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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은영 Apr 30. 2019

18. 숨결이 바람 될 때

죽음에 관한 단상

36살의 젊은 의사가 있었다. 얼마간의 힘든 시간이 지나면 곧 의사이자 교수로 자신의 명성을 날릴 수 있는 전도유망한 사람이었다. 부인도 의사였기에 그들은 서로를 충분히 이해했고, 앞날에 대한 계획도 꽤 멋지게 세워두었었다. 

그런 그가 폐암에 걸렸다. 젊은 사람에게는 드문 병이었다. 한동안 고통스러운 치료과정을 거치며 얼핏 그는 괜찮아진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의사였기에 암에 대한 지식과 경험으로 담담히 견뎌내고 있었다. 암이라는 적에 맞서 누군가는 좌절하지만, 그는 에너지를 끌어모아 수술실로 복귀하는데 성공했다. 메스를 든 자신의 정교한 손놀림에 안도하고, 다시금 미래에 관한 꿈을 꾸는 듯 보였다.

하지만 결국 암이 뇌에까지 전이되고 말았다. 신경외과 의사로서 그는 앞으로 펼쳐질 일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인간다움을 잃어가며 서서히 죽어갈 것을. 결국 그는 얼마못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그간 의사로서 환자에게 조언하고 공감했던 순간들이 부끄럽기도 했다.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채, 그저 입에 발린 공감만 해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문학과 의학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는 듯 보이지만, 인문학이 가장 필요한 분야는 다름아닌 의학일런지 모른다. 특히 그가 전공한 신경외과는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환자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뇌 손상으로 인간다움을 내려놓는 일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아주 촉망받던 젊은이가 뇌에 생긴 종양으로 지적 수준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는 수술중 실수로 인해 언어 기능을 담당하는 뇌에 손상을 입을 수도 있다. 소위 멀쩡하던 사람이 ‘나다움’에서 벗어나는 지점은 팔이 부러지거나, 몸에 큰 상처를 입게 되는 지점이 아니다. 바로 뇌 손상으로 이전과는 다른 ‘나’가 되는 순간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이전보다 훨씬 못한 나’가 되는 순간 말이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는 가족들은 혼란에 빠진다. 환자 본인은 스스로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가족들은 이전과 이후를 온전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을 단순히 위로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은 상투적인 위로를 건네고, 깊이 공감한다는 표정을 지어야만 한다. 의사들은 환자가 느끼는 고통의 강도를 짐작만 할 뿐, 경험해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학문적으로 추정하는 고통의 정도를 가늠하고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의사들의 의무라는 것은 어딘가 씁쓸한 측면이 있다.  

삶은 여정이다. 그 여정에는 무수히 많은 굴곡이, 비바람이, 혹은 온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여정의 시작과 끝을 우리가 결정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과정을 얼마든지 우리식으로 채워갈 수는 있다.

저자가 젊은 나이에 자신의 꿈을 미처 펼쳐보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 것은 통상적인 관점에서 참으로 안타깝다. 하지만 나는 이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받아들이려 노력중이다. 죽음을 완전한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분명히 끝을 위한 치료 과정을 시작했던 것이 맞다. 끝을 위해 고통을 줄이는 과정을 견디는 것은 그야말로 불행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삶의 장면이 변화하는 시작에 발을 내딛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출발선상에 선 평온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실에 입각해 불행에 매몰될 필요는 없다. 최소한 우리에게는 선택할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사실을 대하는 태도와 인식만이라도 바꿀수 있다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지 않을까?

여전히 사회적 논란이 있긴 하지만, 요즘은 나이든 부부들이 이혼대신 ‘졸혼’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결혼을 졸업하곤 한다. 스스로의 행복을 찾으려는 노력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가하면 갱년기에 맞게 되는 폐경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완경’ 바로 월경을 완료했다는 의미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 또한 달리하면 어떨까?죽음을 불행한 결말로, 지속하지 못하고 꺾여버린 삶의 실패작 쯤으로 인식하는 대신, 삶을 완료한 것으로 바라본다면 훨씬 낫진 않을까? 

누구에게나 ‘완료’의 시점이 온다. 언제가 될지 몰라도 그 완료의 시점까지는 삶을 충실히 채워나가며 희망을 노래하면 좋겠다. 이 책의 저자 폴 칼라니티처럼 말이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의사로서, 한 인간으로서 자아성찰의 끈을 늦추지 않았던 폴 칼라니티에게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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