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어릴적 엄마로부터 전해들었던 엄친아, 엄친딸들의 무용담이 떠올랐다. 간혹 진실성이 의심되는 부분도 있었다. 엄친아중 한명은 반에서 거의 꼴찌를 했었는데 갑자기 마음을 고쳐먹어서? 고삼 1년동안 이불 들어가는 큰 장롱속을 비우고 그곳에서 잠도 최소한으로만 자며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 소문 끝에는 서울에서 아직도 많은 학생들의 꿈의 학교라 불리는 곳에 입학하게 되었다. 또 엄친딸 중 한명, 원래는 지방 고등학교에서 중간정도의 성적이었는데 공부 잘하는 친구를 만나게되면서 함께 서울 교대에 들어갔다. (내가 고등학생때는 교대가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이런 이야기의 끝, 엄마의 시선은 내 한심한 꼴을 향해 있었다.
학창시절의 나는 그냥 찌질이였다. 공부를 못한것도 아니지만 잘하지도 못했다. 서서히 미끄러지는 성적은 부모님 이외 누구의 관심을 끌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하고싶었던게 명확하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시키면 시키는 것만 하는, 그냥 한학급에서 대다수를 차지하고있는 학생중의 한명이었다. 책 중에 선생님들은 뛰어난 학생보다 말썽을 일으키지않는 멍청이를 좋아한다는 글귀가 딱 정확하게 그때의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생활이 계속되면서 실패감에 젖어들었다. 특별히 실패한 일도 없고, 아직 10대였으니 앞날을 아무도 알수가 없건만... 선생님들 눈에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학교 졸업하고, 적당한 대학에 들어가고, 결혼전에 잠시 가벼운? 직장생활을 하다 경력단절을 맞이할 아무개였다. 사실 이런 관심조차도 받기 힘들었다. 그랬으니 부모님 눈에는 패배자였고, 나로인해 인생이 어떻게 될지 앞날이 걱정되 잠이 안올 지경이셨다.
공부를 위해 시킬건 다해주신 부모님이었다. 작은 도시에서 1990년대에 과외도 받았고,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지만 학원도 다닐만큼 다녔다. 고등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학원 선생님에게도 나는 그저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성실하나 이도저도아닌 학생이었다.
30이 되고 결혼을 할때까지 아무도 내가 하고싶은게 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나조차도 내가 뭘 좋아하는지, 할수 있는지 몰랐다. 아니, 알필요도 없었다. 대학을 선택할때는 성적에 줄을 그어 아래위에 속해있는 대학 중 마음에 드는 곳을 선택하면 됐다. 그나마의 선택도 부모님 귀에 익숙한 곳으로 결정했다. 이렇게 늘 선택에는 2,3가지 보기가 주어져있었다. 주체적인듯 보였지만 세상이 보여주는 정답에 겨우 맞춰보려고 기를쓰는 대안일 뿐이었다. 그때 내가 본 세상에는 절대적인 정답이 존재했다. 대학은 서울대를 선두로 나열되었다. 학생의 한줄로 세워진 성적과 그 곁에 세워진 대학서열을 짝지어 인생이 결판났다.
친구와는 옆에 설수가 없었다. 한줄로 나열된 줄에서 어떤 친구는 내 앞에 있었고 어떤 친구는 뒤에 있었다. 나도 선두에 속하지 못했으나 부모님은 나보다 앞에있는 친구와 어울리기를 바랬다. 당연히 친구의 부모님도 당신들 딸이 나보다가는 서열에서 더 앞에있는 친구를 사귀길 바랬으리라. 앞의 친구를 부러워하고, 시기하고, 뒤의 친구를 경계하고, 약간은 무시하고... 친구의 뜻이 마음을 두고 가깝게 사귀는 또래를 의미한다면 나는 친구가 없었다. 모두 적이었다.
그시절 주인공 한스가 하일러를 만났던 것처럼 고정되어있던 생각을 흔들어줄 친구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스는 하일러를 만나고 변했다. 보는 방향에 따라 그 변화가 긍정적일수도, 부정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반항적이고 자유로운 하일러를 만나 학교와 선생님에 순종하기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아갔다. 적어도 지금 하는 공부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건 깨달았다. 세월은 변했으나 사회가 바라는 것과 교육에대한 문제는 그대로인 듯하다. 다른게 있다면 그시절에는 이런 일률적인 교육문제를 문제로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만 바뀌었다. 교육에대한 기대를 하는 사람이 부모와 목사님이었다면 지금은 부모와 학원선생님쯤 되지 않을까?
신학교생활을하며 우정과 자신을 찾던 한스는 하일러의 일탈로 헤어지게된다.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는 바수데바와 교류하며 삶의 의미를 깨달아가고, <데미안>에서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나 자신을 찾아간다. 하일러를 통해 자기를 발견해가던 한스는 그와 헤어지고 방황하고 몸은 쇠약해졌다. 결국 고향으로 돌아온 한스. 몸이 안좋아 고향으로 돌아오면서도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어른들 각자의 명예심으로 만신창이가된 한스는 부모의 이기심에 몸과 마음이 완전해질 시간을 갖지도 못했다. 몸도 제대로 추수르지 못하고 2개의 안 중 기계 견습공으로 던져진다. 아버지 기발라트씨는 분명 한스를 위한 일이라고 하겠지만... 내가보기에는 아버지 자신과 집안의 명예에 대한 희생을 강요할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한스에게 모든것을 다 품어줄 어머니가 있었다면, 한스에게 하일러가 끝까지 함께해줬다면 한스는 죽지 않을 수 있었을까? 작가가 살았던 시대에도 그랬고, 내가 어릴적에도 그랬고, 지금은 사회가 더 각박하고 살벌해졌다. 내가 한스일때는 어쩔수 없이 주는대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내가 아버지, 목사, 선생님의 입장이 될수 있다. 적어도 누군가는 수레위에 타고올라 평탄한 길을 가고, 누군가는 수레바퀴 아래서 다른 삶을 살아야할지도 모른다고 겁박하는 어른은 되지 말아야겠다. 앞뒤, 아래위가 아니라 옆에서서 각자가 짊어진 삶의 수레의 무게를 견디는 사회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