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 장거리의 식물소감(所感) 1. 너의 이름은, 라일락
* 코너 소개
‘때가 되면 피고 지는구나...’라는 생각에 무심코 지나쳤던 길 위의 꽃들에 새삼스럽게 마음이 가는 중입니다. 그들을 기억하고 싶고, 그들과 나를 잇고 싶어 꽃에 대한 생각과 마음을 기록합니다. 나만의 식물도감인 ‘식물소감’에는 꽃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고, 이름을 불러주고, 말을 건네는 시간들이 담겨 있습니다. '식물소감' 속 꽃들과의 이야기에서 독자 여러분의 눈길이 닿지 않던 존재들의 모습이 한 번쯤은 떠오르기를, 그들과 마주했던 순간이 언제였더라 곱씹어 보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 극작가 장거리
문득,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존재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마음이 쓰이는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이런 순간에, 나는 마치 허공에 있는 투명한 문을 여는 투명한 열쇠를 주운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 문은 누구의 문도 아니기 때문에 나는 열쇠를 꽂고 손잡이를 돌려 들어가 본다. 그러면 내가 알던 세상과 똑같지만 미묘하게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바로, 무언가 하나가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내게는 길 위의 꽃들이 그랬다, 특히 라일락이.
돌이켜보면 라일락은 나의 봄 어딘가에 늘 있었을 것이다. 단지 내가 몰랐을 뿐. 어릴 때부터 꽃이나 식물에 퍽 관심이 없었던 나는 20대 중반까지도 진달래, 개나리, 장미, 해바라기, 코스모스와 같이 슈퍼스타급 인지도를 자랑하는 꽃들의 이름만 그럭저럭 알고 있었다. (동백과 장미를 잘 구분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런데 2013년 어느 늦은 밤 귀갓길에서, 새삼스럽게 라일락 향기를 듬뿍 느껴버린 것이다. 그것이 2013년이었음을 내가 분명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그 해 극단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에서 극작을 전공했지만 글 쓰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졸업 당시에도 변변한 습작 한 편이 없었고, 연극을 하겠다는 생각도 전혀 없었다. 그저 ‘20대에는 맘대로 살아보자’라는 나름의 목표에 따라 시골에서도 잠깐 살아보고,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아 여행으로 다 써버리곤 했다. 지금에 와서 그 때를 돌이켜보면 그런대로 즐거웠으나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주변 친구들은 하나하나 세상에서 자신이 있을 곳을 찾아가기 시작했고, 사회생활의 고단함과 그것을 견뎌냄으로써 주어지는 여유로움을 알아가던 시기였다.
그런 친구들에게 아무런 할 말이 없었던 나는 스스로가 왠지 초라해졌다. 그래서 27살이 되던 해, 두 달 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갑자기 이런 결심을 한 것이다. ‘전공 관련해서 뭐라도 해 봐야 어디 가서 말이라도 할 텐데... 도대체 대학로에서 연극하는 것이 뭔지 알아보기나 해 보자.’ 그리고 그렇게 시작했던 연극 일을 (가늘게 이어갈 뿐이지만) 지금까지 하게 되었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가 본다. 연극계에 누구 아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글재주가 뛰어난 것도 아니라 어쨌든 뭔가를 시작할 수 있게 해 준 극단 일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극단 생활에 잘 적응해 보겠다는 다짐으로, 낯선 사람들과 보다 더 가까워져 보겠다는 일념으로 워크숍 공연 연습과 술자리에 참여하다 보면 귀가는 늘 늦어졌다. 대학로가 있는 혜화역에서 출발하여 4호선 끄트머리에 있는 초지역에 도착하여 집에 걸어가면 새벽 한시가 넘곤 했다. 그 당시 꽤 어둡고 인적이 드물었던 길 때문에 항상 불안에 떨며 집으로 향해야 했는데, 그 불안을 조금이나마 경감시켜 주었던 것이 바로 길에 피어 있는 라일락의 향이었다. 또 일찍 오는 날은 일찍 오는 날대로, 고되고 지친 하루의 피로를 잠시 잊게 해 주었다. 얼마간은 그저 좋은 향이라고 느끼며 지나쳤던 것 같다. 그 후 얼마간은 이 향이 무슨 향인지 궁금해 하며 정체를 알기 위해 가족들에게 물었던 것 같다. 그리고 드디어 알게 된 너의 이름은, 라일락이었다.
‘라일락, 라일락...’
되뇌어 말할수록 처음 듣는 단어가 아니었다. 심지어 익숙했다. 그런 데 그게 무엇인지 지금까지 몰랐다니...! 라일락의 이름을 알게 된 이후, 나의 봄은 조금 더 풍요로워졌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일락이 피어 있는 곳에 다가가 코를 킁킁댈 수 있게 되었고, 그 향기의 미덕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공감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2013년 이후로 약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어떤 꽃의 이름을 더 알게 되었을까, 아니 궁금해 했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보니 쉬이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나름대로 밥벌이를 한다며 일도 하고, 연극도 하고 정신없이 보내 온 8년의 시간 동안 꽃이 숨어 있는 투명한 문을 여는 투명한 열쇠를 줍지 못했구나. 혹시 그래서 나를 둘러싼 세상이 무채색이 되어간다고 느낀 것은 아닐까, 나는.
2021년 봄을 맞아, 가던 길을 멈추고 활짝 핀 라일락 향을 맡아본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 없을지 모를 내 자리를 찾아보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 시간들을 위로해 주었던 향기가 올해에도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이 새삼 고맙다. 그래서 나는 길 위의 꽃들의 이름을 찾아보고 불러보고 기억하고, 떠오르는 이야기들을 기록해 보며 나를 둘러싼 세상을 나름의 방법으로 채색해 보려고 한다. 어릴 때 본 만화 ‘꽃천사 루루’가 된 기분으로 말이다.
장거리
* 극작가 장거리의 식물소감(所感)은 5회 연재물입니다. 매주 목요일에 업데이트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