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이 짧은 말속에는 단순한 충고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구조적 속박 속에서 버티지 못한 사람은 흔히 낙오자라는 낙인을 찍히며, 그 자체로 사회적 평가와 압박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스스로를 지키고, 생존하기 위해 선택한 결과일 뿐이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회사, 학교, 가정에서 흔히 목격한다.
회사에서는 상사의 괴롭힘과 불합리한 권력 행사가 피해자를 몰아세운다.
학교에서는 친구들의 은밀한 집단 괴롭힘이 심리적 상처를 남긴다.
시댁에서는 며느리에 대한 반복된 구속과 비교, 비난이 마음을 옥죄기도 한다.
모든 상황이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피해자가 버틸 수 없는 구조적 속박 속에서 선택한 ‘떠남’은 생존을 위한 결단이라는 점이다.
퇴사, 자퇴, 이혼 등 겉으로 보기에 ‘포기’처럼 보이는 선택조차, 사실은 용기 있는 생존 행위다.
그 속에서 용기라는 이름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은, 바깥의 시선이 현실과 다르게 판단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왜 버티지 못했느냐?”
“왜 조금만 더 참지 못했느냐?”
그러나 버티는 것과 떠나는 것 사이에는 본질적 차이가 있다.
버티는 것이 자기 파괴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희생이다.
떠남, 즉 구조적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은 생존을 위한 용기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떠나지 않고 끝끝내 버티는 것도 용기라는 사실이다.
상황이 아무리 벽처럼 막혀 있어도, 그 속에서 버티며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인내와 결단은 또 다른 형태의 용기다.
버티는 과정 속에서도 피해자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삶의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극도의 정신적 집중과 인내를 발휘한다.
누구를 탓할 수 있는가?
떠나든 버티든, 선택은 모두 생존과 자기 존엄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구조적 속박 속에서는 정의를 찾기 어렵다.
상사가 부당한 권력을 휘두르고, 동료나 친구가 반복된 괴롭힘을 행하며, 시스템이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할 때, 어디서 정의를 찾을 수 있는가?
세상은 피해자의 선택에 정의라는 이름을 쉽게 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적 시선은 그 선택을 낙인과 실패로 치환하려 한다.
그러나 피해자가 선택한 떠남도, 버티는 선택도 결코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행동이며,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다.
떠남과 버팀, 두 가지 모두 의미 있는 선택이다.
떠나면 구조적 속박에서 벗어나 마음과 삶을 지킬 수 있고,
버티면 스스로를 시험하며 극한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는 힘을 기를 수 있다.
둘 다 용기와 생존의 형태이며, 사회적 평가나 낙인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 선택은 단순히 개인의 생존 전략일 뿐, 누가 평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결국,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은 단순한 충고가 아니라 생존의 철학이다.
떠남이건 버팀이건, 중요한 것은 자신을 잃지 않고 지키며 살아남는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세상이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 선택 자체가 이미 충분히 의미 있고 가치 있는 행동이다.
떠남과 버팀 사이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과 마음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내가 속한 집단에서 내가 속박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엄청난 충격이 몰려온다.
이곳에서 더 이상 지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갑작스럽게 덮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견뎌 보려 애쓰며, 이런저런 방법을 총동원한다.
마음속에서는 끝없는 공격과 전투가 벌어진다.
결국 절망하며, 버틸 것인가 떠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이 과정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고단하다.
버텨서 얻고 잃을 것과, 떠나서 얻고 잃을 실익을 저울질하며,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만들어 간다.
그 이유가 아무리 궁색하다 해도, 스스로에게는 최선이다.
그렇게 우리는 버티고, 떠나고, 또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