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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oe J Jun 13. 2024

재봉틀과 아는 언니

우울증이란 병이 그렇다.

약을 복용하면 1~2주 만에 정상이 된 기분이 든다. 무드가 정상으로 돌아오며 서서히 관계가 돌아온다. 마음이 고통 속에 있다는 것은 우울증을 앓고 있는 그 자신 안에서는 죽고 사는 문제가 지속된다. 취미생활이나 가족 이외의 관계를 이어나갈 여유가 없다. 나도 그랬다.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한 달 정도 되니 적응도 끝나고 예전의 나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그제야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나 안에 갇혀있다 가족을 찾게 되고 가족 외 관계를 원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이천에 살았다.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던 그곳에 남편이 2년 동안 공보의로 있었다. 그나마 아이가 유치원에 다녔고 그 끈으로 동네 아는 언니가 생겼다. 나와는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 과거에서 온 사람 같았다. 남동생의 학업을 위해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공장에 취직을 했다던 살림꾼 영미언니(가명). 우리는 그 당시 삶의 궤도가 맞아 참 많이도 붙어 다녔다. 어릴 적부터 아프신 엄마를 대신해 아버지, 오빠, 남동생을 건사해 온 언니는 내게도 반쯤은 엄마 같은 느낌을 풍겨주는 사람이었다. 친정엄마 한테나 받을법한 깍두기, 김치, 반찬 나눔도 받고 잡채, 갈비찜, 갈비탕 같은 음식도 장보기부터 플레이팅까지 가르쳐준 다정하고 따뜻하고 생활력 넘치는 사람이었다.


생활력 강한 영미언니는 행동력도 엄청났다. 딸 셋을 키우던 언니는 아이들 머리띠, 머리핀비용을 아끼려 재료를 사서 도안을 그리고 직접 만들었다. 그 모양이 꽤 괜찮았다. 펠트지 몇 장이면 머리핀과 머리띠가 수십 개 나왔고 동네장터가 열릴 때 아이들에게 경제공부 겸 판매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나는 언니 곁에서 이 가내수공업의 동업자로 참여했다.


어느 날 언니가 나에게 함께 홈패션을 배워보자고 제안했다. 전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분야였지만 언니 따라 문화센터를 다녔다. 초급, 중급, 고급반을 모두 끝내고 우린 함께 재봉틀을 구매했다. 그즈음 남편은 공보의가 끝났다. 아쉬움을 제대로 나누지도 못하고 이사를 왔다. 마음에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우울은 아직도 약간의 호르몬 보충이 필요했다. 영미언니와 함께하던 시간을 재봉틀로 채웠다. 파우치를 만들고, 실내화를 만들고 방석을 만들고... 어느 날 집을 둘러보니 집에 있는 천 쪼가리는 커튼을 제외하고 모두 내가 만든 물건들로 채워졌다. 도안까지 해 만든 여름이불이 10개가 넘었고 친정과 우리 집 30개가 넘는 수건은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에코가방은 과장을 조금 보태면 100개 만들었다. 과장을 빼도 70~80개다. 당시 여동생 직장동료도 내가 만든 가방을 들고 다녔으니...  우울증은 재봉틀의 진동과 균일한 소음과 함께 조금씩 털려 나갔다. 어느덧 인지하지 못하던 사이에 약 없이도 정상의 기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울증은 한 달이면 정상기분으로 돌아오지만 6개월 이상 약복용을 유지해야 한다. 호르몬이 정상적으로 일정 이상의 레벨을 유지하기 위해서 약을 아주 천천히 줄여가며 끊어야 한다. 이걸 테이퍼링이라 한다. 하루 2알이던 약을 1알로 줄여 한 달, 반알로 한 달, 나중에는 2~3일에 한 번씩 반알을 복용하다가 서서히 끊는다. 이 과정은 말로 표현하니 쉬워 보이나 쉽지 않다. 혹시 너무 급하게 줄여버리면 '좌불안석' 불안해서 가만히 있지도 못하는 상태를 맞기도 한다. 나는 테이퍼링이 1년이 넘게 걸렸다. 중간에 증상이 심해져 다시 돌아가기도 했었다.


우울증 약 테이퍼링 성공에는 재봉틀과 함께한 시간이 있었다. 다시 시작된 직장생활,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상이 멈추는 저녁시간이 되면 재봉틀을 꺼낸다. 한 땀 씩 박아가는 규칙적인 소리와 진동, 선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눈과 정신은 다른 곳으로 갈 수 없다. 양손으로 하는 방향조절과 발의 감각으로 진행 속도조절, 이 모든 합으로 오후 10시 이후의 시간을 채워갔다. 우울증 증상 중 하나가 생각이 많아지는 데 있다. 상처가 되었던 과거의 그날이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마음을 괴롭히고 누군가에게 들은 아픈 말이 지금 속삭임으로 귀에서 맴돈다. 약을 먹고 있지만 용량이 줄고 있으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듯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분을 경험한다. 그럴 때 이런 재봉틀 돌리는 시간은 내게 명상이자 치유의 시간이었다. 심지어 돈이 좀 들어서 그렇지 치유의 시간이 지나면 가방, 발매트, 의자커버등의 결과물들이 손에 주어졌다. 내 마음의 무게를 덜어낸 결과물들은 곁에 있던 모두의 손에 들어갔다.


재봉틀을 돌린 지 4년이 되었을 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이날 이후 재봉틀은 창고에 들어갔다. 더 이상 치유가 필요하지 않았다. 이제는 치유가 아니라 성장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아마 그다음 날부터 미라클모닝과 함께 독서를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길고 어두웠던 시간에 함께해 준 영미언니. 언니와 헤어진 이후 나를 지켜준 재봉틀의 시간이 있어 지금의 내가 있다. 치유 없이 성장할 수는 없다.

그때 우리 꼬맹이가 이렇게 사랑스러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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