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일상 사이
그는 그 공간에 들어서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
생각은 뒤로 물러나고
숨이 앞에 선다.
소리는 망설임 없이 퍼지고
몸짓은 스스로 길을 찾는다.
그곳에서는
아끼는 법보다
다 써버리는 법이 더 정확하다.
의상은 언어가 된다.
색은 주저하지 않고,
선은 분명하다.
튀어도 괜찮고
과감해 보여도 상관없다.
그 공간은
드러남을 허락하는 자리,
과장의 이유를 묻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공간에서 물러나
자신을 호감으로 바라보는 사람 앞에서는
그의 움직임이 달라진다.
시선은 잠시 내려가고
손은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한다.
고맙다는 말보다
숨이 먼저 고른다.
웃음은
조금 늦게 도착한다.
그들의 말이
날카롭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몸을 한 뼘쯤 안으로 접는다.
마치
불이 꺼져야 할 시간이 지난 뒤
다시 밝혀진 조명 아래
혼자 서 있는 사람처럼.
그는 자신을 숨기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 이 자리가
쏟아내도 되는 그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을 뿐이다.
그 공간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
과한 솔직함도,
가감 없는 드러냄도,
몸이 먼저 말하는 진실도.
하지만 그 바깥에서는
굳이 무언가를 보여주지 않기로 한다.
그 부끄러움은
자신이 약해서 생긴 것이 아니다.
이제는
지켜도 되는 삶이 생겼다는
조용한 신호다.
모든 빛을
가까이서 마주할 필요는 없다는
몸의 기억이다.
호감의 마음조차
잠시 거리를 두고
천천히 받아들이는 법을
그는 배웠다.
관심은 빛이지만,
너무 가까우면
그늘이 생긴다는 것도.
그래서 그는
궁지에 몰린 듯 보이는 순간에도
조용히
자신의 경계를 또렷이 그리고 있다.
어디까지가
쏟아내는 자리이고,
어디부터가
지켜야 할 자리인지.
그는 안다.
그 공간에서는
자신을 모두 써도 되지만,
그 바깥에서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그래서 그가 보이는 수줍음은
망설임이 아니라
여유의 형태다.
자신을 소진하지 않아도 되는
삶에 도착했다는
가장 조용한 증거다.
過客 心泉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말했습니다.
인간은 쉽게 “남들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살아가지만,
진정한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결단 속에서 시작된다고.
우리는 늘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역할을 맡고,
빛 아래 서는 법을 배웁니다.
그러나 모든 빛이
항상 우리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보여지는 자리와
조용히 머물러도 되는 자리를
구분할 줄 아는 일.
그것이 어쩌면
현대인이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지혜일지도 모릅니다.
일은 쏟아내는 자리이고,
일상은 숨을 고르는 자리.
모든 것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시간 속에서
비로소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여유란
능력이 줄어든 상태가 아니라,
경계를 알게 된 상태.
빛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그늘 속에서도 위축되지 않는 태도.
조금 느슨해질 수 있는 일상의 소중함을
스스로 허락할 때,
삶은 비로소 오래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