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투어는 다음 생에, 지금은 커피나 한 잔

말랑함이란 나를 용서하는 것

by 이혜원

미케 비치에서 보낸 오후, 말랑하지 못한 나


티브이 속 명절 풍경은 늘 남의 이야기였다. 공항 인터뷰에 응하는 사람들, 면세점 쇼핑백을 든 가족들, 설 연휴 해외여행이라니. 부러운 마음으로 리모컨을 내려놓곤 했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람.


그런데 2026년 설, 나는 지금 베트남 다낭 미케 비치에 있다. 호텔 루프탑 수영장에서.


남편과 딸은 새벽같이 바나힐로 떠났다. 나는 혼자 남았다. 수영복을 챙겨 입고 루프탑으로 올라갔다. 푸른 하늘이 수영장 물에 녹아들었고, 저 멀리 바다가 하늘과 맞닿았다. 영흥사 관음보살상이 산 언덕 위에서 은은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바다는 거짓말처럼 잔잔했다. 고요하다 못해 숨을 죽인 것 같았다.

해변 가까이 다가가 보면 하얀 물거품이 일정한 리듬으로 밀려왔다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물속에서 무언가 아우성치고 있는 것만 같다.


파란 하늘, 짙은 파도, 단아한 미소의 관음보살.


나는 이 순간 감사했고 행복했다.

손을 모았다.

건강하게 해달라고,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나를 위해,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오후 1시, 룸으로 돌아와 베트남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진하고 달콤한 커피에 취했다. 혼자만의 시간.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딸이 말했었다. "엄마, 섬 투어 하고 싶지 않아요?"


하고 싶다. 당연히 하고 싶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 호텔 방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을 뿐이다.

글 쓰는 중이라고 변명해본다.


혼자 낯선 곳에서 호텔 밖으로 나선다는 게 두렵다. 뇌가 정지된 듯하다. 그토록 말랑하게 나이 들고 싶다고 했건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말랑하게 나이 든다는 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노력하고, 해보고, 즐기는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나는 지금 호텔 방에 틀어박혀 있다. 허풍이었나!!!!

그냥 입으로만 떠든 건가!!!!


하지만

이것도 괜찮다고, 이 시간 내 모습을 받아들이자고 다독여본다.


말랑하게 나이 든다는 건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섬 투어를 못 가는 나를 나무라지 않는 것. 루프탑 수영장에서 혼자 하늘을 보며 기도했던 그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 베트남 커피 한 잔에 취해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이 순간을 인정하는 것.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만이 말랑함은 아닐 테니까.


두려운 나를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것. 그것도 충분히 말랑한 게 아닐까~


내일은 용기를 내볼지도 모른다. 아닐지도 모르고. 어느 쪽이든 괜찮다.


나는 지금, 설 연휴, 베트남 다낭 미케 비치 호텔에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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