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 안쪽으로 좁아진 세계

— 3장 (1~3부 통합) —

by 스팅비 StinG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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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 — 이동하는 세계, 끊어진 반응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3-1)

이별은 예고 없이 온다.
대부분은… 조용하게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그날 아침도 겉으로 보기엔 아무 일 없었다.
밥 냄새가 남아 있었고,
라디오는 을처럼 낮은 음량으로 켜져 있었다.

다만, 공기만 달랐다.


말은 짧아졌고,
어른들의 시선은 자주 바닥으로 떨어졌고,
식탁 위에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서류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소년은 묻지 않았다.
하지만 느끼고 있었다.
무언가가
조용히,
정리되고 있다는 걸.


그날 저녁, 부모님은
소년과 두 형제가 모두 집에 돌아오자
거실로 불렀다.

“야, 너희들 모두 여기 잠깐 앉아 봐.”


어머니 목소리는 낮았고, 평소보다 더 짧았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부모님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 대신 숨으로 합의를 확인하는 것처럼.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다.
하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애써 눌러 둔 긴장이
그대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미국에 가게 됐다.”


틀어 놓은 텔레비전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고 빨랐다.
자막이 계속 바뀌고, 화면 아래 속보 띠가 끊기지 않았다.


분명 나라에서 뭔가 벌어지고 있었다.

어린 소년은 정치가 뭔지도, 정권이 뭔지도 몰랐다.

그 나이엔 그런 말 자체가 자기 세계엔 없었다.

대신 기억나는 건,

어른들이 TV 앞에서 말을 줄이고, 표정이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특히 아버지의 얼굴이 먼저 굳었다.

아버지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텔레비전 옆에 손을 뻗어 볼륨을 조금 올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한참을 서 있었다.
마치 한 글자라도 놓치면 안 되는 사람처럼.

그러다 갑자기, 아무 말 없이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급히 전화를 걸려는 사람처럼—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며 번호를 찾기 시작했다.


소년은 그때 알았다.
‘지금 이 집에서 제일 급한 사람은 아버지구나.’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이미 미국에 먼저 가 있었다.


소년은 정확히는 몰랐지만,
아버지가 찾는 번호가 “미국”으로 이어지는 번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소년 가족들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등 아버지까지 포함해 육군 장교들이었다.

그들은 군복무 실절 미군 부대에서 같이 복무하였다.


집에는 매일 미국에서 건너온 통조림, 캔디, 빵, 과자 등으로 넘쳐났다.
평소엔 그게 그냥 “맛있는 것”들이었는데,

그날은 이상하게—그것들마저 조용하게 느껴졌다.

포장지 소리 하나 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걸 자주 학교에 가져가면
친구들이 "와~" 감탄과 부러움이 이어졌다.

“야, 이거 진짜 미국 거야?”
“너 이거 매일 먹어서 좋겠다”


캔디는
소년이 반 친구들에게 나눠 줄 때
제일 먼저 없어졌다.

“와, 달고 맛있다!”
“야, 하나 더 줘.”
“너네 집은 이런 거 매일 있어?”

나름 그래서 소년은 인기가 있었다.


부모님이 “미국 간다”라고 말한 그 통보는, 이상하게도 따뜻하지 않았다.

그날 밤 TV에서 흘러나오던 뉴스도 마찬가지였다.
아나운서 목소리는 낮았고, 자막은 끊기지 않았다.
분명 나라에서 뭔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엄마와 집 근처 큰 도로 쪽으로 걸었다.
평소라면 차가 끝없이 흘러가야 할 길이었다.
경적 소리, 엔진 소리, 매연 냄새… 그런 것들이 당연히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밖은 조용했다.

큰 도로 위에 차가 한 대도 없었다.

신호등은 켜져 있었고,

그 불빛 아래엔 아무것도 멈추지 않았다.


횡단보도는 있었는데,
건널 이유가 사라진 것 같았다.

소년은 그게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왜 이상한지는 몰랐다.

그냥… 도시가 숨을 멈춘 느낌이었다.

엄마도 말이 없었다.
걸음만 조금 더 빨라졌다.


소년의 손을 잡은 힘도, 조금 더 단단해졌다.

그때였다.

처음엔 소리가 아니었다.
공기가 먼저 눌렸다.

귀가 먹먹해지고, 가슴 안쪽이 묵직해졌다.

그리고 멀리서—거대한 울림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우우웅…


낮고 두꺼운 소리.
큰 도로 위를 통째로 덮는 소리였다.

아무도 없는 도로 위로
그 소리만 지나갔다.


소년은 그제야 확실히 느꼈다.
어제 뉴스에서 흐르던 “심상치 않음”이
오늘은 눈앞의 풍경으로, 소리로—현실이 됐다는 걸.


그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가슴이 출렁 내려앉을 정도로 무거워졌다.

넓은 차도 위를 말로만 듣고 텔레비전에서 봤던

군용 지프차들이 속력을 내며 지나간 뒤를
바로 줄지어 같은 속력을 내며 따라가는 샐 수도 없는 군용 차량들…


뒤에는 군인들이 총을 들고 트럭뒤에 앉혔었고

장갑차 탱크들이 줄지어 한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리는 걸 보았다.

지나가던 시민들도,

엄마와 소년은

한동안 그 행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우우웅— 낮고 묵직한 엔진 소리 위로,
철컥— 철컥— 궤도가 쇠와 쇠를 맞물리며 끊어졌고,
긁— 그르릉… 마찰음이 길게 따라붙었다.


그리고 한두어 번,
분필이 칠판을 긁는 듯한 고음이 삐익— 하고 얇게 튀었다가
곧바로 저음 속으로 삼켜졌다.

그런 반복된 소리가 자주 들려왔다.

그때 땅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린 것처럼, 발바닥이 먼저 떠밀리고
가슴 안쪽이 같이 울렸다.


그 웅장함이 무서웠다.

발바닥이 먼저 얼어붙고, 심장은 반대로 더 빨리 뛰었다.

도망가야 하는데… 눈을 못 떼었다.

겁나는데, 이상하게 멋있었다.

숨이 막히는데도—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쉬지 않고 울려오는 전화
전화가 끊기면 전화를 하느라 밤잠을 설치는 듯 보였다.

‘혹시 우리가 미국으로 갑작스럽게 가게 되는 게

이것과 관련이 있나?’

어린 소년인 대도

그 생각이 잠깐 스쳤다.


그 말은 거실 한가운데에 떨어지고,
잠깐 아무도 말을 못 했다.

누가 먼저 반응해야 하는지

서로 눈치만 보는 시간.


“언제요?”


형이 먼저 물었다.

아버지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무릎 위에 올려 둔 손바닥으로 바지천을 한 번 쓸었다.
습관처럼, 시간을 벌 듯 보였다.


그리고 숨을 한 번 짧게 들이마신 뒤에

입을 열었다.

대답은 짧았다.

“곧.”

그 한마디가

거실 공기를 더 무겁게 만들었다.


그때 알 것 같았다.

보통 형제 초청으로 미국에 간다는 건

말처럼 빨리 되는 일이 아니었다.

기다림이 길고,

중간중간 서류가 막히면 또 멈췄다.

근데 아버지는—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일이 년 전,

아버지가 온 가족을 데리고 사진을 찍으러 다녔던 기억이 났다.

그때는 그냥 “사진 남기자” 정도로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여권사진이었거나,

미국에 가기 위해 필요한 서류에 붙일 사진이었을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우리한테 먼저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준비부터 해두고,

마지막에 “이제 됐다”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소년은 그때 처음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결정된 일이었구나.’

그렇게 느꼈다.


소년의 머릿속에는
예전 장면이 스쳤다.

아버지가 농담처럼 말하던 날.

“너희들, 미국 갈래?”
“원하면 다 같이 갈 수도 있어.”


그땐 웃으며 흘려들었다.
어른들이 가끔 던지는 말버릇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그 말이 이렇게,

현실이 되어,
오늘 여기까지 닿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말없이
세 형제를 번갈아 보았다.
눈길이 천천히 머물렀다.


한 사람씩.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마치 지금 이 얼굴들을
하나라도 더
마음에 저장해 두려는 사람처럼.

“결정은… 이미 했어.”
어머니가 아주 작게 덧붙였다.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미 결정했어. 근데… 너희는 어떻게 생각해?”

이미 결정은 났고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우리에게 물으셨다.

그 말이 더 무거웠다.

그날 소년은 처음으로 알았다.
어른들이 조용해질 때는
이미 모든 결정을 끝낸 뒤라는 걸.


그날 밤, 소년은 방에 혼자 앉아 있었다.
‘미국에 간다.’
'하필 왜 지금 이렇게 갑자기...'

말은 끝났는데, 의미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되는 것 같았다.

소년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거실로 향했다.


유선전화기.
하얀 수화기.
길게 늘어진 선.

선 끝에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민정이의 숨소리가 있었다.

소년은 수화기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머릿속에서 문장을 만들어 봤다.
‘나 이사 가.’
‘미국에 가게 됐어.’
‘갑자기 그렇게 됐어.’


근데 어떤 문장도
입 밖으로 나오기엔 너무 무거웠다.
말로 꺼내는 순간,
진짜가 돼 버릴 것 같아서 두려웠다.


민정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말을 고를 때 잠깐 멈추던 숨,
조용히 웃던 소리.

그 모든 게 아직 소년 안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더 말할 수 없었다.
남아 있는 걸 직접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학교에서 민정이를 봤다.
교실은 늘 그렇듯 시끄러웠다.

아이들은 웃었고,
책상 끄는 소리가 들렸고,
운동장에서는 체육 수업 준비 소리가 들려왔다.


민정이는 친구들 사이에 있었다.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소년에게는 이상하게 멀게 느껴졌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인데도
유리 너머 같은 거리.

눈이 마주쳤다. 아주 짧게.

민정이는 소년을 알아봤고,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전부였다.
다가가지도, 부르지도 않았다.
말을 꺼내는 순간 모든 게 무너질 것 같았다.

소년은 그 변화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며칠 뒤, 수업 시작 전.

교실은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한껏 소란스러웠다.

그때 교실 문이 드르륵— 하고 열렸다.

담임 선생님이었다.

체육을 담당하던 그는
말수가 적었고, 웃음보다 침묵이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선생님이 들어서는 순간,
교실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반장이 일어났다.
“차렷!”
“선생님께 경례!”


아이들이 일제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의자에 다시 앉자마자

선생님이 말했다.

“자, 오늘 알릴 말이 있다.”

그리고 소년을 보았다.


“○○, 일어나서 앞으로 나와.”


소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건 칭찬도, 장난도 아니다.
몸이 먼저 알았다.

소년은 천천히 일어나

선생님 옆에 섰다.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바닥이 더 안전해 보였다.


아이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번졌다.

“조용.”
선생님이 짧게 눌렀다.

“안타까운 소식이다.”

“○○가 멀리 이사를 가게 됐다.”


순간 교실이 조용해졌다.

“아주 먼 곳이다.”
“미국이다.”
“언제 돌아올지는 모른다.”


소년은 그 말을
바닥을 보며 들었다.


“남은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서로 잘 지내길, 친구들이 서로를 격려해 주길 바란다.”


선생님의 말이 끝날 즈음
소년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 많은 얼굴들 사이에서

민정이만 보였다.

안경 너머로 눈이 크게 떠져 있었다.
그 눈이 말하고 있었다.
‘왜… 나한테는 먼저 말 안 했어?’


소년은 대답할 수 없었다.

수업 내내,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이 몰려왔다.

“야, 너 진짜 미국 가?”
“언제가는데?”
“와, 비행기 타는 거네!”


축하인지 부러움인지 모를 말들이 쏟아졌다.

소년은 웃는 척했지만
시선은 계속 민정이를 찾고 있었다.

민정이는 말없이 책상만 보고 있었다.

그 침묵이 더 무서웠다.

수업이 끝나고 학교를 나설 때까지
소년은 뒤를 여러 번 돌아봤다.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교실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복도—계단—신발장—현관 쪽으로 이어지는 길 내내
민정이를 찾았다.

누군가 “야, 잘 가라!” 하고 등을 툭 치며 지나가도

소년의 시선은 사람들 사이를 갈랐다.


민정이의 안경, 민정이의 걸음, 민정이의 목소리.
그것만 찾았다.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이 뛰었다.

공이 튀는 소리, 웃음소리, 누군가의 고함이 뒤섞였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소리들이
오늘은 이상하게 멀게 들렸다.

학교 정문이 가까워질수록
소년의 발은 더 느려졌다.


교문 밖을 나서는 순간,
소년은 마지막으로 학교 안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때 떠올랐다.

며칠 전, 하교 직후.
수돗가였다.

물소리가 맑게 튀고,
아이들의 웃음이 그 주변에 둥글게 맺혀 있던 자리.

민정이가 친구들 가운데에서 웃고 있었다.


카메라를 든 아이가 “하나, 둘, 셋!” 하고 외쳤고
민정이는 웃으며 친구들과 얼굴을 맞댄 채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장면이—

지금 이 순간처럼 또렷하게
소년의 눈앞에 겹쳐졌다.

소년은 그 기억을 붙잡은 채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봤다.


그때 뒤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 진짜 미국에 가?”

민정이었다.

안경 너머의 눈이 살짝 젖어 있었다.

“어… 우리 가족이 간대.”
“언제?”
“정확히는 몰라. 몇 달 후쯤.”


민정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술이 아주 조금 떨린 것 같았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구나.”


붙잡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그게 더 아팠다.

민정이는 그대로 돌아서 걸어갔다.

소년은 그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집으로 향했다.


그날 밤, 소년은 전화기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혹시 울릴까 봐.
혹시 울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전화는 울리지 않았다.


며칠 뒤, 전화가 울렸다.
따르릉—
따르릉—


소년은 벌떡 일어났다.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잠깐의 침묵.
그리고 익숙한 숨소리.

“… 잘 지냈어?”

민정이었다.


소년은 목이 잠겼다.
“응.”

그 한 글자가 이미
모든 걸 말하고 있었다.

민정은 잠시 말이 없었다.

숨소리만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나… 사실… 계속 너 전화 기다렸어.”


그 말 하나로 소년의 마음이 무너졌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말하지 못할 것 같았다.

소년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말했다.

“민정아… 나… 미국 가는 거 싫어.”

“너랑 헤어지는 것이 싫어, 민정아.”

“근데… 나… 앞으로… 학교도 못 나올 것 같아.”


전화기 너머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숨소리만, 길게 이어졌다.

그 침묵이 어떤 말보다 길었다.


“언제부터?”
“곧.”

다시 침묵.

민정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잘 가.”


붙잡지도, 원망하지도 않는 말.
그래서 더 아팠다.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화는 뚝—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그 소리는 이별의 소리라기보다
연결이 끊어지는 소리였다.


소년은 한동안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그날 소년은 처음으로 알았다.
이별은 항상 울음이나 다툼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아무 말도 못 한 채

각자의 시간으로 흩어지는 이별도 있다는 걸.


그리고 그런 이별이

오래도록 마음 안에 남는다는 걸.

소년은 아직 몰랐다.

이별보다 더 큰 단절이, 곧
하늘 위에서 시작된다는 걸.


— 2부 | — 하늘로 밀려나는 날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3-2)

언제 혼란스러웠다는 듯 소년이 느끼기에 나름 평온했다.

그러나 뉴스는 새 대통령 취임식 등으로 시끄러웠다.

한국을 떠나기 전, 가족은 거의 두 달을 여행만 했다.


아버지는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고, 지도책을 펴 놓고,
“여기 한 번.” “여기도.”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일정을 밀어붙였다.


동해부터 서해까지.
이름도 몰랐던 산길.
바다 냄새가 옷에 배는 저녁.
관광지보다 그냥 한국의 표정이 남는 곳들.


차는 한 대로 시작했다가,
친척들이 붙으면 두 대, 많을 땐 세 대가 됐다.

앞차에서 창문을 내리고 손을 흔들면
뒤차가 헤드라이트를 한 번 깜빡였다.


“다들 잘 따라오고 있지?” “응, 여기야.” 같은 신호였다.

휴게소에 들르면 어른들은 늘 같은 순서로 움직였다.


화장실—세수—물—간식.


그 시절엔 번쩍이는 것도 없었고,
그냥 삶은 달걀이나 어묵 국물, 우유 같은 게
따뜻한 김으로 사람을 붙잡았다.


아버지는 그때마다 꼭 같은 말을 했다.
“미국에 가기 전에 실컷 보고 가자.”
“많이 먹어둬라. 거기 가면 이 맛, 이 냄새… 생각보다 빨리 그리워진다.”


처음 여행을 시작했을 때는—민정이가 떠올랐다.
‘민정이랑 이렇게 돌아다녔으면 어땠을까?’

바닷가에 서 있으면 그 생각이 길게 늘어졌고,
산길을 올라 숨이 찰 때는 더 또렷해졌다.


그런데 또 어느 순간,
사촌들이 뛰어다니기 시작하면
어른들이 웃기 시작하면
소년도 같이 웃었다.


잠깐은 잊었다.
잊었다기보다—잊을 수 있는 척했다.

여행이 끝나갈수록,

어른들의 말에는 점점 “마지막”이 섞였다.

고모는 밥상에서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거기 가서 아프지 마라. 밥 꼭 챙겨 먹고.”


삼촌은 웃으면서도, 말끝을 꼭 눌러 말했다.
“꼭 잘 돼서… 너희들 훌륭한 사람 돼서 다시 만나자.”
“그리고… 꼭 다시 놀러 와라. 알겠지?”


누군가는 등을 두 번 두드렸고,
누군가는 손을 오래 잡고 놓지 않았다.

그 말들은 따뜻했는데,
따뜻해서 더 무거웠다.


소년은 그제야 알았다.
이 여행은 놀러 다닌 게 아니라,
아버지가 억지로라도 ‘마지막 기억’을 만들어 주려던 시간이었다는 걸.

그리고 그 기억이 다 채워졌다고 느낀 날,

가족은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은
소년이 알던 어떤 공간과도 닮지 않았다.

문을 들어서는 순간 공기가 달랐다.

차갑고 넓고,
사람의 온기가 바로 흩어지는 공기였다.

멀리서 굉음이 들려왔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비행기 엔진이 내는,

낮고 길고 묵직한 울림.

그 진동이 가슴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소년은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여기서부터는 다른 세계다.”

그 소리가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소년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너무 높았다.
시선이 닿지 않는 높이.

그 아래에서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였지만
아무도 서로를 보지 않았다.


각자 자기 표지판, 자기 줄, 자기 시간만 보고 있었다.

부모님은 소년 앞에 있었다.
아버지는 평소보다 말수가 적었다.

양복은 그때 흔히 보던 직장인 양복이랑 달랐다.

각이 너무 정확했다. 어깨선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소매 끝도 구김 하나 없이 떨어졌다.


단추는 꼭 끝까지 잠겨 있었고, 넥타이는 한 치도 비뚤어지지 않았다.
머리도—바람맞아도 흐트러지지 않게 눌러 빗어 놓은 듯 단정했다.

겉으론 차분해 보였지만

소년은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았다. 표정이 “없었다.”
그리고 그게 더 무서웠다.


눈은 앞을 보는데, 시선은 어디에도 걸리지 않았다.
주머니 속 손이 자꾸 움직였다.
뭔가를 만지작거리다가 멈추고, 다시 만지작거렸다.
잃어버리면 안 되는 걸 계속 확인하는 사람처럼.

아버지는 온몸으로 긴장을 참고 있었다.
주머니 안에서 손이 몇 번이나 움직였다.
뭔가를 확인하듯.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머니는 조금 달랐다.
세 형제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계속 눈길을 옮겼다.

형을 보고, 동생을 보고, 다시 소년을 봤다.
마치 이 넓은 공간에서
하나라도 잃어버릴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한시도 삼형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소년은 그 시선을 느낄 때마다
괜히 어깨를 움츠렸다.

출국 수속 줄은 길었다.

캐리어가 바닥을 긁는 소리.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알아듣기 힘든 안내 방송.

“Final boarding call…”

(자막: 마지막 탑승 안내…)

같은 단어들이 스쳐 지나가는데, 소년은 뜻을 몰랐다.

뜻을 몰라도—급해지는 분위기만은 알 수 있었다.

줄은 조금씩 앞으로 움직였다.

그만큼 뒤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직원이 손끝으로 다음 사람을 가리켰다.

“Next.”
(자막: 다음 분.)

아버지가 여권을 내밀었다.

직원의 손이 기계처럼 움직였다.
표정은 없고, 동작만 정확했다.

도장.
쿵.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소년의 가슴 안에서도

같은 소리가 한 번 더 울린 것 같았다.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순간

소년은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친척도, 친구도, 민정이도.

이별은 이미 끝난 뒤였다.


소년은 그제야 실감했다.
자기가 울고 있는 게 아니라,
여태껏 알고 지내던 세계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걸.

비행기 안은 생각보다 좁았다.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서로 다른 얼굴,
서로 다른 언어,
서로 다른 냄새.


소년은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손잡이를 쥔 손에 땀이 찼다.

엔진 소리가 점점 커졌다.

위—잉...

웅—
웅웅—

기체 전체가 떨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본능적으로 아버지를 봤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앞을 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손을 모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마치 “괜찮다”를 입술로 고정해 둔 사람처럼.


“곧 이륙합니다.”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소년은 그 말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몸은 이미 알고 있었다.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천천히.
그다음엔 점점 빨라졌다.

창밖의 불빛들이 길게 늘어졌다.

그리고—

몸이 갑자기 뒤로 눌렸다.
심장이 목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소년은 손잡이를 꽉 잡았다.


무서웠다.

그런데 더 강한 감정이 밀려왔다.

이상한 공허함.

발밑에서 땅이 떼어지는 느낌.

소년은 알았다.

이건 여행이 아니다.
도망도, 선택도 아니다.
이건—
밀려나는 거다.


하늘 위로 올라간 뒤에도 시간은 제대로 흐르지 않았다.
자다 깨도 여전히 하늘이었고

몇 번을 눈을 떠도 창밖은 같은 어둠이었다.

소년은 시계를 봤다.

서울 시간과 뉴욕 시간은 서로 어긋나 있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슬펐다.

마치 자기 시간이 어딘가에 놓고 온 것처럼 느껴졌다.


기내 영화가 흘러나왔다.
화면 속 사람들은 웃고, 울고, 싸우고 있었다.

소년은 그걸 멍하니 봤다.

내용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만
차갑게 느껴졌다.


드디어 비행기가

소년이 난생 처음 보는 거대한 도시 위를 지날 때,

소년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끝이 보이지 않는 건물들.

세상은 그가 알던 것보다 훨씬 크고, 차갑고, 빽빽했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자유의 여신상.

아, 여기가… 미국이구나.
그 생각이 떠올랐지만
가슴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기쁨도, 설렘도 없다.

그저 텅 비어 있었다.


소년은 아직 몰랐다.

이 비행이 목적지로 향하는 게 아니라,
사람 대신
‘반응’을 믿게 되는 세계로
이동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 3부 | — 낯선 환영, 그리고 첫 번째 밤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3-3)

비행기 문이 열리자 공기가 확 바뀌었다.

기내의 답답함이 한순간에 쓸려 나가고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몸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소년은 그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이게… 미국 공기인가.

통로를 따라 사람들이 천천히 움직였다.


발소리.

가방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

서로 다른 언어들이 한꺼번에 겹쳐 흘러나왔다.

소년은 부모님과 형제들 사이에서 조용히 걷고 있었다.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다는 걸

몸으로 느끼면서.


입국 심사대 앞.

줄은 길었고, 긴장감은 그보다 더 길었다.

직원이 여권을 넘겨받았다.

무표정한 얼굴.

컴퓨터 화면을 확인하는 손놀림은
너무 익숙하고 정확해서,
오히려 사람 같지 않았다.


소년은 괜히 침을 삼켰다.

낯선 나라의 공기는
비행기 문이 열리던 순간부터 이미 달라져 있었지만,
이곳에 서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아, 정말 왔구나.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멀리.

직원이 말했다.

“Look at the camera.”

(자막: 카메라를 보세요.)

소년은 말없이 카메라를 바라봤다.


소년은 괜히 등에 힘을 주고 서 있었다.

잘못하면… 여기서 “거절”당할 것 같아서.

도장이 찍혔다.

쿵.

출국 때와 똑같은 소리였다.

그런데 의미는 정반대였다.

돌아가는 소리가 아니라,

도착했다는 소리.


문을 나서자 사람들이 보였다.

손을 흔드는 얼굴들.

한국말로 서로를 부르는 소리.

그 사이에서 한 사람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큰아버지였다.

조금 살이 붙었고

머리엔 희끗한 흰머리가 섞여 있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또렷했다.

큰아버지는 가장 먼저 아버지에게 다가왔다.


“야, ○○야.”


짧은 포옹.

어깨를 두 번 툭툭 쳤다.

그리고 형제들을 한 명씩 훑어보며 말했다.


“애들 많이 컸네.”


그 말은 반가움이었지만

시간이 흘렀다는 확인이기도 했다.

큰아버지는 손을 크게 벌리며 말했다.


“자, 여기가 미국이다. 뉴욕이야.”


소년은 그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뉴욕은 지도 속 단어였고,

영화 속 배경이었다.

근데 지금은

자기 발밑에 깔려 있었다.

큰아버지는 웃으며 다시 말했다.


“잘 왔다. 고생 많았다. 잘 왔어.”


다른 친척들도 말을 보탰다.

“아이고, 얘들아. 오느라 힘들었지.”

“얼굴이 많이 피곤해 보이네.”

“그래도 이제 다 왔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지만

그 웃음이 자기 것 같지 않았다.

차를 타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창밖 풍경은 서울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달랐다.


도로는 넓고

차들은 끊임없이 흘러갔다.

표지판의 글자는 낯설었고

발음할 수 없는 단어들이 연속으로 지나갔다.


형제들은 이것저것 물어봤고

큰아버지는 대답해 줬다.

“저쪽이 맨해튼이야.”

“저 다리는 브루클린 브리지.”


소년은 창에 이마를 살짝 기댄 채 밖을 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는데

자기만 멈춰 있는 느낌이었다.

큰아버지 집은 생각보다 넓었다.

천장은 높고 방은 많았다.


짐을 들어주고

인사를 나누고

말들이 겹쳐졌다.

“배고프지?”

“조금만 쉬어.”

“내일 천천히 얘기하자.”


소년은 그 속에서 계속

“네.” “괜찮아요.”

라고 대답했다.

근데 그 말들은

마음에서 나온 게 아니라

몸에서 자동으로 나왔다.


그날 밤.

소년은 처음으로 미국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침대는 푹신했지만 익숙하지 않았다.

천장은 서울 집보다 높았고

벽색도 달랐다.


불을 끄자

집 안이 이상할 만큼 조용해졌다.

멀리서 차 소리만 작게 들렸다.

소년은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리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낮에 들었던 소리들이 다시 밀려왔다.

비행기 엔진 소리.

도장 찍히는 소리.

큰아버지의 웃음소리.


그리고—

민정이의 목소리.

“그럼… 잘 가.”

소년은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천장을 한참 바라봤다.

여기에는 그녀가 없었다.

전화기도 없었고

익숙한 거리도 없었고.

소년은 이제야 완전히 실감했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자기의 이름을

자기 방식으로 불러 주지 않는다는 걸.

그날 밤, 소년은 처음으로

세상에서 완전히 혼자가 된 것 같았다.


소년은 아직 몰랐다.

이 고립이 그를 무너뜨릴지,

아니면 사람 대신

‘기계의 반응’을 붙잡게 만들지.

그 답은 아직

켜지지 않은 어떤 화면 속에 있었다.


—다음: 4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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