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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숨은 행복찾기

역사란 무엇인가 - 키워드 : 기록

by Chloe J

나는 주로 기록을 좋아한다. 특히나 손으로 끄적거림을 즐긴다. 잘쓰는 글씨는 아니지만 내 손이 지나간 자리에 내 색깔이 묻어난 비슷한 느낌이 좋다. 글씨가 비슷한 간격과 비슷한 크기로 적혀있으면 가끔은 문서라기 보다 그림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서 문구도 좋아하고 노트도 많다. 새로운 펜, 새로운 노트를 쓰는 맛도 즐겁지만 새노트에 적는 첫 기록은 설렘까지 준다. 학창시절 새로운 학기가 시작하고 표지에 이름과 노트제목을 쓸때, 그리고 빳빳한 앞장을 처음으로 넘길때의 설렘이다.


최근들어 새로시작한 노트가 있다. 김신지 작가의 '기록하기로했습니다' 책을 읽고 여행기록을 하나의 노트로 남기기로 했다. 방법은 이러하다. 한번의 여행에 얇은 실제본 노트 한권을 가져가 그 속에 여행의 모든것을 담는다. 여행은 한번가고 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하면 스테디셀러 노트를 준비한다. 그래야 여러권 동일한 디자인과 동일한 크기의 노트가 나열되며 나만의 시리즈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여행의 준비물에서부터 스케줄이나 비행시각, 필요한 정보를 담아가고 여행 중의 과정, 어디에서든 받은 느낌을 자리만 앉으면 끄적인다. 시간이 허락되는 곳에서는 풍경이나 랜드마크가되는 건물등을 노트에 스케치해보기도 한다. 여행의 낯섬과 낯선곳에서의 불안, 생각, 느낌을 모두 그곳에 담고 돌아온다. 보통 노트 앞면에는 여행간 도시명이 적고 그게바로 그 여행기의 제목이 된다. 이번 딸과 다녀온 유럽여행에 몰스킨 실제본노트 핑크색을 구입해서 호기롭게 '런던 파리'라는 제목만 달랑 적어 여행 내내 기록 해봤다. 9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다 적을 수 없었던 페이지에는 사진을 출력해서 붙이기도하고 여행 중 구입했던 영수증을 추억으로 붙였다. 표지 제목 밑에는 가장 즐거웠던 딸과의 베르사유궁전 점프샷 사진을 붙였다. 몰스킨, 안그래도 비싼 노트가 이제 내게는 값을 메길 수없을 만큼 소중해졌다.


이전에는 여행에서 돌아오면 금방 희미해진 과거가 되어버렸다. 디지털 이미지로 남겨진 사진은 찾아야할 이유가 있어 뒤적이지 않으면 찾아보지 않았다. 분명 행복한 추억이었지만 '좋았다'는 단조로운 몇마디로 밖에 표현되지 못했다. 다양한 일들은 한줄로 그것도 감상으로 생략되었다. 느낌만 남은 잊혀짐이 되었다. 그래서 기록을 시작했다. 아직도 여행지에서 중간중간 기록하는게 습관처럼 되지 않아 구멍이 숭숭 뚤린 추억이지만 담아온 기록은 나만의, 우리들의 영화시나리오가 되어 다시 그 장소로 우리를 데려다준다. 여행기록 일지 모서리에 손때가 묻을 수록 행복한 시간이 늘어감을 느낀다.


누구나 기록을 남긴다. 하지만 모든 기록이 같은 가치를 가지지는 못한다. 기록은 시간을 입니다. 오래되고 지속된 기록은 그 본래의 낱장의 기록의 가치를 넘어선다. 얇은 한권에 한권이 더해지고 시리즈물이 되어가면 가치는 배가된다. 종이는 낡아가며 마음은 쌓여간다.


어느새 여행기록이 2권이 되었다. 2박3일, 시댁 식구와 함께가는 짧은 여행에도 기록했다. 하지말까?고민을하기도 했다. 시동생도 함께하는 여행에 유별나 보일까 걱정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눈질끈 감고 나는 원래 기록하는 사람이기로 했다. 하는데까지 했더니 짧은 일정에도 절반이 넘는 한권의 기록이 어느새 책장에 나란히 놓이게 되었다. 여행을 자주 가지 못하는게 늘 불만이었다. 사실 그와중에도 어딘가 다녀오긴했고 짧다고 하찮게여기며 과거속에 날려버렸다. 소중하다면 잡아놨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그리 많은 노력이 들지 않았다. 이동시간에 보고 들은것을 적었고 구입 영수증과 입장권 종이를 쓰기레통에 버리는 대신 가져간 마스킹테이프로 붙였다. 자기전에 영수증과 입장권에 간단한 설명을 붙였다. 이렇게 붙이다보니 이 자체가 재미였다. 여행지에서 먹은 아이스크림 껍데기도, 젓가락을 싸둔 종이도 모두 추억의 노트로 들어가 재미있는 재료가 되었다. 추억을 머릿속으로 상상만하는게 아니라 만지며 그때를 떠올리게 되었고 아이스크림을 먹던 소소한 에피소드가 하나의 글이 되었다. 기록은 과거로 남지않고 현재의 나를 행복했던 시간속으로 잠시 데려다준다. 쓸때 즐겁고 보면서 행복하고 언젠가 딸과의 추억으로 지난날의 행복을 야금야금 꺼내 먹을지도 모를 일이다.


행복이 기록 속에 있다. 그때는 혼잡한 다른 상황때문에 몰랐던 행복이라는 글자가 돌아와 보니 여기 저기 묻어있다. 그 속에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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