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도구야”/ 자기애성 성격장애
사람 사이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심리적 경계가 있으며, 이 경계가 흐릿하면 타인에게 상처를 입기 쉽다. 사려 깊은 사람은 이를 존중하지만, 자기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은 타인을 도구처럼 여겨 경계를 침범한다. 정신의학에서는 이를 ‘자기애성 성격장애’라고 하며, 그 핵심에는 ‘특권의식’이 있다.
영화 히든 페이스는 이러한 자기애적 인물들이 타인에게 수치와 고통을 안기는 과정을 다루며, 관계 속 경계의 중요성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자기애성 성격의 매혹적인 첫인상>
수연(조여정)은 부유한 가문의 외동딸이고, 성진(송승헌)은 평범한 배경에서 자라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영화는 두 사람의 첫 만남을 보여주지 않지만, 짐작컨대 성진은 수연의 부유함, 세련된 취향, 여유 있는 태도에 이끌렸을 것이다.
자기애성 성격을 지닌 이들은 첫인상에서 호감을 주는 경우가 많다. 자신감 있고, 주목받는 것을 즐기며, 외적인 조건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철저히 ‘자기 자신’에 집중되어 있기에, 진정한 감정 교류와 상호 존중은 기대하기 어렵다.
성진은 수연과 그녀의 어머니(박지영)에게서 이질감과 열등감을 느낀다. 특히 수연의 어머니는 세련된 말투와 미소 속에 은근한 업신여김을 담아낸다. 상대를 기죽이는 말에 능숙하고, 존중하는 듯 보이지만 끝에는 상대를 깎아내리는 태도를 보인다.
“사람도 포장이야, 그렇지?”라는 말로, 성진이 그저 잘 포장된 ‘고양이 똥’일 뿐이라는 모욕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다.
성진은 그런 세련된 말 속에 담긴 칼끝을 알아 차린다. 그는 단단하게 현실을 딛고 올라온 사람이며, 인간의 어두운 면을 뼈저리게 겪어온 이이기에, 그 말 속의 냉소와 오만을 꿰뚫어본다.
<의존과 지배, 사랑이 아닌 복종의 관계>
수연과 또 다른 인물 미주(박지현)의 관계 역시 비뚤어진 애정의 전형을 보여준다. 미주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정서적으로 기댈 곳이 없는 상태에서 수연에게 끌린다. 수연은 미주의 유일한 보호자처럼 다가와 따뜻한 위안을 준다.
그러나 관계는 점차 왜곡된다. 미주는 수연의 과도한 요구에도 저항하지 못하고, 마치 감정의 노예처럼 복종한다. 그녀는 사랑을 주는 방식이 아니라 지배하고 길들이는 방식으로 미주를 대한다. 수연에게 미주는 하나의 ‘도구’였다. 감정을 주고받는 상대가 아니라, 자신이 필요할 때 사용하는 존재였을 뿐이다.
수연은 자신에게 집착하던 미주에게 마침내 냉정한 본색을 드러낸다. “너는 내 도구였을 뿐이야.” “내가 널 좋아하지 않아도, 넌 나를 좋아해야 해.” 그녀의 말 속에는 애정을 갈구하는 마음보다, 숭배받고자 하는 욕망이 더 짙게 배어 있다
<밀실, 자기애의 붕괴와 반전의 시작>
버림받았다는 배신감 때문에 미주는 수연을 밀실에 가둔다. 유일하게 바깥을 볼 수 있는 창을 통해, 수연은 자신의 약혼남이 미주의 곁으로 기울어가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본다. 밀실은 단순한 공간이 아닌, 수연의 자기애가 무너지는 ‘상징적 공간’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굶주림, 외로움, 절망, 배신, 비참함을 맛본다. 그토록 많은 것을 누렸던 삶이었지만, 생존조차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그녀는 진짜 인생의 고통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절박한 상황이 자기애를 치유하지는 못했다.
되려 그녀는 더욱 차갑고 잔인해진다. 수연의 자기애적 성향은 반사회적 성격과 결합되어, 타인을 괴롭히는 쾌감에 집착하게 된다.
< 자기애성이 완화되기 위해 >
끝없이 부풀어 오른 자기애는 언젠가 반드시 터지게 되어 있다. 자기애성 성격을 지닌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과업은, ‘나는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야만 진정한 자신과 마주할 수 있고, 건강한 자기감을 회복할 수 있다.
영화 히든 페이스는 그 깨달음의 기회를 끝끝내 거부한 한 인물과, 그 인물을 응시하고 있었던 수많은 상처 입은 이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ㅡ악성 자기애 성격장애ㅡ
악성 자기애 성격장애는 변화를 기대하기 매우 힘든 부류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처음으로 악성 자기애 (Malignant narcissism)라는 용어를 만들었는데, 악성 자기애를 가진 사람들의 특징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가학성 : 타인의 고통과 괴로움, 굴욕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이들은 자신의 즐거움을 충족시키고 타인을 조종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상대에게 고통을 준다.
2. 적극적인 조종 : 이들은 가스라이팅부터 애정공세까지 다양한 전략을 구사한다. 치밀한 계획과 계산을 거쳐 타인을 조종하며, 그 실력 또한 매우 뛰어나다.
3. 반사회적 행동 : 병적인 거짓말, 절도와 사기, 극심한 감정 기복, 폭력성, 이유 없는 적개심 등을 보인다.
4. 비판에 과민함 : 가벼운 자기애적 성향을 지닌 이들은 누군가 자신을 비판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가볍게 넘기는 경우가 있다. 자신은 어차피 완벽하기에 비판 자체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악성 자기애 성격장애가 있는 이에게 비판했다가는 본격적으로 공격에 직면할 수 있다. 이들이 상처를 받았을 때 알고 있는 유일한 대응법은 보복과 공격이다.
5. 편집증 : 자기 입장에서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조종하는 것이 워낙 당연한 일이다 보니, 모두가 그런 식으로 서로를 조종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출처 : 정서적 학대에서 벗어나기 (저자 : 비벌리 엔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