음껏 놀 수 있는.”
소년은 화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컴퓨터든 뭐든, 그건 처음으로 세상을
‘조작’할 수 있게 해주는 기계였다.
사촌형이 짧게 말했다.
“아타리.”
집에서, 마음껏, 원하는 만큼.
한국에서 동전을 쥐고 오락실에 들어가야 하던 기억이
한순간에 과거가 되었다.
사촌형이 조이스틱을 내밀었다.
“해볼래?”
조이스틱이 손끝에 닿는 순간,
소년은 처음으로 느꼈다.
입력하면 반응이 돌아오는 세계를.
그날, 소년은 아타리를 알게 되었다.
아타리는 소년이 집에서 처음 만난 비디오 게임기였다.
컴퓨터는 아니었지만, TV에 연결하면 화면은 곧바로 게임이 되었다.
그때 그는 처음 알았다.
기계도 사람을 앉혀 두고 놀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화면 속 것들은 쉬지 않고 움직였고,
그 안에는 화면만의 규칙이 생겨났다.
집 안, TV 앞 바닥.
다리는 접혀 있었고,
소년의 손에는 언제나 조이스틱이 쥐어져 있었다.
아타리 콘솔은 소년을 위로하지 않았다.
칭찬도 하지 않았고,
괜찮다고 말해 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다.
오른쪽으로 밀면 오른쪽으로 움직였고,
버튼을 누르면 반응이 돌아왔다.
실패하면 즉시 알 수 있었고,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소년은 그 단순함이 좋았다.
현실과 달리 여기에는 애매함이 없었다.
노력하면 결과가 있었고,
틀리면 이유가 있었다.
소년은 그 앞에서 오래 앉아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무언가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사람들은 그걸 전자게임 놀이라고 불렀고,
소년은 그 말에 동의했다.
그땐 몰랐다.
이 감각이 훗날,
그가 가장 약해졌을 때
다시 기대게 될 방식이라는 걸.
질문을 던지면 바로 돌아오는 대답.
판단을 맡기면 잠시 덜어지는 무게.
그 시작은 이미
이 방,
이 TV 앞,
이 조이스틱에서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소년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인간은 기계를 만들며 자라 왔다.
두려움 속에서가 아니라, 익숙함 속에서.
그래서 사람들은 어느 순간까지도
이게 어디로 가고 있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다만 계속해서
반응하는 것들을
조금 더 가까이 두었을 뿐이다.
이제,
그것들은 곧 말을 하기 시작할 것이고,
소년은 그 목소리가
왜 그렇게 낯설지 않았는지
그때가 되면 이해하게 될 것이다.
바다가 보이던 큰집은 이제 끝난다.
그 대신, 낯선 벽들이 가까운 세계가 시작된다.
소년은 곧
‘진짜 뉴욕’의 문턱을 넘게 된다.
— 2부 | — 철창 속 학교, 복도에 남은 비트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4-2)
몇 달 뒤, 가족은 퀸즈의 작은 아파트로 옮겼다.
한눈에 봐도 낡고 오래된 2층짜리 아파트.
벽과 벽이 가까워지자 현실이 목까지 차올랐다.
짐을 풀며 소년은 알았다.
이제 진짜 시작이라는 걸.
형은 고등학교로, 소년과 동생은 중학교로 향했다.
학교에 들어서는 순간,
소년과 동생은 “정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이런 곳이 학교라는 걸
머리가 아니라 몸이 먼저 받아들이지 못했다.
학교는 소년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소년은 자기 몸이 조금 작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건물은 컸지만 모든 문과 유리창엔
감옥을 연상시키듯 철장이 덮여 있었고,
자물쇠가 잠겨 있었다.
콘크리트로 덮인 운동장은 좁았고,
아이들의 목소리는 너무 빨랐다.
웃음은 웃음처럼 들리지 않았고,
장난은 장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소음 같았다.
학교 로비에 들어서자 다른 소음이 덮쳤다.
사물함 소리, 발소리, 웃음, 욕설—
모든 게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 소음 사이로
다른 리듬이 따로 흘렀다.
복도 한쪽에 모여 있던 몇몇 흑인 남학생들이
아무 악기도 없이 입으로 비트를 만들고 있었다.
혀를 차고, 입술을 튕기고,
목으로 “둥둥—” 하는 저음을 깔았다.
드럼도 없이,
그들은 복도 한쪽을 리듬으로 채우고 있었다.
누군가가 짧게 랩을 뱉으면, 옆에서 바로 받았다.
뜻은 못 알아들어도, 그게 TV에서 흘러나오던
그 박자라는 건 소년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말할 때도 리듬을 놓치지 않았다.
친구 이름을 부르는 것도, 장난을 치는 것도, 서로를 떠보는 것도
마치 비트 위에서 굴러가는 것처럼 들렸다.
옷차림도 그랬다.
헐렁한 티셔츠와 통 넓은 바지, 번쩍이는 운동화,
모자를 뒤로 눌러쓰거나, 후드를 머리 위로 걸친 채
걸음까지 화면 속처럼 리듬을 타고 있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그들은 이미 “보고 들은 것”을
몸으로 따라 하고 있었다.
소년은 그걸 멍하게 보다가,
갑자기 자신이 더 작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여긴 수업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누가 더 크게 존재하는지 정해지는 곳 같았다.
교무실 근처의 작은 방.
동양계 여자, 한국 사람으로 보이는 선생님이 먼저 말을 걸었다.
“여긴 오늘부터 다니는 너희들 학교야.
학교 히스토리랑 규칙부터 짚고 갈게.”
선생님은 서류를 정리하다가 소년과 동생을 번갈아 보았다.
표정은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분명했다.
“너네 오늘부터 다니는 이 학교는 말이야,
애들이 진짜 다양해.”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애들도 많고,
도와주는 사람들도 있어.
통역도 있고, 상담도 있고.”
선생님은 잠깐 말을 멈췄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췄다.
“근데…
절대 어울리면 안 되는 애들도 있어.”
그 말이 공기 속에 조용히 가라앉았다.
“특히 방과 후.
무리 지어 다니는 애들.”
그녀는 손으로 학교 밖 방향을 가볍게 가리켰다.
“쎄 보인다고, 말 잘한다고,
같이 있으면 안전할 것 같다고—
절대 따라가지 마.”
소년은 그때는 그 말의 무게를 몰랐다.
그저 ‘조심하라는 말이겠지’ 정도로 받아들였다.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못을 박듯 말했다.
“학교생활만 잘해.
수업 빠지지 말고,
쓸데없는 일에 끼지 말고.”
잠깐의 침묵.
“문제 생기면 꼭 와서 말해.”
그 말은 부탁이기도 했고, 경고이기도 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한 글자가
너무 가벼웠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옆에서는 백인 선생님이 말없이 서류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이번엔 말 대신 종이에 적힌 규칙들이 영어로 줄줄이 있었다.
소년은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날 선생님의 경고는 ‘피하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말이었다는 걸.
그리고 그 경고를 제일 먼저 잊어버린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걸.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소년보다 1–2살 많아 보이는 동양계 여학생 둘.
한 명은 길게 늘어뜨린 웨이브 헤어,
다른 한 명은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둘 다 짙은 화장, 미니스커트, 반짝이는 액세서리.
옷 색깔은 둘 다 검은색.
한국에선 그 나이엔 절대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한국 성인 여자들 사이에서도 보기 힘든 분위기.
어린 소녀의 얼굴 위에
어른의 표정을 억지로 씌워 놓은 느낌.
그 어긋남이 더 불안했다.
소년과 동생은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훔쳐봤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보면 안 될 것 같았고,
안 보면 더 초라해질 것 같았다.
웨이브 머리 쪽이 소년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코웃음을 치듯 말했다.
“너희 새로 온 애들이지?”
한국어였지만 반말이었고, 어딘가 낯선 억양.
“따라와. 내가 보여줄게.”
말투는 반말이었고 친절함은 없었다.
짧은 머리의 여학생은 웃지도, 말도 걸지 않았다.
그저 소년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아주 살짝 올렸을 뿐이었다.
그 순간, 소년은 이유 없이
등과 겨드랑이 쪽이 서서히 젖어드는 걸 느꼈다.
긴장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
아니면 이곳에서는 ‘보이는 것’이 곧 힘이라는 걸
처음으로 감각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소년은 그때 처음 깨달았다.
여기서는 착한 얼굴도, 말 잘 듣는 태도도
아무 힘이 없다는 걸.
교실의 시선이 한꺼번에 꽂힌다.
웃음은 의미가 되고, 침묵은 안전이 아니게 된다.
— 3부 | — 끊어진 반응, 첫 번째 주먹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4-3)
복도를 걸으며 소년은 느꼈다.
외모가 힘처럼 작동하는 공간이라는 걸.
교실 문을 열자
수십 개의 시선이 한 번에 소년에게 꽂혔다.
선생님은 밝은 목소리로 뭔가를 말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게 가장 안전한 반응이라는 걸 이미 배웠기 때문이다.
칠판에는 글자가 가득 적혔고
그 글자들은 소년의 머리 위를 그냥 지나가 버렸다.
단어는 하나씩 떼어 놓으면 아는 것도 있었지만,
문장이 되면 의미가 사라졌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말하면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소년은 웃지 않았다.
왜 웃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쉬는 시간.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했다.
소년은 자리에 앉아 연필을 만지작거렸다.
괜히 노트를 넘겼고, 괜히 가방을 열었다 닫았다.
누군가 소년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등 뒤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그 웃음이 자기 때문이라는 걸 느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느낌은 분명했다.
며칠이 지나자 그 느낌은 조금씩 형체를 갖기 시작했다.
지나가며 어깨를 툭 치는 아이.
교과서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아무 말 없이 지나가는 아이.
영어로 뭔가를 말한 뒤 주변을 힐끗 보며 웃는 얼굴들.
소년은 그게 농담인지 악의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하지만 몸은 먼저 반응했다.
심장이 빨라졌고,
목이 굳었다.
집에 돌아와도 그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느 날은 복도에서 넘어졌다.
누군가 발을 걸었다.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바닥에 손을 짚고 일어났다.
웃음소리가 확실하게 들렸다.
이번에는 착각이 아니었다.
소년은 이를 꽉 물었다.
눈앞이 잠깐 흐려졌다.
그날 밤, 소년은 처음으로 벽을 주먹으로 쳤다.
소리가 생각보다 컸다.
놀란 자신을 보고 소년은 더 화가 났다.
그때부터 소년은 조금씩 달라졌다.
참는 대신, 버티지 않기로 했다.
눈을 피하지 않았고,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어느 날, 또다시 말을 알아듣지 못한 순간,
누군가 소년을 흉내냈다.
그때 소년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영어는 나오지 않았지만
몸은 먼저 움직였다.
책상이 밀렸고,
의자가 넘어졌다.
교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커졌고,
소년은 방과 후에도 교실에 남아 벌을 받아야 했다.
벌이라고 해 봐야 한 시간 정도
아무 말 못하고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하는 게 전부였다.
교실 안에는 여러 인종의 남자 여자 아이들이
비슷한 벌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에선 착하고 순진했던 소년.
단체 기합 말고는 벌을 받아 본 적 없던 소년.
그날, 마음이 흔들렸다.
소년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곳에서는 침묵이
항상 안전하지는 않다는 걸.
소년은 한국에 있을 때 공부엔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적응은 빠른 편이었다.
과학과 미술, 무언가를 만드는 걸 좋아했었다.
하지만 언어 장벽은 굳게 닫혀 있는 성문 앞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낯선 공간에서 과연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밀려왔다.
몇 주가 지나자,
영원히 적응 못할 것 같았던 학교생활이 서서히 몸에 와 닿기 시작했다.
통역해 주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고,
소년은 1–2년 먼저 온 또래 친구들과 사귀며 그럭저럭 적응했다.
수다는 늘 비디오, 영화와 집에서 하는 게임 이야기다.
그때까진 몰랐다.
이 도시가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지.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뜻하지 않았고,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터지고 말았다.
방과 후, 학교 주위엔 각 나라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정해진 곳에서 수다를 떨고 놀고 있었다.
모두가 절대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비행청소년이란 말도 모자랄 옷차림, 말투, 행동.
방과 후, 학교 모퉁이를 지나는 순간 공기가 변했다.
좁고 높게 들어선 오래된 아파트 사이로
낯선 얼굴들이 다가왔다.
동양계 학생들, 여럿.
꼭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옷은 검정 아니면 하얀색.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었고,
입에도 담배가 물려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영어와 한국말이 섞여 들려왔다.
소년의 머릿속에는 아주 짧은 순간,
전혀 다른 교실이 스쳐 지나갔다.
한국에서의 학교.
전교 학생회장으로 단상 위에 서 있던 자신.
마이크를 잡으면 교실이 조용해졌고,
이름을 부르면 아이들이 고개를 들었다.
보이스카우트 리더로 앞에 서서 줄을 세우던 기억.
그때의 자신은 맞는 쪽이 아니라
지켜보는 쪽이었다.
그래서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자신이 여기에 서 있는지.
누군가가 말했다.
“야, 너.”라고 소년을 향해 부르는 것 같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쏟아졌다.
그런데 그 속에
뼈처럼 또렷한 문장들이 섞여 있었다.
“Hey, you! Come over here.”
(자막: 야, 너! 이리 와.)
“What the f—ck are you looking at!”
(자막: 뭘 그렇게 똑바로 쳐다봐, ㅅ발!)
소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뒤로는 정말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톤과 표정만으로도 소년은 알 수 있었다.
이건… 공격이다.
소년은 숨을 삼켰다.
무서움이 목을 조여 왔다.
동시에 자존심도 올라왔다.
‘왜 나지?’
‘내가 뭘 했다고?’
무서움이 계속 목을 조였지만,
알량한 자존심이 잠깐 고개를 들게 했다.
소년은 도망치지 않았다.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
그때 담배를 문 여자애 하나가 비웃듯 말했다.
“오우— 센데.”
웃음이 터졌다.
남자애들만이 아니었다.
옆에 서 있던 여자애들까지
담배를 문 채 시시덕거렸다.
“쪽팔려.”
“쟤 표정 봐.”
그 비웃음은 주먹보다 먼저
소년의 얼굴을 때렸다.
그 순간 소년은 알았다.
여기서는 과거가 힘이 되지 않는다는 걸.
오히려 비웃음의 재료가 된다는 걸.
소년의 겨드랑이와 등에서 긴장의 땀이 흘렀다.
주먹싸움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지지 않는 법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망치지 않았다.
그 선택이
더 많은 주먹을 불렀다.
퍽!
뒤통수가 강하게 내려앉는 느낌.
눈앞이 꺼졌다가—
번개처럼 무언가가 번쩍였다.
이어지는 주먹과 발길질.
얼마나 맞았는지 알 수 없었다.
소년은 쓰러지지 않으려
두 손으로 얼굴과 머리를 감싸며 버텼다.
상대는 너무 많았다.
맞서기엔… 세상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동생과 친구들은 얼어붙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때 몇 명이 셔츠를 들어올렸다.
바지 안쪽에 꽂힌 검은 금속.
권총.
소년은 숨이 막혔다.
그리고…
비웃으며 즐기듯 바라보는 여자들의 시선도 느껴졌다.
다시 연달아 소년을 향해 날아드는 주먹.
퍽! 퍽! 퍽!
머리가 옆으로 꺾였다.
순간, 세상이 한 박자 늦게 따라왔다.
귀 안쪽이 웅— 하고 울렸다.
뇌가 흔들리는 느낌.
눈앞이 잠깐 하얘졌다가,
바로 물결처럼 흔들렸다.
다시
퍽!
이번엔 이마 쪽이 먼저 뜨거워졌다.
피가 몰리는 열감이 피부 밑에서부터 올라왔다.
시야 가장자리가 좁아지며,
검은 테두리가 끼는 것처럼 점점 닫혔다.
입 안이 철 맛으로 찼다.
혀가 먼저 알아챘다.
씹힌 건지, 깨진 건지 모르겠는데—
잇몸 어딘가가 찢어져 있었다.
침을 삼키는 순간,
따끔한 통증이 목구멍까지 따라 내려갔다.
소년은 숨을 들이마시려 했다.
근데 공기가 잘 들어오지 않았다.
갈비뼈가 한 번 더 눌린 것처럼,
숨이 짧게 끊겼다.
눈물이 나서가 아니었다.
그냥…
눈이 스스로 물을 뱉었다.
초점이 안 잡혔다.
사람들의 얼굴이 뭉개지고,
소리가 뭉개지고,
소년의 부풀어 오른 눈 시야 속으로,
얼굴 하나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누구였는지…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는데,
윤곽만 남아 있었다.
그 와중에—
그 얼굴만, 이상하게 남았다.
그 여학생이었다.
처음 학교에서 만났을 때,
소년과 동생을 “도와줬던” 그 두 명의 여학생들.
그때도 생김새는 낯설 만큼 화려했고,
말투는 친절이라기보다—어딘가 귀찮아하는 기색이 섞여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도 그날은 분명,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소년은…
그 얼굴을 ‘좋은 쪽’으로 기억해 두려했다.
그런데 오늘,
이런 식으로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다.
지금의 그녀들은 한 발 물러서 있었다.
말리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마치 구경거리라도 된다는 듯—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린 채,
그 장면을 끝까지 보고 있었다.
주변의 여자애들도 똑같았다.
웃음을 참는 얼굴. 대놓고 웃는 얼굴.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얼굴.
“재밌다”는 표정으로, 오래 보는 얼굴.
소년은 그 시선을 피하고 싶었는데
시야가 흔들려서 피할 수도 없었다.
고개를 돌리려 하면,
울렁—하고 세상이 더 기울었고
눈을 감으려 하면,
부은 눈꺼풀이 제대로 내려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더 끔찍한 건—
맞는 것보다,
머리가 울리는 것보다,
입안의 피맛보다도…
그 애들이 즐기는 눈이 먼저 기억에 남는다는 거였다.
계속 비웃는 여학생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 순간 소년의 머릿속에 문장이 하나 떠올랐다.
‘허리에 보이는 권총 손잡이보다…
때리는 애들보다…
저 시선이 더 무섭구나.’
그리고 또 하나.
‘외모가 힘이 되는 곳이구나.’
그 힘은 곧 침묵으로 바뀌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아무 감정도 보이지 않는 것.
그게 살아남는 방식이라는 걸
소년은 몸으로 배웠다.
그날 이후, 소년은 또 다른 걸 느끼기 시작했다.
부어오르고 피투성이 된 얼굴
만신창이 된
자기 몸보다 먼저
집이 무너지고 있다는 걸.
아버지는 소년보다 더 이 나라를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아버지는 달랐다.
말이 통했고, 일이 통했고,
사람들 앞에서 주저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다.
사업을 했고,
돈이 부족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모든 게 거꾸로였다.
말이 막혔고,
일이 막혔고,
사람 앞에서 점점 작아졌다.
아버지는 하루가 다르게 술에 기대기 시작했고
집 안의 공기는 점점 날카로워졌다.
처음엔 “피곤해서”였다.
그다음엔 “안 풀려서”였고,
어느 순간부터는—이유를 설명하지도 않았다.
그냥, 술병이 비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러다 갑자기—터졌다.
“내가… 내가 미친 지랄한다고 여길 와서 이 고생을 하냐고!”
목소리가 커진 뒤에야,
아버지는 자기 목소리에 놀란 사람처럼 잠깐 멈췄다.
그 멈춤이 더 무서웠다.
분노보다 후회가 먼저 들리는 침묵.
아버지는 한국에서 땅과 사업체를 정리하고,
가져올 수 있는 전 재산을 거의 다 털어왔다.
“여기서 다시 하면 된다”는 말 하나에 걸었다.
그런데 뭘 하려고 해도
먼저 와 있던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에 비해
잘 풀리지 않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만난 지 얼마 안 된 지인을 믿었다.
지인이 소개한 사람.
“괜찮은 사람”이라며, “바로 움직여야 한다”며,
술자리에서 웃으며 악수하던 사람.
그 자리는 전부 한국말이었다.
고향 얘기, 군대 얘기—
낯선 나라에서도 익숙한 단어들이 술잔 위에서 오갔다.
특히 육군 장교였던 아버지는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표정이 풀렸다.
계급 얘기, 부대 얘기, 누가 어디서 복무했는지—
그 순간만큼은 길이 생기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오케이. 오케이.”
그 말이 나올 때마다,
아버지의 경계가 한 겹씩 풀어지는 게 소년의 눈에도 보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더 안심했다.
말이 통하면, 사람이 통할 거라고 믿었다.
서류가 있었다.
숫자가 있었다.
명함이 있었다.
그리고 술이 있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고,
기다리던 전화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약속이 자꾸 밀렸다.
돈 얘기만 나오면 말이 흐려졌다.
아버지는 점점 말이 줄었다.
대신 술이 늘었다.
어느 날은 새벽에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해.”
“그 자식들… 이 새끼들... 나를 갖고 논 거 같아.”
소년은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도 못 했다.
아버지가 무너지는 순간엔
누구도 ‘정답’을 말할 수 없었다.
그때 소년은 아직 몰랐다.
아버지가 당한 건 “구식”이었다는 걸.
그때의 사기는 악수로 사람을 속였다.
앞으로의 사기는 클릭으로 시작할 것이다.
아버지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가락 끝이 하얘졌다.
그리고 다시—술을 들이켰다.
소년은 그 등을 보며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 나라는 아이만 때리는 곳이 아니라,
어른도 무너뜨리는 곳이라는 걸.
소년은 아직 몰랐다.
이때부터 그는
사람이 아니라 ‘반응’을 믿는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걸.
그리고 그 선택이 훗날
그를 가장 깊은 화면 속으로 끌어당기게 될 줄은—
아직 아무도 몰랐다.
소년은 사람보다 “반응”을 더 믿게 된다.
그리고 그 반응은, 언젠가 말이 되어 돌아온다.
—다음: 5장-1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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