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아들이 소중하고 한없이 아끼는 존재라면, 그 아들의 배우자 역시 누군가의 귀한 딸이었을 것이다.
고이고이 키워 좋은 짝을 만나길 바라며, 그 부모 또한 나와 같은 마음으로 그녀를 키워냈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그 사실을 너무 쉽게 잊는다.
‘며느리’라는 이름 앞에서는 딸이라는 본래의 존재가 지워진다.
어느 시어머니도 며느리에게 함부로 말하거나, 그녀의 삶에 함부로 개입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이들이 오래된 관습 속에서 그 부당한 행위를 ‘당연한 일’로 정당화시켜 왔다.
“나도 시집살이해봤어.”
“나는 그 정도로 며느리를 괴롭히지 않잖아.”
그들은 이렇게 말하며 자신을 ‘착한 시어머니’라 여기지만,
그 말속에는 여전히 과거의 상처와 통제의 흔적이 숨어 있다.
스스로는 덜한 폭력이라 생각할지라도, 그 안에는 여전히 ‘위계’와 ‘지배’의 언어가 남아 있다.
나는 그런 모습들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도대체 어떤 점에서 ‘착한’ 것인지,
보통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세상이 변하면 며느리들만 변하는 것이 아니다.
아들들도 변하고, 가족의 형태도 달라진다.
그런데 왜 시어머니들만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옛 방식을 지키려 하는 걸까.
악습을 따라 하며 “나는 정당하다”라고 말하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다.
진정한 지혜는 ‘내가 겪은 불합리’를 반복하지 않는 것,
그 악순환을 끊어내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나는 안다.
귀한 대접을 받아본 사람은, 그 따뜻함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사람은 받은 대로 주게 되어 있고, 준 대로 돌려받게 되어 있다.
악한 말은 다시 상처로 돌아오고, 선한 마음은 결국 사랑으로 되돌아온다.
며느리를 아끼고 존중한다면 그 마음은 반드시 내 아들에게까지 닿는다.
내게는 ‘아들의 아내’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딸이다.
그녀를 귀하게 대하는 태도는, 결국 나의 품격을 드러내는 일이다.
며느리를 통해 나의 인격이 드러나고, 내가 어떤 어머니인지를 세상은 알게 된다.
나는 며느리를 통제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을 다짐을 한다.
그녀의 세계가 나와 다르더라도, 그 다름 속에 그들만의 행복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방식대로 살아가게 두는 것,
그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진짜 어른의 사랑이다.
먼 미래에 나에게도 며느리가 생기게 된다면 며느리를 대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을 것이다.
“저 아이는 누군가에게 얼마나 귀한 존재였을까.”
그 물음 하나가 나를 한결 부드럽게 만들 것이다.
귀함을 알고 대하면, 관계의 온도가 달라진다.
냉랭하던 말투도 따뜻해지고, 의심하던 눈빛도 믿음으로 변한다.
며느리를 대하는 태도는 곧, 내가 얼마나 성숙한 인간으로 자라왔는지를 비추는 거울이다.
나는 그 거울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시어머니이고 싶다.
“그녀는 단지 며느리가 아니다.
누군가의 세상이며, 한 가정의 중심이고,
내 아들의 행복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