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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oe J Aug 07. 2024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하루에도 수백 번의 작은 의사결정으로 의식에 피로가 생길 지경이다. 요즘 인터넷을 보면 선택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본인이 입을 옷부터 오늘저녁 무엇을 먹을지를 불특정 다수에게 질문한다. 저런 걸 왜 묻나 싶을 만큼 가볍기까지 하다. 


우리의 일상은 이런 작은 선택의 고민에서부터 일생이 걸린 문제까지 때로 자지도 먹지도 못할 정도의 고통으로 선택 앞에 서게 된다. 그런 고통이 왜 나에게 주어진 것인지 원망했던 적도 있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상상하지 못할 고통을 겪고 이런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책은 우리의 문제를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지금 내가 하는 고민은 이들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그저 배부른 투정에 불과하다. 다행히 우리는 이런 일을 겪지 않고 간접적으로 그들을 통해 책으로 경험하고 공감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지... 고통 속에서 얻을 수 있었던 인간의 실존에 대한 물음과 의미까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인간다움을 상실한 일상에도 존재하는 삶

인간다움을 상실한 삶을 경험한 적도, 경험하고 있지도 않다. 전쟁이든, 전쟁 같은 기아든 끊이지 않았으니 지구상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경험 중인 고통이다. 죽음의 수용소처럼 극단적인 고통의 삶 안에서도 상대적인 행복이 있었다. 그들에게 행복은 수프에 콩 한알이 더 들어가는 것이고, 보다 편한 일을 배정받는 것이며, 좀 더 좋은 도구로 일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런 먹고 싶고, 자고 싶고, 안전하고 싶은 욕구를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보다 인간다워질 수는 있다. 그게 바로 삶의 의미가 가져다주는 살아갈 힘이다. 


이런 상대적인 작은 행복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봤던 죽음에 다가가며 시야가 좁아지고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와도 닮아있다. 사회 활동을 활발하고 넓게 많이 하던 사람도 죽음이 다가오면 가족, 친지, 집에서의 안락으로 돌아왔다. 이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물리적 환경에 따른 의욕의 변화다. 죽음의 코스로 접어든 병을 되돌리고, 세월을 거꾸로 돌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수용소에서의 죽음은 다르다. 질병처럼 한 발씩, 한 방향으로 진행하지 않으며 예상할 수도, 선택할 수도 없다. 선택한다 하더라도 단지 인간의 불완전한 결정일뿐이다. 그래서 단지 소소한 행복과 의미에서 끝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선택을 상실한 곳에서의 선택은 더없이 소중하고 가치가 무겁다. 빼앗긴 인간다울 권리 앞에서 인간다울 것인가?라는 물음을 마주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인권이 '역사상' 최고의 가치를(인간의 존엄은 시간이 갈수록 강조되고 있기에) 메기고 있는 지금의 삶이 얼마나 인간다웠었던가를 되돌아보게 한다. 내가 무심 코하는 행동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동조주의나 전체주의가 아니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누구나 하기에 아무 생각 없이 따라 했던 행동과 권력에 의해 판단 없이 했던 행동이 혹시나 인간다움과 맞바꿔야 했던 건 아닌지 이번의 기회로 생각해 본다. 


삶의 의미와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은 3가지가 있다. 첫째는 일과 창조, 둘째는 사랑, 셋째는 시련에서의 태도를 통해 찾을 수 있다. 내 삶에서 의미 찾기를 한번 해본다. 삶의 태도로 돼지와 성자의 선택을 해야 할 만큼 큰 시련은 우선 없다. 사랑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 크지만 내 관심과 기대는 자녀의 성장과 독립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믿기에 사랑에 삶의 의미를 다할 생각도 별로 없다. 그렇다면 일과 창조가 남았다. 생의 과업으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이뤄야 할 일이 무엇일지... 나는 아직도 내 삶의 의미를 찾는 여정 중에 있다. 내 삶이 끝나기 전에 삶과 죽음 앞에서, 고통받고 죽어가는 순간에도 책임감을 갖고 삶을 포기하지 않을 이런 거창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원래 갖고 태어난 기질이 무겁고 어두워 가볍디 가벼운 삶을 살고 싶었다. 이것조차 생각하기 전의 삶은 실체 없는 누군가의 기준과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책을 읽고 생각할 기회를 갖지 않았다면 하던 대로, 흘러가던 대로 내 기준 아닌 삶을 끝없이 살며 공허해했을 테다. 인생의 의미는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 인생의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의미 따위는 없다. 인생의 허무를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내가 부여하는 것이 내 인생의 의미다. 자유라는 가치 위에 의미를 찾고 싶다. 혼자도 자유로울 수 있는, 내가 되기 위한 일과 사랑, 함께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랑과 관계 그리고 누군가를 탓하던 원망대신 그 고통에서 내가 찾아야 할 시련에 대한 삶의 태도를 가지는 것이 지금 생각할 수 있는 삶의 의미로 다가가는 길이다. 


니체의 영원회귀가 생각나는 저자의 행동강령을 끝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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