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장 (1~4부 통합) —
[PART 1/4] 너를 품에 안으면 [8장-1부] — 스팅비 아이디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 8-1)
(※ 본 편에는 온라인 집단 괴롭힘/욕설 표현이 등장합니다.)
스팅비 아이디가 만들어지던 밤, 그리고 판이 닫히던 밤
여러 날이 흘렀고, 그리고 그날 밤 역시, 그리 특별한 밤은 아니었다.
일이 끝난 뒤 샤워를 하고 나와 작은 책상 앞에 앉았다.
얼마 전, 친구들이 청년에게 물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야, 너 야후 채팅 아직도 안 해 봤어?”
그때는 ‘채팅’이 그냥 타이핑만 뜻하는 게 아니었다.
채팅방에 들어가면 각 나라에 흩어져 있던 한국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운이 좋으면 마이크를 켜고 진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다.
“거기 한국 사람들 많아. 재밌어.”
“오늘 밤에 같이 들어가자. 우리 방 하나 잡아둘게.”
그 말이 이상하게 남았다.
바로 그 주말엔
볼 영화도, 할 게임도 딱히 없었다.
손에 잡히는 건 없는데
시간만 쓸데없이 많았다.
그래서 청년은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야후 채팅을 켜 보기로 했다.
형광등 하나가 켜진 방.
의자는 오래 앉으면 허리가 아픈 싸구려였다.
머리카락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목덜미를 간질였다.
수건으로 대충 닦고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눌렀다.
‘삑—’
모니터가 켜지기까지 몇 초의 공백이 있었다.
그 공백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검은 화면. 숨.
그리고 천천히 떠오르는 빛.
윈도우 로고.
익숙한 바탕화면. 아이콘 몇 개.
인터넷에 연결했다.
모뎀에서 나는 소리—
지금 세대는 흉내도 못 낼, 긁히고 울리고 이어붙이는 소리.
삐… 끼이익…
뚜-두두두…
딱.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묘하게 안심이 됐다.
아, 오늘도
세상 어딘가로 연결은 되는구나.
모뎀이 연결되고, 야후 채팅을 눌렀다.
야후 채팅 로고가 뜨는 순간—
채팅방에 접속되기 전까지 스피커에서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야후 채팅입니다. 야후 채팅입니다.”
야후(Yahoo) 메신저를 눌렀다.
로그인 화면.
아이디가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쓰고 싶지 않았다.
실명에 가까운, 너무 ‘나’ 같은 이름들.
그 이름으로 들어가는 순간 내가 설명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본명을 쓰면 묻는다.
어디서 왔냐, 왜 왔냐, 언제 왔냐.
발음이 왜 그러냐, 어느 나라 사람이냐.
나는 그 질문에 답하는 순간부터
내가 내 자리를 잃는 느낌이 싫었다.
그래서 그날은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다.
Create New ID
(자막: 새 아이디 만들기)
커서가 깜빡였다.
아이디를 뭘로 할까.
본명을 쓰고 싶진 않았다.
미국 이름도 싫었다.
한국 이름은 더 싫었다.
이름이 붙는 순간,
사람들은 나를 하나의 설명 안에 묶어버리는 것 같았다.
어떤 이름이 좋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책상 위에 놓인 꿀통을 봤다.
그때 떠오른 단어가 Bee였다.
하지만 그냥 Bee는 너무 단순했다.
이미 누군가의 이름 같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벌은 쏜다.
작지만 빠르게 닿고,
크게 상처를 남기진 않아도
기억은 남기는 것.
그리고 Bee.
혼자 날아다니는 것 같아도
완전히 군집을 떠나진 않는 존재.
그래서 붙였다.
Sting + Bee.
StingBee.
작지만 잊히지 않는 것.
혼자인 듯 보여도
끝내 완전히 혼자는 아닌 것.
아이디 칸에 입력했다.
이미 사용 중이라는 표시가 떴다.
그래서 철자를 하나 바꿨다.
StingBee — 안 됐다.
Stingbees — 이상했다.
다시.
StinGBee77
77은 의미를 깊게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숫자 7이 좋았고 나이를 묻지 않게 해주는 숫자였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게 해주는 숫자.
모니터에 사용 가능하다고 떴다.
그 순간,
엔터를 누르기 전 아주 잠깐 멈췄다.
이름을 만든다는 건
사람 하나를 만든다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눌렀다.
엔터.
로그인이 됐다.
내 이름이 아닌 이름.
화면 오른쪽 아래에
내가 만든 사람이 작게 떠 있었다.
StinGBee77
온라인.
그 글자가 왠지
내 심장보다 먼저 세상에 도착한 것 같았다.
로비라는 소음
야후 채팅.
검은 배경, 회색 글자, 깜빡이는 커서.
로비 화면은 마치
소음으로 가득 찬 역 대합실 같았다.
방 제목들이 미친 듯이 올라왔다.
— 한국사람만
— 미주교포방
— 외로움
— 30대 대화
— 성인
— 오늘도 혼자
— 그냥 수다
그 사이사이
눈을 피할 수 없게 덕지덕지 붙은 광고들.
번쩍이는 배너, 눈에 걸리는 문구,
손가락이 닿기만 하면
다른 세계로 튀어버릴 것 같은 링크들.
청년은
그 속을 헤집고 들어갔다.
그러다 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 사람만 입장.
화면이 바뀌자마자
말들이 쏟아졌다.
“하이”
“남자?”
“여자?”
“나이?”
“어디에 살아?”
“사진 있어?”
“마이크 돼?”
그 질문들은 관심이 아니라
통관 절차 같았다.
이 방에서 사람은
사람으로 먼저 시작하지 않았다.
정보로 시작했다.
청년은 말이 없었다.
그냥
아이디 옆 초록불만 조용히 유지했다.
StinGBee77 — 온라인
말에없으면 안전하다고 믿었다.
말이 없으면 연결이 없고,
연결이 없으면 책임도 없고,
책임이 없으면 후회도 없다고.
그렇게 믿었다.
선을 긋는 사람
그 믿음에는 이유가 있었다.
지나간 기억이
잠시 그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건 뉴욕의 어느 주말 밤이었다.
차이나타운 한복판의 클럽.
음악은 귀를 때릴 만큼 컸고,
공기는 땀과 술 냄새로 끈적했다.
사람들은 서로의 어깨를 밀쳤고,
욕설은 음악 사이를 비집고 날아다녔다.
처음엔 하찮은 시비 같았다.
하지만 그런 밤은 늘 그랬다.
작은 불씨 하나가
순식간에 패싸움으로 번져 버렸다.
그리고—
탕!
총성이 공간을 찢었다.
사람들이 놀라 흩어졌고,
끊긴 줄 알았던 소리는 다시 이어졌다.
탕! 탕!
당시 청년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고
바닥에는 피가 번져 있었다.
그리고 자기 쪽으로 향하는
총구를 보았다.
뛰어야 하는데 뛰지 못했다.
목이 잠겨 소리도 안 나왔다.
그날 이후
그는 선을 만들었다.
• 모르는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다.
• 만남을 약속하지 않는다.
• 내 이름을 주지 않는다.
• 내 사진을 주지 않는다.
• 감정을 먼저 내보이지 않는다.
• 무엇보다, 안전하다고 느끼는 순간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채팅에서도
그는 선을 만들었다.
말하지 않기.
개입하지 않기.
관찰자로 있기.
나는 바보가 아니다.
그 믿음은 단단했다.
너무 단단해서
의심할 틈조차 없었다.
일주일 동안,
눈에 익을 만큼 채팅방을 여기저기 떠돌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한 방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방엔 늘—
익숙한 아이디들이 있었다.
늘 싸우는 사람.
늘 떠드는 사람.
늘 장난치다가 사라지는 사람.
늘 슬퍼서 우는 여자.
그리고—
늘 말없는 아이디, ‘나만의 꿈’.
‘나만의 꿈’은 언제나 그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처음엔 흔한 닉네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그 아이디는 계속 있었다.
말이 없었다.
그냥 로그인 표시만
초록색으로 켜져 있었다.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나만의 꿈님 안녕하세요?”
“계세요?”
“잠수?”
“왜 말이 없냐 ㅋㅋ”
처음엔 장난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장난은 비웃음이 됐다.
“또 접속만 했네.”
“구경꾼이냐?”
“오늘도 또 무시야? 이 정도면… 개무시인데.”
“남자냐 여자냐도 못 말하냐.”
“저런 것들이 더 더러운 것들야.”
“응, 저것도 분명 존나… 눈 뜨고 못 볼 정도로 못생겼을 거야.”
“여자인데 남자 목소리가 나거나.”
“아니 씨발 졸라… 강적이다.”
또 다른 이는 코웃음치듯 말했다.
“아니, 저 아이디는 뭐냐?”
“내가 5개월 넘게 봤는데 한 번도 말하는 걸 못 봤어요.”
“계속 쳐들어오긴 하잖아.”
“근데 씨발, 말을 존나 말을 걸어도 절대 대꾸를 안 해요.”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니냐?”
“저 정도면 그냥 눈팅도 아니고 감시지.”
“뭘 보려고 맨날 처 들어와 있는 건데.”
“야후가 처박아놓은 사람 아니냐 ㅋㅋ”
“우리 채팅하는 거 모니터링하는 간첩 같네 ㅋㅋ”
채팅창엔 웃음 표시가 몇 개 더 올라왔다.
하지만 청년은 웃을 수 없었다.
화면 구석에 떠 있는 그 아이디가,
갑자기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 중엔,
자기가 무시당한다고 느꼈는지
몇 분씩 욕하다가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말 없는 ‘나만의 꿈’을 제멋대로 상상했다.
“저런 애는 분명 이럴 거다.”
“아니야, 저럴걸?”
서로가 만들어낸 얼굴을 놓고
비웃고, 떠들고,
그걸로 방을 또 한 번 더럽혔다.
말 한마디 없는 아이디 하나가
사람들 입에서 제일 시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청년은 처음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작 인터넷 채팅일 뿐인데—
왜 저렇게까지 분노하는지.
그런데도—
방의 공기는 계속 달아올랐다.
말 없는 아이디는
그 자체로 누군가의 신경을 긁는 모양이었다.
나만의 꿈.
초록불.
그리고 침묵.
누군가는 그 침묵을
무시로 받아들였고,
누군가는 그 침묵을
도발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때 바로 알았다.
여기서는 반응 없는 사람이, 결국 표적이 된다는 걸
—다음: 8장-2부에서…
그는 한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일부러 들리게 숨을 뺐다.
쓰읍— 하—
그리고 싸이월드...
[PART 2/4] 너를 품에 안으면 [8장-2부] — 변태와 나만의 꿈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 8-2)
(※ 본 편에는 온라인 집단 괴롭힘/욕설 표현이 등장합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실컷 떠들고 있을 때부터,
매번 늦게 들어오는 아주 골 때리는 놈이 항상 방을 찾았다.
원래는 사람들은 웬만해서 채팅을 키보드로 했고,
가끔 몇몇 마이크로 잠깐 이야기하고 끊는 쪽이었다.
그런데 이놈은 달라도 완전히 달랐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들어오는 순간부터—뭔가가 달랐다.
텍스트는 거의 안 쳤다.
“ㅎㅇ”도 없었다.
그냥
아이디가 뜨고
초록불이 켜지면
잠깐의 정적.
그리고
마이크가 켜지는 소리.
(탁)
한 10초 정도 아무 소리 없다가—
순간.
쓰읍— 하—
너무 가까운 숨이라
청년은 이어폰을 한 번 뺐다가 다시 끼곤 했다.
실수로 새는 숨이 아니었다.
들려주려고 내는 숨이었다.
목소리는 중년 이상으로 들렸다.
톤은 낮았고, 저질스럽다기보다는—
차라리 성우를 해도 될 만큼 차분하고 독특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그런 목소리에서 저런 저질스러운 소리가 나온다는 걸,
청년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 순간부터 서서히,
성적 모욕뿐만 아니라 남자인 청년이
들어도 못 들어줄 만큼 역겨운 말들,
능구렁이같이 낮지만 차분한 소리,
가끔 섞이는 숨소리까지—
혼자서 방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놨다.
여자들도 많았는데,
누구는 바로 나가고, 다들 조용해졌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욕했다.
“아이씨, 저 변태 또라이 새끼 또 왔네.”
“야, 나가라. 방 더럽히지 말고.”
“빨리 꺼져.”
어떤 이들은 재미있고 어이없다는
식으로 낄낄거렸다.
“아 ㅋㅋ 또 시작이네.”
“와, 변태력 미쳤다.”
“콘텐츠네 콘텐츠야... ㅋㅋ”
청년도 더는 그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나왔다.
그러다 며칠 뒤,
여전히 방 분위기는 같았고,
자주 보이는 같은 아이디들,
그리고 나만의 꿈.
한 번은 청년도 나만의 꿈이 궁금해져서
1:1 요청을 해볼까 생각했다가
그냥 관뒀다.
얼마 안 돼서 또 그놈이 들어왔다.
여전히 같은 식으로 저질스럽고
역겨운 소리를 내고,
사람들은 어김없이 욕하고 떠들었다.
그러나 그는 강적이었다.
마치 이 방이 자기 손아귀에 있다는 듯,
차분한데도 누구 신경 하나 안 쓰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더럽게 지껄였다.
그리고 늘 그랬다.
그는 한바탕 휘저어 놓고는 정확히 10분 이상은 있지 않고,
바로 사라졌다.
그때 청년이 가만히 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놈은
한 아이디, 한 사람에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 사람이 듣든 안 듣든 개의치 않고
계속 저질스러운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그 한 사람이 누구인지 자세히 보니—
나만의 꿈이었다.
혹시 그 저질놈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나만의 꿈을 보면서
마치 말 한마디 대꾸도 없는
그 존재쯤은 얼마든지 꺾을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던 걸까.
또 하나 이상한 점은—
그 와중에도 나만의 꿈은
계속 로그인 상태였다는 것이다.
초록색 불은 꺼지지 않았고,
끝까지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 초록불이 이상하게—
방 전체를 더 조용하게 만들었다.
곧바로 변태의 온갖 더러운 성적으로 공격을
나만의 꿈을 향해 노골적으로 천천히
능글스럽게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는 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을 끌었다.
상대가 불쾌해하고 숨이 막히는 그 순간을,
자기 손끝으로 만지는 것처럼 즐기는 변태였다.
그 변태는 또다시
마이크에 숨소리를 들이붓듯 가까이 대고,
일부러 길고 축축한 한숨을 내뱉었다.
“쓰으읍… 하—”
숨이 아니라 침이 섞인 기름 같았다.
끈적하고 더럽고, 사람 피부에 달라붙는 소리.
그는 그 숨소리를 문장 앞에 붙였다.
마치 시작 신호처럼.
그리고 곧바로—
능숙하게, 낮고 저질적인 톤으로,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발음은 이상할 정도로 정확하고 깨끗했다.
혀가 꼬이지도, 단어가 흐려지지도 않았다.
마치 이런 순간을 위해 연습을 했거나,
누군가에게 교육받은 사람처럼.
그래서 더 끔찍했다.
흥분해서 실수하는 놈이 아니라,
통제하고 있는 놈이었다.
그 변태의 숨소리와 말끝이 떨어질 때마다,
방 안의 공기가 한 겹씩 더 썩어 가는 느낌이었다.
그 변태가 내뱉는 말보다 더 더러운 건,
놈이 일부러 끌고 늘이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곧
‘지금 너는 내 손안에 있다’는 듯한 압박이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의 욕이 터졌다.
남자 목소리도, 여자 목소리도 섞여서
난장판처럼 쏟아졌다.
“아이— 씨발! 그만해!”
“존나 더럽다, 이 미친 변태새끼야!”
“개 미친놈, 개 또라이 새끼야!”
“병신 같은 새끼— 지금 뭐 하냐?”
“진짜 역겨워. 꺼져, 씨발놈아!”
“방장 뭐 하냐고! 관리 안 해?!”
누군가는 마이크를 빼앗아 보려고 했다.
하지만 한 번 누가 잡은 마이크는—쉽게 안 뺏겼다.
지지직—
“마이크 내려! 내려 씨발—!”
툭 하고 끊겼다.
치익—
“야 너 신고— 신고한다 이 개새끼야—!”
또 반 토막만 남기고 끊겼다.
중간중간 사람들 마이크 소리가 짧게 들렸다 끊겼다.
욕이든 비명이든 다 반쯤 잘린 채 공기 중에 떠다녔다.
그런데도 그 변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고
꼭 둘이만 있으면서 대화하는 것처럼
차분하면서 더럽고 지저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난 네가 뭘 싫어하는지 알아.”
그는 단어를 흘리지 않았다.
자음과 모음을 또박또박 끊어,
발음만큼은 이상하리만치 바른 소리로 뱉었다.
그런데 문장 끝은 꼭—
혀끝으로 천천히 굴리듯 길게 늘어졌다.
차분했고, 느긋했고,
그 느긋함이 오히려 느끼하게 달라붙었다.
짧게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뱉었다.
숨은 짧은데, 말은 길었다.
속도를 일부러 늦추는 사람의—연습된 여유였다.
“근데… 네가 더 싫어하는 건, 네가 지금도 그걸 못 끊고 있다는 거잖아.”
문장 구조는 또렷한데, 소리는 미끌미끌했다.
“못 끊고”에서 음을 살짝 눌러 못 끈—고처럼 길게 끌고,
“있다는”은 아주 조금 낮춰 있—다—는 식으로 내려앉혔다.
마지막 “잖아”는 거의 속삭이듯, 잖아… 하고 끝을 늘려—
더 노골적이고 역겹게 들렸다.
그 말이 위로가 아니라 비웃음으로 남게 만들었다.
그 정확한 발음이 더 역겨웠다.
실수로 튀어나온 말이 아니라,
상대가 무너질 지점을 계산해서 눌러 찍는 소리였다.
차분한 톤은 친절이 아니라 목줄 같았다.
조용히, 천천히—끊을 용기까지 같이 조여 오는
그 변태는 한 박자 쉬고, 다시 숨을 넣었다.
“쓰으읍… 하—”
그 숨이 들리는 순간,
누구의 욕도, 누구의 외침도 잠깐 먼 데로 밀려났다.
마치 그 소리 하나가
“지금 이 방은 내 거야”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그는 그제야, 아주 느리게—마치 확인하듯 말했다.
“하— 난 네가 뭘 좋아하는 걸 알아.
넌 그 걸 다시 나로부터 기억나게 해 주길 원하잖아”
이때 누군가가 툭, 캡처를 던지듯 말했다.
“야, 저 목소리… 그놈 아니냐?”
“그때 야후에서 악명으로 돌던 거. 이름이… 오동추.”
청년은 혼자 피식 웃었다.
"오동추? ㅋㅋ
아이디 한 번 기갈나게 골랐네 ㅋㅋ"
근데 진짜 이상한 건
이름이 아니라—
왜 하필 나만의 꿈을 향해 그러는지였다.
방에는 여자 닉네임도 많았다.
반응을 잘하는 사람도 있었고, 욕도 잘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 보통은 그런 쪽을 건드리기 마련인데—
그놈은 이상하게도
딱 한 명만 집요했다.
나만의 꿈.
그 아이디가 온라인이면
그놈은 꼭 나타났다.
그리고 꼭, 그 아이디만 “부르는” 말을 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낮은 톤으로 속삭였다.
“거기 있지.”
“말 안 해도 다 알아.”
“도망가도 소용없어.”
“그때처럼 또 숨네.”
다른 사람들은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인터넷이니까, 그냥 센 척이니까.
어차피 마이크 끄면 끝나는 일이라고.
하지만 청년은
그 톤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누군가를 안다는 톤.
찾고 있다는 톤.
이미 안쪽까지 들어와 있다는 톤.
그런데도 나만의 꿈은 여전히 반응하지 않았다.
초록불은 켜져 있는데
말이 없었다.
청년은 처음엔 생각했다.
자리 비운 거겠지.
켜 놓고 나갔겠지.
가끔은 그런 사람도 있으니까.
그런데 그 패턴이
너무 오래 반복됐다.
초록불이 켜지고,
그놈이 나타나고,
말이 쏟아지고,
방이 욕으로 끓고—
그리고 끝까지
나만의 꿈은 아무 말이 없었다.
며칠이 지나도,
몇 주가 지나도.
그쯤 되자 청년은
불편함을 넘어
묘하게—찝집해졌다.
정말 듣고 있는 걸까?
듣고 있는데도 못 움직이는 걸까?
뉴욕에서 몸이 굳어버리던 순간이 떠올랐다.
주변 소리는 다 들리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던 그 순간.
움직이지 못하는 침묵.
선택이 아닌 침묵.
나만의 꿈도…
그런 침묵일까?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청년의 선이 얇아졌다.
그전까진
그냥 구경이었다.
그냥 온라인의 미친놈 하나였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이건 “방” 문제가 아니라
사람 문제처럼 느껴졌다.
관찰이
공감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하게도—
그놈은 늘 그랬다.
딱,
10분.
한바탕 휘젓고
정확히 10분을 넘기지 않고
사라졌다.
마치
시간을 재고 온 사람처럼.
그날 밤도
초록불은 켜져 있었다.
나만의 꿈.
청년은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가
마우스를 움직였다.
커서가
아이디 위에 멈췄다.
클릭.
작은 메뉴창이 떴다.
귓속에서는 아직도
그놈의 숨소리가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쓰읍— 하—
청년은 스스로도 이유를 몰랐다.
그냥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 자리를 비운 건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건지.
아니면—
정말로,
듣고 있는데도 못 움직이는 건지.
메뉴 맨 아래에
익숙한 버튼이 보였다.
1:1 요청.
커서는 그 위로 내려갔다.
딱 거기서,
손이 멈췄다.
마우스 왼쪽 버튼에 얹힌 검지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괜히…
선을 넘는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침묵’에
내가 먼저 손을 뻗으면
그건 도와주는 게 아니라
침입이 될 수도 있었다.
청년은 숨을 한 번 삼켰다.
목 뒤가 서늘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놈의 말이 떠올랐다.
“거기 있지.”
“말 안 해도 다 알아.”
청년은 욕을 뱉듯 혼잣말했다.
“… 미친.”
커서를 살짝 옮기려는 순간—
방 목록이 한 번 깜빡였다.
누가 들어왔다.
늘 그랬던 것처럼,
늦게.
아무 말 없이.
정적.
(탁)
마이크가 켜지는 소리.
그리고—
정확히 10초 후
쓰읍— 하—
청년은 반사적으로
손을 키보드에서 뗐다.
마치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커서는 아직도
1:1 요청 위에 있었다.
그게
그날 밤,
가장 불길한 우연이 될지도 모른 채—
청년은 일어났다.
냉장고로 향해 맥주를 꺼냈다.
다시 책상 앞에 앉자,
커서는 그대로였다.
1:1 요청 위.
청년은 맥주 캔을 땄다.
딱— 치익.
한 모금, 크게 들이쉬었다.
목구멍이 따끔하게 타고 내려갔다.
그리고 한숨.
크게 들이쉬고,
길게—내뱉었다.
“하…”
청년은 화면을 뚫어지게 보다가,
마치 도망칠 길을 스스로 끊는 사람처럼
손가락을 천천히 올렸다.
바로 그다음,
1:1 요청 버튼을 눌렀다.
딸깍—
보냈다.
청년은 잠깐 멈춰 앉아 혼자 생각했다.
다음은?
설마 연락이 올까?
혹시라도 오면 뭐라고 말할까…
나만의 꿈에게서 빠른 반응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기다리지 않겠다고 마음먹을수록, 더 기다리게 됐다.
시간이 늘어졌다.
화면은 그대로였다.
청년은 다시 맥주를 땄다.
그리고 또 한 모금.
빈 맥주캔들은 책상 위에
하나,
둘,
한 줄씩 늘어나기만 했다.
청년은 속으로 ‘역시나’ 하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날은,
기대가 아닌 기대를 품은 채
그렇게 지나갔다.
어느 날, 청년은 채팅에서 만난 쟈니워커란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쟈니워커 또한 한국 사람이었고, 워싱턴주에 사는 친구였다.
쟈니는 야후 채팅에 꽤 오래 있었고,
채팅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잘 알았다.
어떤 종류의 사람과는 어느 선에서 대화를 끊어야 하는지,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상대하면 안 되는지—
그런 걸 몸으로 아는 친구였다.
그날도 쟈니는 들떠 있었다.
며칠 전, 드디어 신형 Corvette(자막: 콜벳)
를 샀다며
사진이니 옵션이니 하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엔진 소리 얘기까지 꺼내며, 마치 직접
들려주기라도 할 듯 신이 나 있었다.
그 또한 나만의 꿈을 알고 있었다.
한 번쯤 대화 신청을 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말끝이 이상하게 짧아졌다.
“어… 그 나만의 꿈…
나도 한 번 눌러 봤는데, 아무것도 안 오더라.”
청년은 그 한마디가
괜히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쟈니는 곧 목소리 톤이 바뀌었다.
말끝이 살짝 올라갔고, 웃음이 섞였다.
자랑할 게 하나 더 있다는—그런 톤이었다.
쟈니는 채팅으로 만난 한국 여자와 사귀고 있다고 했다.
그녀도 청년과 같이 살고 있는
텍사스에 좀 외각 쪽 떨어진 곳에 산다고 하면서,
은근히 자랑을 섞어 말했다.
그 둘은 그냥 “채팅으로만”이 아니었다.
이미 몇 번 실제로 만나서 서로 왕래하고 있었다.
주말마다 시간을 맞춰 보고,
서로 사는 곳까지 오가며
얼굴을 익힌 사이라고 했다.
쟈니는 “여자 친구 소개해줄게”라며
따로 만든 방에 청년을 초대했다.
그녀의 이름은 **아일리아(윤)**이었다.
목소리는 예쁘고 곱게 들렸다.
청년은 그 순간,
말로만 듣던 온라인 채팅이
진짜로 데이트가 되고—
어떤 이들은 결혼까지 간다는 게
가능하다는 걸, 처음 실감했다.
그때였다.
화면 아래, 메시지 창이 떴다.
청년의 눈이 아주 조금 커졌다.
시선이, 반사적으로 그 창에 꽂혔다.
나만의 꿈이었다.
며칠 전, 청년은 맥주를 들이켜고
한숨을 길게 내뱉은 뒤
1:1 요청 버튼을 눌렀다.
딸깍— 보냈다.
기대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화면을 더 자주 보게 됐다.
빈 맥주캔은 책상 위에 한 줄씩 늘어났고,
그날은 ‘역시나’라는 말로
스스로를 달래며 지나갔다.
그리고 오늘.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는데,
화면 아래가 아주 작게 흔들렸다.
타이핑 표시가 떴다가 사라졌다.
다시 떴다가, 또 사라졌다.
몇 초가 아니라—
누군가 문장 하나를 고르느라
숨을 고르는 시간처럼 길었다.
마침내 짧은 한 줄이 떴다.
길게 설명하지도,
반갑다고도 하지도 않는
필요한 말만 남기고 언제든 잠수할
수 있게, 출구를 만들어 둔 문장이었다.
“스팅비님… 지금 계세요?”
청년은 잠깐 멈췄다.
말이 없던 사람이
처음으로 “나”를 찍어 부르는 느낌.
대화요청.
승낙.
처음엔 정말 간단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타이핑 표시가 떴다가 사라졌다.
다시 떴다가, 또 사라졌다.
마침내 한 줄이 떴다.
몇 초 뒤.
“저…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청년은 화면을 더 가까이 봤다.
“네. 말씀하세요.”
타이핑이 길어졌다가, 짧게 끊겼다.
마치 문장을 여러 번 고르는 사람처럼.
“당분간… 우리 1:1 하는 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 줄래요?”
“아무 한 테도요?”
“네.”
“쟈니워커 포함해서요.”
청년은 순간 멈칫했다.
쟈니 이름이 여기서 나올 줄은 몰랐다.
“왜요?”
그녀가 바로 답하지 않았다.
타이핑 표시만 깜빡였다.
“그냥…”
“지금은, 그게 편해요.”
청년은 이유를 더 캐묻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가,
그 마음을 삼켰다.
“알겠어요. 말 안 할게요.”
답장이 오기까지 한 박자.
그리고 짧게.
“고마워요.”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무게가 있었다.
고맙다는 말이 아니라, 허락을 받은 느낌.
청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네.”
청년은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 쳤다.
“공개방에서… 어떤 변태... 그 인간이
나만의 꿈님 자꾸 따라다니면서
성적으로 노골적으로 괴롭히잖아요. 괜찮아요?”
타이핑 표시가 잠깐 떴다가, 바로 꺼졌다.
그리고 너무 빨리 답이 왔다.
“괜찮아요.”
짧아서 더 이상했다.
“그런 종류의 인간들… 전혀 신경 안 써요.”
청년은 그 문장이 더 불안했다.
신경 안 쓴다는 말이 ‘괜찮다’는 뜻은 아니니까.
“근데 왜… 신경 안 써요?”
이번엔 답이 늦었다.
타이핑 표시가 길게 깜빡였다.
한참 만에.
“신경 쓰면…”
“그 사람들이 이긴 거잖아요.”
청년은 그 말이 단단해서, 더 조심해졌다.
그는 다시 물었다.
이번엔 조금 더 직접적으로.
“근데… 솔직히 궁금한 게 있어요.”
“왜 그렇게 오랫동안 채팅방에 있으면서
사람들한테 아무 반응도 안 했어요?”
그 질문을 보내고 나서, 청년은 약간 후회했다.
너무 빨랐나 싶어서.
타이핑 표시가 떴다.
지워졌다.
또 떴다.
또 지워졌다.
그리고 한 줄.
나만의 꿈이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잠깐 뒤, 문장이 이어졌다.
“그건 나중에요.”
“때가 되면… 차근차근 말해 줄게요.”
딱 거기서 멈췄다.
더 묻지 말라는 선이 분명했다.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듯, 짧게 답했다.
“알겠어요.”
근데 청년은 결국—가장 궁금한 걸 참지 못했다.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그럼… 이것도 물어봐도 돼요?”
“네.”
청년은 숨을 한 번 고르고 쳤다.
“저 말고도
1:1 요청 많이 받았을 거잖아요.”
“근데 왜… 저한테 답장을 줬어요?”
이번엔 타이핑이 오래 걸렸다.
마치 단어 하나하나를 고르느라,
말을 입 밖으로 내기 전처럼.
“많이 망설였어요.”
그녀가 먼저 그렇게 썼다.
그리고 다음 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기 얘기를 크게 만들어요.”
“알아달라거나,
확인해달라거나,
뭘 요구하거나.”
청년은 화면을 보고만 있었다.
그녀가 멈추지 않고 이어갔다.
“근데 스팅비님은…”
“말이 없는데도, 늘 있었어요.”
“묻지도 않고,
끌어당기지도 않고,”
“그냥… 옆에 있는 사람처럼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청년은 가슴 한쪽이 묘하게 꺼졌다.
기분이 좋아서가 아니라—
들킨 것처럼.
그녀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래서 더 궁금했어요.”
“좋은 사람 같기도 했고…”
“제가 답해도,
뭔가를 요구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
청년은 한참을 바라보다가, 짧게 쳤다.
“저… 요구 안 해요.”
“그냥… 대화하면 돼요.”
잠깐 뒤.
“그럼…”
“우리, 천천히 해요.”
그 말이 인사처럼 느껴졌다.
처음으로 ‘문이 조금 열리는’ 소리 같았다.
[PART 3/4] 너를 품에 안으면 [8장-3부] — 싸이월드 와 노래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 8-3)
“그럼…”
“우리, 천천히 해요.”
그 말이 인사처럼 느껴졌다.
처음으로 ‘문이 조금 열리는’ 소리.
그다음도 조심스러웠다.
사는 곳, 나이, 이름 같은 건 피해 갔다.
그냥 밤이 길다는 얘기, 일 때문에 피곤하다는 얘기.
그런데 그게 며칠 반복되자
청년은 자기도 모르게
으쓱해졌다.
방에 사람은 많은데
그녀는 남들이랑은 대화 안 하고
나랑만 1:1로 한다.
그 사실이
청년을 ‘특별한 쪽’으로 밀었다.
나만의 꿈과 매일 더 가까워지는 것에
청년은 괜히 뿌듯해하고 있었다.
자기로 인해 얼음처럼 차갑게 얼어 있던 나만의 꿈의 마음이
조금씩 움직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보는 사이는 아니었어도
서로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청년이 먼저 물었다.
“지금 뭐 해요?”
“아이스커피 마시고 있어요.”
마이크 너머로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컵 안에서 얼음이 부딪히며 딸깍하고 흔들리는 소리.
빨대가 한 번 긁히는 소리.
그녀가 작게 말했다.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 들리죠?”
“네. 들려요.”
별것도 아닌데, 그 소리 하나로
청년은 순간 착각했다.
상대가 정말 옆방에 있는 것처럼.
잔은 안 부딪히는데
소리만 부딪혔다.
그 뒤로 둘은 자주 그런 걸 공유했다.
지금 켜 둔 조명, 창문을 조금 열어 둔 정도,
밖에서 지나가는 차 소리,
그리고 말 끝에 묻어나는 피곤함까지.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그녀가 처음으로 자기 쪽을 한 조각 내줬다.
“스팅비님… 싸이월드… 알아요?”
청년은 멈칫했다.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누가 한 번 웃으며 말했던,
‘요즘에 그런 게 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청년은 그쪽을 따로 신경 쓴 적이 없었다.
“아… 이름만 들어봤어요. 정확히는 몰라요.”
그녀는 잠깐 웃었다.
아주 짧게—숨으로만.
“그럼… 더 설명해 줘야겠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얼마 전부터 만들어 놓은 미니홈피가 있어요.”
“들어가 보면… 좀 이상할 거예요.
요즘 내가 거기 살고 있는 것 같아서요.”
잠깐의 침묵.
그녀는 다음 말을 고르듯 숨을 골랐다.
“아이디… 알려드려도 돼요?”
그 한마디가
친해졌다는 증거처럼 들렸다.
동시에—선을 하나 넘는 소리처럼도 들렸다.
채팅은 만질 수 없는데,
링크 하나는 현실 쪽으로 손을 뻗는 것처럼 느껴졌다.
청년은 그걸 알고도
“네”라고 말해 버릴 것 같았다.
그녀가 먼저 말했다.
“스팅비님… 지금 링크 보냈어요. 눌러봐요.”
“가입은 금방 돼요. 어렵지 않아요.”
청년은 모니터를 한 번 더 가까이 당겼다.
클릭.
로딩.
낯선 화면이 열렸다.
아이디를 만들고, 비밀번호를 만들고,
동의 체크박스를 몇 번 누르는 사이—
청년은 자기 손이 생각보다 빨라졌다는 걸 느꼈다.
그녀가 다시 말을 꺼냈다.
“스팅비님, 아까 말했던 거… 있죠.”
“우리 1:1 하는 거—당분간 비밀로 해요.”
“스팅비님 친구 쟈니워커에게도 요.”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듯 키보드를 눌렀다.
“알겠어요. 말 안 할게요.”
잠깐의 침묵 뒤, 그녀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싸이월드도.”
“겉은 보여도, 안쪽은 안 보이게 해 놨어요.”
청년은 화면을 다시 봤다.
미니룸이랑 배경 음악은 보이는데,
어떤 메뉴는 잠긴 것처럼 막혀 있었다.
딱 봐도 “선”이 있는 느낌이었다.
청년이 물었다.
“이건… 제가 못 보는 거예요?”
“응. 공개 범위를 걸어놨어요.”
그녀는 화면을 보는 듯 천천히 덧붙였다.
“전체 공개도 되고, 일촌 공개도 되고, 비공개도 돼요.”
“나는… 일촌만 보이게 해 둔 게 많아요.”
“그러니까… 들어오려면 일촌 신청을 해야 해요.”
청년의 손가락이 잠깐 멈췄다.
일촌.
그게 단순한 버튼 하나가 아니라는 걸
이상하게도 바로 알 것 같았다.
“지금… 신청하면 돼요?”
“응. 근데 부담되면 안 해도 돼요.”
그 말이 더 부담이었다.
청년은 결국 눌렀다.
일촌 신청.
딸깍.
그 순간, 나만의 꿈이 곧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타이핑 표시가 떴다가 사라졌다.
마치—
‘지금 받아도 되나’를 한 번 더 확인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몇 초 뒤.
“됐어요.”
짧은 말.
그 말과 동시에, 청년 화면에서
잠겨 있던 게 아주 조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낮게 웃었다.
“일촌 되면… 일촌명도 정하잖아요.”
“스팅비님, 뭐로 할래요?”
청년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이름보다 더 가까운 이름을 정하라는 말 같아서였다.
그녀가 또 한 번, 아주 짧게 웃었다.
“그건… 제가 정해 주고 싶은데요.”
“그럼… ‘스팅비님’ 계속할래요?”
“그냥 그게 편하니까요.”
청년은 그 한마디에
기분이 좋아지는 걸 숨기지 못했다.
그녀가 다시 물었다.
“일촌평도 남길래요?”
“딱 한 줄만.”
청년은 키보드 위에서 망설였다.
한 줄이면 가벼워야 하는데,
가볍게 쓰면 마음이 없어 보일 것 같고,
마음이 보이면 너무 진지해질 것 같았다.
결국 그는 가장 안전한 문장을 골랐다.
[일촌평]
“잘 부탁해요.”
나만의 꿈이 한참 뒤에 답했다.
마치, 그 한 줄을 그대로 믿어도 되는지 확인하듯.
그리고 그녀가 남겼다.
[일촌평]
“천천히요.”
청년은 그 한 줄을 보고
이상하게 숨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규칙을 하나 더 박았다.
“그리고 진짜.”
“공개방에서는… 우리 아는 척하지 말아요.”
청년이 물었다.
“왜요?”
그녀는 짧게 답했다.
“시끄러워져요.”
“쓸데없는 사람들이… 끼어들어서요.”
“난 그런 게 싫어요.”
청년은 바로 이해했다.
그녀가 원한 건 ‘대화’가 아니라
틈이었다.
남들이 못 들어오는 틈.
“알겠어요.”
“공개방에선 모르는 척하는 것으로 할게요.”
그녀가 아주 짧게 답했다.
“고마워요.”
그리고 그다음 문장이 이어졌다.
“스팅비님.”
“이제… 진짜로, 우리만 아는 거예요.”
“이제 들어왔죠?”
그녀의 목소리가 웃음을 머금었다.
누군가 내 어깨 너머에서 화면을 같이 보는 느낌.
이상하게—안심이 됐다.
그녀가 말했다.
“여기서 ‘미니룸’에 들어가요.”
“아… 스팅비님, 지금은 기본 세팅이니까 놀라지 말고.”
청년이 ‘입장’을 눌렀다.
화면이 바뀌면서, 작은 방이 하나 떴다.
너무 비어 있었다.
가운데엔 남자 캐릭터 하나가 덩그러니 서서,
홀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상체는 맨몸,
하체는 빤스 한 장 걸친 모습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속옷 차림의 남자 캐릭터.
표정도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방은 바닥도, 벽도, 가구도—아무것도 없었다.
청년은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이상했다.
실제로는 혼자였고, 화면 속 건 픽셀 덩어리뿐인데도—몸이 먼저 반응했다.
창피라는 건
‘진짜 내 몸을 들켰을 때’가 아니라,
누가 내 쪽을 보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에 생긴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녀가 마이크 너머에 있다는 사실.
지금 이 화면을, 같은 타이밍에 보고 있다는 사실.
그게 청년의 머릿속에선
“같은 방”으로 계산됐다.
아바타는 남의 캐릭터가 아니었다.
가입하자마자 자동으로 뜬 기본 세팅인데도,
이상하게 ‘내’ 쪽이었다.
내 이름으로 들어온 방,
내 계정으로 서 있는 몸.
그래서 더 민망했다.
옷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보인다는 느낌 때문이라고 느껴졌다.
청년은 무의식적으로
의자에 등을 더 붙이고,
모니터를 한 뼘 뒤로 밀었다.
그래봐야 소용도 없는데,
그런 동작이라도 해야 덜 드러난 기분이 들 것 같아서였을까...
그가 겨우 물었다.
“… 이게… 기본이에요?”
“응. 처음엔 다 그래요.”
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짧게 웃었다.
“괜찮아요. 내가 도와줄게요.”
“스팅비님, 여기서 옷부터 입혀야지.”
그녀가 하나하나 눌러 줬다.
메뉴 위치, 버튼, 구매 창, 적용.
마치 튜토리얼처럼 차근차근.
그때 청년은 알았다.
‘싸이월드’는 글을 쓰는 곳이 아니라
자기를 꾸미는 곳이라는 걸.
그녀가 물었다.
“도토리 있어요?”
청년은 바로 되물었다.
“도토리… 그게 뭐예요?”
“아… 진짜 처음이구나.”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하지만 더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토리는… 여기 화폐 같은 거예요.”
“옷도 사고, 방도 꾸미고, 노래도 깔고.”
청년이 막 “그럼 결제…”를 말하려는 순간,
그녀가 먼저 끊듯 말했다.
“스팅비님, 잠깐만요.”
“처음은 내가 사 줄게요.”
청년은 반사적으로 거절하려다 멈췄다.
거절하면 멋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보다 먼저—
‘받아도 되는 걸까’ 하는 기분 좋은 떨림이 올라왔다.
선택받는 느낌.
그녀가 도토리 선물 창을 눌렀다.
짧은 알림음.
청년 화면에 “선물이 도착했습니다”가 떴다.
“됐죠?”
“이제 옷 골라요. 너무 튀는 거 말고… 음, 이게 깔끔해.”
청년의 캐릭터가 옷을 입었다.
바지가 생기고, 셔츠가 생기고, 신발이 생겼다.
그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현실에서 옷을 입은 것처럼.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방도 꾸며야지.”
“아무것도 없으면… 너무 외로워 보여요.”
청년은 그 말에 걸렸다.
‘외로워 보여요—’
그건 방이 아니라, 자신 얘기 같아서.
그녀가 몇 개를 골랐다.
작은 소파, 스탠드 조명, 테이블, 액자.
정돈된 색감.
딱 “남자 방”처럼 깔끔하게 맞춰진 조합.
“이건 어떠세요?”
“좋아요.”
청년은 진짜로 좋다고 느끼기 전에
먼저 대답하고 있었다.
그녀의 방에도 청년을 초대했다.
입장하자마자, 차이가 났다.
그녀의 캐릭터는 예쁘게 차려입고 있었다.
헤어, 표정, 작은 액세서리까지.
방은 정돈되어 있었고,
무엇보다—노래가 흘렀다.
최신 유행하는 곡들.
듣기 좋은 멜로디.
방 자체가 향기처럼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청년은 그 방에 들어서는 순간
이상하게 목소리까지 조심해졌다.
그녀가 웃으며 물었다.
“어때요?”
“좋네요.”
청년은 말했다.
사실—취향이 완전히 맞진 않았다.
어떤 곡은 너무 달았고,
어떤 곡은 청년이 평소엔 건너뛰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도 청년은
노래가 바뀔 때마다
괜히 한 한마디씩 덧붙였다.
그때,
**‘모노 — 넌 언제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노래 괜찮은데요.”
“이런 느낌… 괜찮네요.”
그 말이 거짓말인 걸 스스로도 알았다.
근데 이상하게,
그 거짓말이 싫지 않았다.
그녀와 “잘 통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그 방에서만큼은.
그때부터였다.
청년은 더 자주 접속했고,
더 빨리 답했고,
더 오래 머물렀다.
채팅은 만질 수 없는데도,
직접 볼 수 없는데도,
그녀가 골라준 옷과
그녀가 틀어둔 노래와
그녀가 정리해 둔 방이—
어느새 청년에게
“관계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증거가 쌓일수록
청년은 더 쉽게 마음을 열었다.
나만의 꿈 또한
청년에게 마음을 열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스팅비님은 참 좋은 분 같아요.”
“상황만 정리되면… 꼭 한 번 만나고 싶어요.”
“사실 저, 많이 힘들었어요.
뜻하지 않게 혼자 지내게 되면서
외롭고 버티기 힘든 날이 많았고요.”
“예전에 알던 사람들은
언제 봤냐는 듯 하나둘씩 떠났어요.”
“근데 스팅비님은—
제가 제일 외롭고 힘들 때
응원해 주고, 따뜻하게 옆에 있어 줬잖아요.”
“그게… 정말 고마워요.”
청년은 잠깐 말을 잃었다.
가볍게 흘려야 할 말이 아니었다.
그녀가 지금, 단순한 감사가 아니라
자기 쪽으로 마음을 내놓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큰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큰 말은 대체로
나중에 책임이 되는 게 은근히 두려워졌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확실한 문장으로 답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내가 뭘 대단히 한 건 아닌데,
그래도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힘든 날엔…
혼자서 다 버티려고 하지 말고,
말해줘요.”
“나도—
상황이 정리되면 나만의 꿈님 꼭 만나고 싶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조금 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진짜로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계속 옆에 있을게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금 말들이 서로의 마음속에서
자리를 잡는 시간 같았다.
청년은 그 틈을 타
괜히 숨을 한 번 골랐다.
지금이면 물어도 될 것 같았다.
지금이 아니라면
다시는 못 물을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최대한 가볍게,
근데 가볍지 않게
말을 꺼냈다.
“저… 근데.”
“혹시—”
입안에서 단어가 한 번 굴렀다.
괜히 조심스러웠다.
그런 걸 묻는 순간,
대화가 다른 종류로 바뀐다는 걸 느껴서였을까...
청년은 결국
조금 낮춘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사진으로라도…
나만의 꿈님, 볼 수 있을까요?”
“보고 싶네요.”
나만의 꿈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타이핑 표시도, 숨소리도 없었다.
청년은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자기 말이 무례였나 싶어졌다.
그가 급히 덧붙였다.
“아… 부담되면 괜찮아요.”
“그냥… 궁금해서요.”
그제야
마이크 너머로 아주 작은 웃음이 섞였다.
진짜 웃음인지,
웃는 척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정도로.
그녀가 말했다.
“그것도… 상황이 잘 정리되고 나면요.”
그리고 한 박자 뒤,
장난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놀라지 마세요.”
“남들이 저, 어렸을 때부터
한 인물 하겠다고 칭찬할 정도예요.”
“오늘은… 이렇게만 알고 계세요.”
말끝에 웃음이 살짝 붙었다.
농담이 섞인 톤.
근데 이상하게
청년은 그게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조건이 있다.’
보여주겠다는 말보다,
먼저 나온 건 ‘나중에’였다.
그 ‘나중에’가
청년을 더 묶었다.
청년은 웃는 척 숨을 한 번 섞었다.
“알겠어요.”
“기다릴게요.”
그 말이 끝나자
그녀가 아주 짧게 답했다.
“응.”
짧은 한 글자.
근데 그날 밤,
청년은 그 한 글자를
괜히 여러 번 떠올렸다.
사진 얘기가 지나고,
둘 사이의 분위기가 조금 더 올라왔을 때였다.
그날도 둘은 각자
맥주 한 캔씩을 따고 있었다.
칙—
가상 공간인데 현실 소리만큼은 똑같이 찍혔다.
그 소리 하나로
밤이 더 진짜처럼 굳어졌다.
그녀가 먼저 말했다.
“건배.”
“건배.”
그리고 나만의 꿈이 웃으며 말했다.
“사진 말고… 오늘은 노래 들려줄게요.”
“마이크 켤게요.”
(탁)
마이크가 켜지자,
먼저 음악이 들렸다.
잔잔한 발라드 같은 걸 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뒤에서 신나고 상쾌한 반주가
훅 들어왔다.
리듬이 신나게 튀고,
첫 전주부터 공기가 바뀌었다.
그런데도 소리는 ‘깨끗’하지 않았다.
파일처럼 또렷한 음원이 아니라,
그녀 쪽 방에서 실제로 흘러나오는 음악이
마이크를 타고 넘어오는 느낌.
작게 울리는 잔향,
스피커가 살짝 떨리는 소리,
그리고 그 위로 섞이는—
아주 얇은 숨.
청년은 그걸 듣는 순간
등이 곧게 펴졌다.
캔을 쥔 손이
그대로 멈췄다.
방 안에 혼자인데도
괜히 자세가 반듯해졌다.
초록불도, 채팅창도
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
화면은 그냥 배경이 됐고,
귀 안에는
오직 그 음악만 남았다.
그리고
그 반주 위에 그녀의 목소리가 얹혔다.
“파파야… 〈사랑 만들기〉.”
그녀는 노래를 시작했다.
첫 소절부터, 예상이 깨졌다.
신나고 밝은 리듬인데
목소리는 장난스럽지 않았다.
웃음이 섞인 “흘림”도 없었다.
음이 정확했다.
호흡이 길었다.
박자를 놓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청년은 무의식적으로
모니터를 한 뼘 더 당겼다.
귀를 가까이 가져가듯.
가수가 부르는 것처럼—
아니, 진짜 가수가
바로 뒤에서 부르는 것처럼 들렸다.
온라인에서만 존재하던 사람이
목소리 하나로
갑자기 현실의 공기를 만들었다.
좋아서가 아니라,
놀라서.
청년은
자기 입이 살짝 벌어진 것도 몰랐다.
노래가 흐르다가
그 구절이 나왔다.
✨♪ 영화 속의 그녀처럼~
나~ 하나~ 네가 가진 걸로 행복할 거야~♪✨
그 한 줄이 떨어지는 순간,
청년의 가슴이 툭 내려앉았다.
원래는 그냥 가사인데,
그날은 달랐다.
그녀가 누구에게든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지금—
나한테 들려주는 말처럼 들렸다.
청년은 숨을 죽였다.
혹시라도
자기 숨소리가 섞여
그 순간을 망칠까 봐 조심스러워졌다.
노래가 끝으로 갈수록
그녀의 목소리는 더 단단해졌다.
마지막 음을 길게 잡고,
조금만 더—
기분 좋게 끌었다.
노래가 끝난 뒤의 조용함처럼
그 정적이 방 안에 남았다.
청년은 한 박자 늦게
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숨을 참고 있었다는 것도
그제야 알았다.
그의 입에서 탄식이 흘렀다.
“와…”
웃음이 아니라
탄식에 가까운 소리였다.
청년은 그 순간
완전히 반해 버렸다는 걸
스스로도 부정할 수 없었다.
예뻐서가 아니었다.
착해서도 아니었다.
‘나만 알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내가 감당 못할 만큼 큰 사람’으로 보이는 순간이 있었다.
방금 딱 그랬다.
청년은 바로 질세라 말했다.
“저도… 하나 불러도 돼요?”
나만의 꿈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그러세요”
청년은 잠깐 망설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제목을 꺼냈다.
“‘너를 품에 안으면’…”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노래 제목인데도
고백처럼 들려서.
그녀가 짧게 말했다.
“응. 불러봐요.”
그 한마디가
청년을 완전히 밀었다.
청년은 있는 감정 없는 감정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잘 부르려는 게 아니었다.
지금 이 밤을,
지금 이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진심으로
목소리를 꺼냈다.
✨♪“너를~
품에~ 안으면~”♪✨
음은 흔들렸고
호흡도 완벽하진 않았다.
근데 청년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처럼
끝까지 가고 싶었다.
그녀가 만든 그 “진짜”에
자기도 닿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그녀와 같은 높이로 올라가고 싶었다.
노래가 끝나자
잠깐 정적이 왔다.
...
청년은 숨을 죽였다.
이번엔
평가가 무서웠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 노래.”
한 박자 뒤,
아주 작게 덧붙였다.
“좋네요. 쉬운 노래가 아닌데 잘하네요.”
그 한마디에
청년은 확신 비슷한 걸 느꼈다.
봐.
괜찮아지고 있잖아.
그날 밤,
사진은 없었는데도
청년은 이상하게
더 가까워졌다고 믿었다.
노래가 끝났는데도
청년은 한동안 말을 못 했다.
좋아서가 아니라—
자기 마음이 너무 빨리 앞질러 가는 게
무서워서였다.
근데 무서운 건 늘
늦게 온다.
그 밤, 청년은
컴퓨터를 꺼도
귀에서 음악이 꺼지지 않았다.
파파야의 전주.
그녀의 목소리의 마지막 잔향.
그리고 “좋네요”라는 짧은 한마디.
그게 계속
머릿속에서 반복됐다.
청년은 자꾸 생각했다.
‘사진은 안 보여줬는데…
왜 더 가까워진 것 같지?’
그래서 더 접속했다.
더 빨리 들어갔고,
더 오래 머물렀다.
초록불 하나가
그 사람의 ‘존재’처럼 느껴졌고,
그 사람의 부재는
바로 현실의 추위처럼 느껴졌다.
그때부터였다.
청년은
대화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등장”을 기다리는 사람이 됐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
습관처럼 굳어지고 있었다.
[PART 4/4] 너를 품에 안으면 [8장-4부] — 기다림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 8-4)
노래가 끝났는데도
청년은 한동안 말을 못 했다.
좋아서가 아니라—
자기 마음이 너무 빨리 앞질러 가는 게
무서워서였다.
근데 무서운 건 늘
늦게 온다.
그 밤, 청년은
컴퓨터를 꺼도
귀에서 음악이 꺼지지 않았다.
파파야의 전주.
그녀의 목소리의 마지막 잔향.
그리고 “좋네요”라는 짧은 한마디.
그게 계속
머릿속에서 반복됐다.
청년은 자꾸 생각했다.
사진은 없었는데…
왜 더 가까워진 것 같지?
그래서 더 접속했다.
더 빨리 들어갔고,
더 오래 머물렀다.
초록불 하나가
그 사람의 ‘존재’처럼 느껴졌고,
그 사람의 부재는
바로 현실의 추위처럼 느껴졌다.
그때부터였다.
청년은
대화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등장”을 기다리는 사람이 됐다.
처음 서로 노래를 불러준 뒤로,
둘은 자주 서로 노래를 들려주었다.
몇 번 더 술이 들어가고,
싸이월드 미니홈피 BGM이 바뀌면 분위기도 같이 바뀌었다.
그때마다 둘은 노래를 틀어주거나,
짧게 흥얼거리며 서로에게 불러 주었다.
그러다 며칠 뒤, 나만의 꿈이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했다.
“언젠가 제가 좀 이상하게 보일 수 있는 일이 생겨도요…
지금은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그때 오해는 하지 말아 주세요.”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나만의 꿈이
조용해졌다.
메시지.
무응답.
초록불은 켜져 있는데
대화창은 조용했다.
그다음 날.
알림음이 울렸다.
그리고 화면에 뜬 말.
“마이크 가능해요?”
청년의 손가락이 순간 굳었다.
문자는 기록이 남는다.
마이크는—
기록이 안 남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그런데도
청년은 승낙했다.
(탁)
마이크가 켜졌다.
“괜찮아요?”
청년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나만의 꿈님이 부탁하신 대로
오해 안 할게요.”
“괜찮으시면… 말씀해 줘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처음 몇 마디 주고받는 사이
공기가 묘하게 눅눅해졌다.
문장 끝이 자꾸 내려앉았다.
그리고—
작은 훌쩍임.
나만의 꿈이
서서히 흐느끼고 있었다.
청년은 멍해졌다.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녀가 말했다.
“저… 사실
1년 전에 파혼당했어요.”
청년은 숨을 삼켰다.
그녀는 이어 말했다.
말이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냥… 집에 있으면
숨이 막혀서…”
“인터넷에 접속했던 거였어요.”
청년은 더 말을 잇고 싶었다.
괜찮다고, 지나간다고, 다 잘될 거라고—
그런 문장들이 목까지 올라왔다.
근데 이상하게
그 말들이 다 가벼워 보였다.
지금 이 울음 앞에선
어떤 위로도 쉽게 ‘거짓말’처럼 들릴 것 같았다.
청년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머릿속은 바쁘게 돌았는데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하나도 믿음직하지 않았다.
‘내가 뭘 안다고…’
괜히 큰 약속을 했다가
나중에 책임질 수도 없고,
괜히 감정을 더 건드렸다가
그녀가 더 무너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청년은
위로 대신
조심스러운 문장만 골랐다.
“힘들었겠네요.”
말이 너무 얇아서
본인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한 문장만 더 붙였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한참 동안
마이크를 켠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도망처럼 느껴질까 봐
청년은 더 숨을 죽였다.
대신
그녀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만이라도 하려고 했다.
그게 그날
청년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다음 날.
나만의 꿈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밝았다.
“오늘은 좀 괜찮아요.”
청년은 또 착각했다.
어제 내 말이 도움이 됐나?
그 착각이
기분 좋았다.
청년은 위로의 모양을
더했다.
도토리를 보냈다.
한 번 더.
조금 더.
‘힘내’ 같은 말은 입에 걸려서 못 하면서
버튼으로 대신했다.
그때는 그게
정성이라고 믿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만의 꿈이 또 이상한 말을 던졌다.
“스팅비님, 전 약속대로
꼭 만나고 싶어요.”
“근데 혹시라도…
제가 어느 날 말 못 할 상황이 오더라도
믿고 기다려 주세요.”
“나중에… 꼭 설명해 줄게요.”
그러던 이…
그녀는 갑자기 다시
잠수 모드로 들어갔다.
메시지.
무응답.
초록불은 켜져 있는데
대화창은 조용했다.
청년은
하루 종일 마음이 걸렸다.
그게 웃겼다.
초록불 하나 때문에
현실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그날 밤
청년은 창을 닫고
인터넷을 끊고
컴퓨터를 껐다.
형광등만 남은 방에서
고요가 잠깐 시원했다.
근데 그 고요는
금방 텅 빈 느낌이 됐다.
하루도 못 가서
청년은 다시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다음 날.
그녀가 나타났다.
메시지가 왔다.
“저예요...?”
청년의 손가락이 순간 굳었다.
문자는 기록이 남는다.
마이크는—
기록이 안 남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그런데도
청년은 승낙했다.
(탁)
마이크가 켜졌다.
정적.
그리고—
(탁)
마이크 쪽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숨이 한 번 흔들리더니,
이내 훅—하고 무너졌다.
그녀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너무 서글프게.
청년은 순간,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뭘 눌러야 하는지,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머릿속이 텅 비었다.
“나만의 꿈님… 괜찮으세요?”
“왜 그러세요?”
대답은 울음 사이로 끊겨 나왔다.
“죄송해요…”
“제가… 스팅비님께 이런 모습 보여서…”
청년은 더 조심스러워졌다.
이 울음이 “파혼” 때문인지,
말 못 한 다른 사정 때문인지
분명히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캐묻는 게 아니란 걸 알았다.
그녀는 울면서, 이상한 말을 했다.
“스팅비님은 참 좋으신 분 같으니…”
“꼭 좋은 여자 만나실 거예요.”
청년은 멍해졌다.
엥?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 말이 위로가 아니라
정리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청년은 급하게 말했다.
자기가 지금 뭘 붙잡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저… 다른 여자 필요 없어요.”
“우리… 예전에.”
“만나서 좋은 시간 보내자고 했잖아요.”
“그 약속… 지키고 싶어요.”
그녀는 그 말을 듣자마자 더 흐느꼈다.
울음이 조금 더 깊어졌다.
“전…”
“저한테는 그런 낭만적이고 행복한 날이…”
“안 올 것 같아요…”
청년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마이크 너머에서 누군가 무너지는 소리만 들었다.
그날, 청년은 숫자를 세듯 깨달았다.
나만의 꿈과 채팅으로 서로 만난 시간이
어느새 7개월을 넘어가고 있었다는 걸.
그리고 이상하게도,
시간이 길어질수록 확신은 더 커졌는데—
그 확신이 과연 “사람”을 향한 건지,
아니면 “내가 버텨온 시간”을 향한 건지
구분이 안 됐다.
청년은 그 밤에도,
그녀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마이크를 끄지 못했다.
말을 잘해서가 아니라,
끊는 순간
자기가 뭔가를 잃어버릴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날
그녀는 또 무반응이 됐다.
청년은 참다 참다
그녀의 아이디를 따라갔다.
다른 방이었다.
사람이 많았다.
아이디가 빽빽했고
분명 누군가와 누군가가 “있어 보이는” 자리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메인 로비 채팅창은
여전히 거의 대화가 없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청년은 화면을 뚫어지게 봤다.
그 속에
나만의 꿈 아이디가 보였다.
로그인 상태였다.
근데 말이 없다.
그리고 그때
청년 머릿속에 처음으로
그 추측이 들어왔다.
…이 방에서 대화가 없는 게 아니라,
대화가 밖에 안 보이는 데서 하는 거 아닐까?
1대 1.
누군가와 단독 채팅을 하고 있어서
로비는 조용한 건가?
그 추측이 들어오는 순간
청년의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녀가 나랑만 하던 방식으로
다른 누군가와도...?
그때, 더 싫은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 방에
익숙한 아이디가 있었다.
오동추.
아니… 이 새끼가 왜 여기까지?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그 순간 청년은 알았다.
오동추는 그냥 “미친 사람”이 아니라
따라오는 사람일 수 있다는 걸.
그리고 더 끔찍한 추측이 따라붙었다.
혹시… 지금도 저 둘이
1대 1로…?
로비가 조용한 이유가
그 때문이면?
싸이월드는 흔적을 남기는 곳이다.
청년은 그녀의 싸이월드로 돌아가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여태껏 나만의 꿈에게 궁금했던 것,
무슨 해명이라도 그녀에게 꼭 듣고 싶었다.
무엇 때문에 완전히 피하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면서
계속 잠수 타고, 또 있다 나타나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녀가 들어오면
뭐부터 물어볼지 생각했다.
노래가 흐르고,
미니룸이 멈춰 있고,
시간만 흘렀다.
얼마 뒤
그녀가 들어왔다.
그 순간
방문자 알림이 짧게 떴다.
누군가가 그녀의 방에 들어왔다가
순식간에 나갔다.
너무 빠른 출입.
확인만 하고 도망치는 듯한 출입.
청년은 방문자 목록을 눌렀다.
그리고
그 아이디를 봤다.
오동추.
청년은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하다 못해
더러워지기 시작했다.
왜 하필 오동추.
원래 나만의 꿈이 있는 곳이라면 종종 나타나긴 했는데
야후 채팅은 그렇다 치고 싸이월드까지?
순간, 몸 안쪽이 한 번 더 꺼림칙하게 내려앉았다.
우연이라고 넘기기엔—너무 정확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가 뭘 묻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마치… 이미 알아차렸다는 듯.
나만의 꿈은 청년을
야후 채팅 1:1로 불러내었다.
짧은 메시지가 먼저 떴다.
“… 지금, 그 사람… 봤죠.”
청년은 떨리는 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녀에게 물었다.
“오동추… 그 사람… 알아요?”
한참 뒤
짧은 답이 왔다.
“…그 사람… 제 전 약혼자예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오동추가 전 약혼자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나만의 꿈의 진실과 거짓은 어디까지인지.
왜 전 약혼자,
그것도 소름 돋을 만큼 더럽고 변태로 알려진 그놈을
어떻게, 왜?
저런 더러운 놈이랑 약혼까지 했다면
넌 뭐냐, 나만의 꿈…
순간 청년은
거의 7개월을 말 들어주고, 노래 불러주고, 위로해 줬을 때
속으로 얼마나 둘이서 비웃었을까—
모든 상황이 앞뒤가 안 맞게 돌아가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그전에 얼굴도 진짜 이름도 모르는 사람 때문에
청년이 이러고 있었다는 게 한심해서
혼자 자신에게 욕을 퍼부었다.
“에라이… 이 병신아… 정신 차려라…”
이런 거 가지고 상처를 받았냐, 한심한 놈…
청년은 숨을 한 번 놓쳤다.
가슴이 쿵— 내려앉고
손끝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그리고 이상하게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오동추도 아니고, 파혼도 아니고—
도토리였다.
자기가 밤마다 눌렀던 그 버튼.
선물하기.
충전.
확인.
딱딱한 클릭 소리.
그때는 그게 “위로” 같았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그건 그냥… 내가 돈으로 내 자리를 산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가 알아서 ‘좋은 사람’ 역할을 한 것이
너무 창피하고 수치스러웠다.
그다음은 노래가 떠올랐다.
마이크 켜고,
목을 가다듬고,
캔 맥주 한 모금 삼키고
괜히 웃으면서—
“너를 품에 안으면…”을
나름 정성껏 불러 주던 순간이 떠올랐다.
이어폰을 타고
내 목소리가 다시 내 귀로 돌아오던 감각까지
이상할 만큼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 순간의 나는
내가 무언가를 해냈다고 믿었다.
내 목소리가
누군가를 붙들고,
무너지지 않게 해 주고 있다고 믿었다.
지금 생각하면
, 그 믿음이 너무 순진해서 오히려 더 수치스러웠다.
그녀가 “노래 좋네요”라고 했을 때
청년은 진짜로 믿었다.
괜찮아질 거야.
내가 있잖아.
근데 지금은 그 문장이
다른 뜻으로 들렸다.
그게 진짜 감탄이었는지
습관적인 답이었는지
그냥… 다음 말을 끌어내기 위한 말이었는지.
청년은 갑자기
자기 목소리가 더럽게 느껴졌다.
가슴에서 뜨거운 게 올라와
목젖에 걸리는 느낌.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데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가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혼자서
진심인 척, 어른인 척, 멋있는 척
마이크 앞에서 노래 부르고 있던 그 장면을
어딘가에서 관전하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처럼.
쪽팔림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누가 뺨을 때린 것도 아닌데
뺨이 얼얼하고,
귀가 뜨겁고,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맥주 냄새가 갑자기 역겨워서
입안이 씁쓸했다.
청년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마치 길 한복판에서 넘어졌는데
그 순간 하필
사람들이 다 쳐다본 것처럼.
그리고 그때
제일 비참한 생각이 찔러왔다.
혹시… 나만 그런 게 아니면?
나랑만 단독 채팅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한테도
똑같이 “대화 가능하세요?” 보내고,
똑같이 인사하고,
똑같이 잠수 타고,
똑같이 마이크 켜고,
똑같이 울고—
그리고 누군가가 또
도토리를 쏘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거면?
그 상상을 하는 순간
청년의 배가 서늘해졌다.
그건 “내가 속았다”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는 느낌이었다.
순간 청년은 온갖 생각이 뇌를 때렸다.
그다음은…
내가 만약에 지금 눈치를 채지 못했다면
도대체 날 어디까지 속이면서 가지고 놀다가 사기를 칠까.
별로 가진 것 없었지만
단돈 10원도 내어주기 싫었다.
선을 지킨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제일 먼저 넘은 건
상대가 아니라 청년이었다.
판이 닫히던 밤
청년은 더 자세한 건 묻지 않았다.
묻는 순간
자기가 더 깊이 들어갈 것 같아서.
그냥 화면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창을 닫았다.
야후 로그아웃.
싸이 로그아웃.
모뎀 끊기.
컴퓨터 종료.
모니터가 꺼지며
방이 다시 어두워졌다.
형광등만 남았다.
청년은 자기 자신을 비웃었다.
그래.
이게 뭐였냐.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청년은 소년처럼 느껴졌다.
마치
그 둘이 짜놓은 판 안에서
우물 속을 허우적대는 개구리.
때가 되면 꺼내져
잡아먹힐 대상처럼.
그 생각이 너무 선명해서
청년은 더 이상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날 밤,
그는 야후도 싸이도
완전히 끊어버렸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왔다.
현실은 차갑고 조용했지만
적어도—
초록불은 없었다.
…라고, 믿었다.
근데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을 때
귀 안쪽에서 자꾸
(탁)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이크가 켜지는 소리.
그리고 그 다음에 따라오는 숨.
쓰읍— 하—
청년은 눈을 떴다.
방은 그대로였다.
형광등은 꺼져 있었다.
그런데도
메인 로비의 그 이상한 정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사람이 많은데도
말이 없던 그 방.
말이 없었던 게 아니라
밖에 안 보이는 곳에서 말이 오가던 느낌.
청년은 깨달았다.
판은 닫힌 게 아니라—
내가 혼자 닫았다고 믿은 것뿐이라는 걸.
그리고 그 판 어딘가에는
여전히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조용히, 침착하게,
반응을 기다리면서.
—다음: 9장-1부에서…
이때는 그래도, 인터넷 전선망 너머에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곧—사람이 아닌 것과 대화하는 시대가 올 거라고,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안내 — 모방 범죄 주의]
본 작품에는 범죄 수법·수사 절차·법정 장면이 현실적으로 묘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범죄를 미화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함이 아니며, 현실에서의 모방을 강력히 금합니다.
작품 속 사건은 허구 또는 각색이며, 어떠한 범죄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저작권 안내]
본 작품 **『너를 품에 안으면』**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되는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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