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시기

— 7장 (1~3부 통합) —

by 스팅비 StinGBee

커버포스터 1 최종.png 버티는 삶에는 언젠가 균열이 온다

[PART 1/3] 너를 품에 안으면 [7장-1부] — 청년 시기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7-1)

텍사스에서 다시 잘해보자는 결심은 뒤로한 채
여전히 틈나는 대로 술담배는

친구들과 틈나는 대로 만나서 즐겨 했다.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소년’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몸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어른’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모자랐다.

소년이라고 부르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그 사이,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시간.

그 한가운데 서 있는 존재.

‘청년’.

졸업장은 손에 넣었지만
그 종이 한 장이
다음 세계의 문까지 열어주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물었다.

“이제 대학 가야지? 어디로 정했어?”


그 질문에는 이미 정답이 붙어 있는 것 같았다.
가야 하고, 가면 되고, 그러면 되는.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대학은 포기했다.

이유를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돈 때문도, 성적 때문도 아니었다.


아버지도 나름 열심히 살아 보려 했고,
어떻게든 잘해 보려 했다.

하지만 늘 문제는
그놈의 술이었다.

술만 들어가면
아버지는 180도 달라졌다.

전혀 다른 누군가가 되어 버린 아버지와 마주하는
지옥 같은 시간이 시작되곤 했다.


“이 두 놈 새끼들, 형처럼 공부 열심히 해서
의사가 못 되면 다른 거라도 하든가,
아니면 군대를 가든가 해야지!

이것들은 군대를 가서
정신이 들어야 돼!

돈 없었으면
벌써 죽었을 놈들이야.


1.4킬로, 1.5킬로 나가던 새끼들.
돈 쳐들여 가며 기껏 키워놨더니
공부는 제대로 안 하고 사고만 쳐!

공부에 소질이 없으면
당장 나가서 일이라도 해!”


말이 끝나자,
부엌 쪽에서 컵이 탁— 내려앉는 소리가 났고,
집 안은 순간 숨을 죽인 것처럼 조용해졌다.

그저—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쉬는 법을 잊어버린 상태였다.
쉬면, 그 틈으로 뭔가 올라올 것 같은 느낌.

뉴욕에서부터 따라온 것들—

이유 없는 주먹, 비웃던 얼굴, 총구의 방향.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몸속에 들어온 바이러스처럼 잠복해 있었다.

증상은 없는데 존재는 분명했다.

아직은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형은 의사의 길로 들어갔다.

같은 집에서 자랐는데도

형은 “앞”으로 갔고
청년은 “버티는 쪽”으로 갔다.

청년과 동생은 일을 시작했다.

주유소.
편의점.
창고.
용접.

되는 대로 했다.


새벽 근무, 야간 근무, 주말 근무.
몸이 먼저 움직였고 머리는 그 뒤를 따라갔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다.

웃을 땐 웃었고,
농담에도 반응했다.


정상인처럼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썼다.

겉으로 보면 문제없어 보였다.

하지만 마음 한쪽에는
아직 열리지 않은 방이 있었다.

열면 쏟아질 걸 아는 사람의 방.

거울 속 얼굴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부모의 유전을 타고난 덕에 키는 컸고,
이목구비는 선명해졌다.

그런데 그건 성장이라기보다

오래 깨어 있던 사람의 얼굴이었다.


피곤해서가 아니라,

쉴 수 없어서 생긴 얼굴.

무언가를 너무 일찍 봤고,

너무 일찍 이해해 버린 사람의 표정.

겉은 멀쩡했지만

안은 조금씩 비어 가고 있었다.


일을 하며 청년은 또 하나를 배웠다.

외모는 여전히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과

주유소 카운터 앞에서, 창고 바닥에서,

사람들이 청년을 대하는 방식은 미묘하게 달랐다.

존중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경계였다.


청년은 그 차이를 이용하지 않았다.

다만 알아차렸을 뿐이다.

그리고 알아차리는 순간
사람은 조금씩 변한다.


밤이 되면 청년은 혼자 있는 시간을 늘렸다.

TV를 켜놓고 멍하니 앉아 있거나,
라디오 소리를 배경처럼 흘려보냈다.

조용한 공간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보다 소리가 덜 피곤했고,
화면은 기대하지 않아도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청년은 컴퓨터를 아직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준비는 되어 있었다.

감정이 섞이지 않고,

즉각 반응이 돌아오며,
판단을 대신해 주는 세계를
그는 본능적으로 원하고 있었다.


그 이유를 아직은 이름 붙이지 못했을 뿐이다.

청년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는 괜찮다.'


일도 하고 있고, 살아가고 있고, 문제는 없다.

하지만 거울 속 얼굴은 알고 있었다.

이건 괜찮은 얼굴이 아니라

버티는 얼굴이라는 걸.

그리고 버티는 삶에는

언젠가 균열이 온다는 걸.


그 균열은
주유소에서

처음으로 소리를 내며 열리게 된다.

총성과 함께.


[PART 2/3] 너를 품에 안으면 [7장-2부] — 주유소, 총성과 이명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7-2)

주유소 — 잠들지 않는 밤, 총은 이미 그 자리에 있었다

주유소의 하루는 길고 고되었다.

청년은 새벽 네 시에 일어났다.

아직 해가 뜨기도 전,
출근하는 사람들을 위해 불을 켜야 했기 때문이다.


새벽에는 트럭이 들렀고,
아침엔 직장인들이 급히 차를 세웠고,
밤이 되면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손님들이 하나둘 스쳐 갔다.


영업은 밤 열두 시까지.
주말이면 새벽 두 시까지.

몸은 분명히 지쳤지만

버틸 수 있었다.


그전까지
주유소, 편의점, 창고, 용접—
닥치는 대로 일해 왔던 시간이
여기서는 도움이 됐다.

버는 돈은 크지 않았지만

누구에게 기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청년을 지탱했다.

내가 성실히 일하면, 계속 굴러갈 수 있다.

그 생각 하나로 청년은 하루하루를 버텼다.


이곳에서 총은 특별한 물건이 아니었다.

청년이 처음 놀란 건,

총이 ‘숨겨진 물건’이 아니라
그냥 물건처럼 놓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큰 길가에 간판 하나 걸려 있으면

그게 총포상이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벽엔 사냥용 라이플이 걸려 있고,
선반엔 샷건이 줄을 맞춰 서 있었다.

권총은 유리 진열장 안에서

보석처럼 반짝였다.


총을 고르는 사람들도 특별하지 않았다.

작업복 입은 아저씨,
캡 모자 눌러쓴 젊은 남자,
주말에 가족 데리고 나온 사람까지—

세제 고르듯, 공구 고르듯

그들은 총을 고르고 있었다.


청년이 생각한 ‘절차’는 복잡하지 않았다.

신분을 확인하고, 서류 몇 장에 사인하고,
잠깐 기다리면 끝나는 일.

적어도 그때의 청년은
그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가게 직원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First time?”
(자막: 처음이세요?)

청년은 고개만 끄덕였다.

직원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You got a preference? 9 mil or. 45?”
(자막: 따로 원하는 거 있어요? 9밀리요, 아니면 45구경이요?)


총 구경 얘기가
빵 크기 고르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오갔다.

그날 청년은 깨달았다.

여기서는 총이
‘금기’라기보다
언젠가 필요할 수도 있는 도구로 취급된다는 걸.


그래서 총은
서랍 깊숙이 숨겨지는 게 아니라
카운터 아래,
허리 뒤,
손이 닿는 거리 안에 있었다.

청년도 결국

그 흐름 안으로 들어갔다.


불안해서라기보다—
마치 언젠가는 쓸 날이 올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날이 왔다.

밤 열한 시를 넘긴 시간.

가게 안은 조용했고
형광등 소리만 일정하게 울렸다.


그때 유리 밖으로
두 개의 그림자가 스쳤다.

후드를 눌러 쓴 남자 둘.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청년은 알았다.


이상하다.


보통 사람은 놓쳤을 장면이었다.

하지만 청년은 어릴 때부터
너무 많은 ‘이상한 순간’을 겪어 왔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카운터 아래에서 총을 쥐었다.

손에 익은 무게.

시선은 유리문을 향했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그들은 움직였다.

복면을 얼굴로 내려쓰며

권총을 꺼냈다.

“Get the f—k down! Get down! This is robbery!”

(자막: 엎드려! 엎드려! 강도다!)


청년은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총성이 가게 안을 찢었다.

강도들은 이런 반격을 예상하지 못한 듯

순간 멈칫했다.

한 명은 그대로 밖으로 도주했다.

다른 한 명은
가게 안을 휘젓듯 뛰기 시작했다.


당황해서인지, 타이밍을 놓쳐서인지—
그 판단 하나가 그를 그 안에 남게 했다.

청년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그리고 또—


탕!. 탕!.

탕!. 탕!. 탕!.


화약 냄새가 가게 안을 채웠다.

뉴욕의 클럽에서 맡았던 그 냄새였다.

절대 잊히지 않는 냄새.

순식간에
가게 안은 연기로 자욱해졌고,
유리는 깨졌고,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청년은 나중에 생각했다.
그 싸움은 대략 십여 분가량 이어진 듯했다.

하지만 실제 시간은

몇 분도 채 되지 않았다.


경찰이 도착했고 조사가 이루어졌다.

질문, 답변, 서류.

청년은 담담하게 응했다.

총을 쐈다는 사실보다

그 상황에서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는 게
더 낯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갑자기
다른 장면들이 밀려왔다.

뉴욕.

클럽.
총성.
피.
화약 냄새.


그날의 주유소보다
어린 나이에 겪었던 그 밤이
더 선명했다.

청년은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총격전이 아니라,

이미 몸속에 들어와 있던 기억들이
밤새 깨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몰랐다.

이 총성은 끝이 아니라
신호였다는 걸.

이명 — 총알은 스쳐 갔는데, 소리는 남았다.

총성이 울렸을 때,
청년은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소리를 느끼지 못했다.


너무 컸기 때문이 아니라
아드레날린이 뇌를 꽉 채워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의 세계에는 소리가 없었다.

움직임만 있었고,

빛과 그림자,
방아쇠를 당기는 감각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 모든 게 끝난 뒤—

경찰이 도착하고 질문이 시작되고,
청년이 의자에 앉아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을 즈음에야
귀가 멍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압력이 걸린 것처럼 먹먹했고,

잠시 뒤


삐—


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주 얇고, 끊기지 않는 소리.

청년은 고개를 흔들어 봤다.

귀를 눌러 봤다.

침을 삼켰다.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총성이
귀 안에 눌러 박혀 버린 것처럼.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그 소리는 계속됐다.

엔진 소리 위로, 라디오 위로, 숨소리 위로—


삐———


다음 날에도.

눈을 떴을 때도 먼저 들린 건 그 소리였다.

청년은 그때 처음 생각했다.

이게… 사라지지 않으면 어쩌지.

총알은 몸을 스쳐 갔지만

소리는 안쪽에 남아 버린 것 같았다.


다음 날 주유소는 문을 열지 않았다.

유리는 깨져 있었고,
선반은 쓰러졌고,
바닥에는 아직 닦이지 않은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핏자국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었다.

탄두 자국.

벽에 파인 작은 구멍들.
카운터 아래에 흩어진 탄피.


청년은 고무장갑을 끼고
걸레를 들었다.

세제를 푼 물에 걸레를 적셔
바닥을 몇 번이고 문질렀다.

문질러도, 문질러도
기억 속에 눌어붙은 냄새는
쉽게 빠지지 않았다.

화약 냄새였다.

그 냄새는
코끝보다 먼저
기억을 건드렸다.


걸레를 쥔 손이 잠깐 멈췄다.

전날 밤의 장면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정확하게 되살아났다.

근거리였다.

너무 가까워서 얼굴이 보였다.

눈, 입,

숨을 들이마시는 가슴의 움직임까지.


청년은 생각했다.

영화에서나 가능한 장면이라고.

사람 얼굴을 보면서 방아쇠를 당긴다는 건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일이라고.


그는 항상 대비하고 있었다.

총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
어떤 각도로 꺼내야 하는지,
위험할 때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머릿속에는 수없이 많은 시뮬레이션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그 모든 이론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인간성도, 망설임도,

‘이래도 되나’라는 질문도.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놀라운 건 그 사실이었다.

청년은 당황하지 않았다.

손이 떨리지도 않았고 머리가 하얘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상대보다 더 침착했다.

강도들의 눈에는 당황이 있었고,

예상 밖의 상황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하지만 청년에게는 그게 없었다.

이미 어딘가에서 여러 번 겪어본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뉴욕의 밤.

클럽의 총성.

그때 맡았던 화약 냄새.

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건 처음이 아니다.

그래서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였고,
생각보다 정확하게 대응했다.


그 사실이 청년을 안심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청년은 걸레를 쥔 채 한참을 서 있었다.

내가 침착했다는 게… 정상일까?

대답은 없었다.

대답을 찾으려 들면
더 깊은 곳으로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바닥을 닦았다.

지워지는 건 자국뿐이었다.

머릿속 장면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 청년은 알게 되었다.

살아남는 법은 배울 수 있지만,

그 이후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자신 안 어딘가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쪽으로 조금 움직였다는 것도


[PART 3/3] 너를 품에 안으면 [7장-3부] — 하나, 그리고 붕괴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7-3)

몇 주가 흐르고 난 그날도 평소와 다르지 않은 밤이었다.

시계는 밤 열 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고,
가게 안에는 형광등 불빛만 묵묵히 켜져 있었다.

청년은 카운터 안에 서 있었다.

커피 머신의 낮은 소음,
냉장고에서 새어 나오는 진동,


자동문이 열릴 때 나는 짧은 알림음을.

문이 열렸다.


딩—


청년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Hello.”
(자막: 어서 오세요.)


신발 소리가 들렸고,
천천히 다가오는 기척.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가 서 있었다.

동양 여자였다.

검은 머리,
정돈되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운 스타일.

화장은 옅었고,

옷차림은 튀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눈에 걸렸다.


이유는… 얼굴이 아니라 향이었다.

가까이 오자,
처음 맡아보는 향수가 아주 얇게 스쳤다.

나쁘지 않았다.

달지도 않았고, 독하지도 않았다.

그냥 “정돈된 사람” 같은 냄새.

청년은 그 향을 굳이 기억하려 한 건 아니었다.


다만 한 번 맡으면 잊기 어려운 종류라는 걸
몸이 먼저 알아차렸을 뿐이었다.

그녀는 잠깐 진열대를 훑어보다가

곧장 카운터로 시선을 옮겼다.


담배 진열대로 그녀의 시선이 집중되는 걸 알았다.

청년은 그 시선을 보는 순간
이미 알았다.

“Which one?”

(자막: 어떤 걸로 드릴까요?)


그녀가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Uh… Marlboro Lights.”
(자막: 말보로 라이트요.)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아 담배를 꺼냈다.
카운터 위에 담배를 올려놓는 순간

그녀가 다시 말했다.

“Can I get a lighter too?”

(자막: 라이터도 하나 주세요.)


청년은 서랍을 열어 라이터를 꺼냈다.

“Sure.”
(자막: 네.)


지폐가 오가고 잔돈이 내려놓아졌다.
그 과정 내내 둘은
굳이 눈을 오래 마주치지 않았다.

그저 손님과 점원.

담배와 라이터를 집어 든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Thanks.”
(자막: 고마워요.)

청년은 짧게 대답했다.

“Have a good night.”
(자막: 좋은 밤 보내세요.)


그녀는 문 쪽으로 향했다.
자동문이 열리고
밤공기가 잠깐 스며들었다가
곧 닫혔다.


딩—


가게 안은 다시 원래의 리듬으로 돌아갔다.
청년은 담배 진열대를 한 번 더 바라봤다가
고개를 숙였다.

손님이네.

그 정도였다.

아직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어느 날 밤,

청년은 친구들과 함께 늘 가던 노래방으로 향했다.

건물은 낡았고

입구 계단에는 언제 닦았는지 모를 끈적한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문을 열자 익숙한 공기가 얼굴을 덮쳤다.

술 냄새, 담배 냄새,
여기저기서 새어 나오는 노래들.


문 하나를 열면 80년대 발라드가 새어 나왔고,

다른 문에서는 90년대와 2000년대 댄스곡이 쿵쿵거렸다.

복도 끝에서는 박자를 놓친 고음이

서로 싸우기라도 하듯 튀어나왔다.


방 안에서 웃음이 터졌다.

“야야, 돼지 멱 따는 소리 좀 그만해!”

남자들끼리 모이면 이야기는 늘 그쪽으로 흘렀다.

“야, 요즘 만나는 애 있냐?”

“없어. 귀찮아.”
“에이, 또 그러네.”


청년은 말없이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아무도 주유소 얘기를 하지 않았다.

아무도 총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누군가 툭 던지듯 말했다.

“근데… 너 괜찮냐?”
“아직 살아 있네.”


그게 전부였다.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는 말도,
아니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청년은 떨어진 술과 담배를 더 사러 로비로 나왔다.

로비는 방 안보다 더 시끄러웠다.

사람들이 섞였고, 연기가 섞였고,
웃음과 욕설이 벽에 튕겨 다녔다.

그때였다.

로비 한쪽에서
익숙한 향이 스쳤다.


청년은 본능처럼 고개를 들었다.

처음 맡아보는 듯했는데,
분명히 기억나는 향.

나쁘지 않았고—

그래서 더 오래 남았던 향.

그리고 그 향의 끝에

그녀가 서 있었다.


주유소에서 보았던 여자.

청년은 본능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녀였다.
주유소에서 보았던 여자.

같은 얼굴, 같은 머리, 같은 향수 냄새.

청년은 잠깐 멈췄다.


이명...


늘 귓속을 채우고 있던 삐— 하는 소리가
그 순간만큼은 조금 멀어졌다.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뒤로 물러난 느낌이었다.

그녀가 청년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혹시… 그때 그 주유소… 맞죠?”


청년은 그제야 말했다.


“아… 네. “향수 냄새… 그때랑 같은 거 쓰셨네요.”


그녀가 웃었다.


“거기서 봤던 분 맞죠?”


그 목소리는 이상할 만큼 선명했다.
주변의 소음이 순간 낮아진 것처럼
그녀의 말만 또렷하게 들어왔다.


그녀의 친구가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그녀가 대답했다.


“아니, 그냥… 본 적 있어.”


그때 옆에서 누가 불렀다.


“야, 하나야.”


짧은 침묵.

그녀가 덧붙였다.


“응… 며칠 전에 다리 건너에 있는 주유소에서…”


그 옆에서 청년의 친구가 능숙하게 말을 붙였다.


“우리 방 넓은데, 같이 들어가요. 안에 남자 둘 더 있어요.”


여자들은 서로 눈치를 봤다.
속닥, 히히덕.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방 안.

처음엔 존댓말이었다.

이름을 말하고, 나이를 말하고,
술이 오르자 말은 존댓말과 반말이 섞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반말이 됐다.

노래가 이어졌다.

몇 곡 뒤,

청년은 마이크를 잡았다.

이문세〈Solo예찬〉

반주가 흐르고 첫 소절이 나왔다.


✨♪ 밤새워 안아~ 줄 그~녀~~ ♪✨

✨♪ 내~앞에 나타날 거라고 난!~ 믿어 의심치 않아~ ♪✨


그때 귀 안의 소리가 사라졌다.


삐——


그 소리가 완전히.

그녀는 청년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고

말없이 이어진 침묵.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오빠… 노래 잘하네요.”


청년은 그제야
숨을 쉬는 느낌이 들었다.

술이 더 오르고,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비웠다.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둘만 남았다.

노래는 끝났고,

말도 끊겼다.


잠깐의 공백.

그녀가 청년 옆자리로 자연스럽게 이동했다.

어깨가 닿고

손등이 살짝 스쳤다.

둘 다 피하지 않았다.

청년은 그 손의 온도를 느꼈다.

총도, 싸움도, 이명도 아닌—

전혀 다른 종류의 긴장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가 아주 작게 말했다.


“아까… 노래할 때.”


청년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숨이 섞였다.

아직 입술은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 순간 청년은 알았다.
이 밤이 자신의 인생을
다시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시작이 총성이 아니라—

한 사람의 목소리였다는 걸.


붕괴는 — 조용히 이어졌고, 조용히 무너졌다

그 사랑은 조용히 시작됐고
조용히 이어졌다.

그녀는 청년의 과거를 깊게 묻지 않았다.

청년도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평화처럼 보였다.

하지만 침묵은 쌓이는 것이었다.


처음엔
그녀의 말이 귀엽게 들렸다.


“오빠 오늘도 바빠. 빨리”


청년은 웃었다.
애교로 받아줬다.


“잠깐만. 나 늦게 끝나.”


그녀는 말했다.


“괜찮아. 나 기다릴게.”


그때까진
그 말이 진짜 같았다.

미인상은 아니었는데 매력이 있었고

노래도 이것저것 가림 없이 잘 불렀다.

발라드부터 빠른 댄스곡까지, 특히 춤을 아주 자연스럽게 잘 췄다.

처음엔 거기에 매료됐었는데
알고 보니 하나는 놀자판 쉬지 않고 놀러 다니는...


그리고 그녀는 남자가 필요한 게
그녀와 밤새 술 마시고
그녀 옆에서 즐겨줄 남자를 찾고 있었던 것이었다.

도저히 청년이 밤늦게까지 일하는데
젊은 체력에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마치 그녀는
밤이 길어질수록 더 멀쩡해지는 사람 같았다.


시간이 지나자
말끝이 조금씩 달라졌다.


“오빠 오늘도...”


그 말에
짜증이 섞여 나왔다.


“오늘도...”
“오늘도 바빠?”
“오늘도 일?”


청년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냥 피곤했다.

일은 계속됐고

삶은 앞으로만 흘러갔다.

이명은 다시 돌아왔다.

조금씩, 확실하게.


그러다 어느 날.

아무 일도 없던 날,
모든 것이 무너졌다.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일만 하다 죽을래?”


청년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어서 말했다.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지”


그 말은
조언처럼 들렸지만
청년에게는
통보처럼 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말은 그녀의 배신으로 이어졌다.

설명도, 변명도 길지 않았다.


청년은 화내지 않았다.
소리도 지르지 않았다.

그저 안쪽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끊어졌다.

그날 이후 귀의 소리는 더 커졌다.

이번에는
그녀의 목소리로도 덮을 수 없었다.


그리고 청년은
처음으로 준비하게 된다.

사람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와 대화할 준비를.


—다음: 8장-1부에서…


[안내 — 모방 범죄 주의]

본 작품에는 범죄 수법·수사 절차·법정 장면이 현실적으로 묘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범죄를 미화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함이 아니며, 현실에서의 모방을 강력히 금합니다.
작품 속 사건은 허구 또는 각색이며, 어떠한 범죄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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