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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정 May 05. 2023

다녀올게요.. 무박 2일 합법적 외박

제주올레 10코스


저녁 10시면 씻고 잠잘 시간인데 주섬주섬 옷가지 챙겨 간단한 배낭을 챙긴다.

양말을 신으면서 문득 친정아빠가 생각난다.

새벽 낚시를 좋아하셨던 아빠는 우리가 잠들 시간에 장비를 갖추시고 간단한 도시락을 챙겨 낚시를 가시곤 하셨다. 내가 꼭 그때의 아빠의 모습을 닮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야에 출발하는 퀸 제누비아호를 타고 제주도 올레길을 탐방하는 시그니처 스탬프투어를 두 번째 나서는 길이다.

3월에 1코스를 완주하고 4월에 10코스를 도전한다.

시그니처 투어를 하면서 퀸제누비아호 캡슐침대를 사랑하게 되었다. 캡슐 안에서 작은 스탠드불을 밝히고 엎드려 책을 읽고 있노라면 동화 속 하이디가 된 기분이다. 짚더미가 쌓여 푹신한 다락방 창가에 누워 별을 바라보던 만화영화 속 알프스소녀 하이디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푹신한 침대와 달빛 같은 조명이 그렇다.

시그니처 스탬프 투어는 매월 1회 무박 2일의 일정으로 시작한다. 이번코스는 화순에서 모슬포 올레까지 총 15.6km를 완주하는 코스다.

새벽 6시에 제주항에 도착하면 대기하고 있는 버스를 타고 제주 올레 공식 안내소로 이동한다. 10코스 인증사진을 찍고 하루의 대장정이 시작된다.

화순 금모래 해수욕장을 지나 사계포구를 지나는데 바람이 너무 불어서 걷기가 힘들었다.

말로만 듣던 제주바람의 실체를 느끼게 해주는 바람이었다. 사계포구에는 그 강풍 속에서도 사진을 찍는 전문작가님들이 있었다. 강풍을 뚫고 무념의 길을 걷는 이들 만큼이나 그들의 렌즈를 통해 보고자 하는 바람의 간절함이 있는 이유이겠지.

내리막 길은 힘들다... 무릎에서 소리가
강풍 속에서도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작가님을 피해서 한 장.. 사계포구

사계포구를 지나 송악산 전망대까지 모래바람맞으며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구나 하는 절경이 시야를 가득 메꾼다. 하얗게 출렁이는 파도를 내려다보며 하늘과 맞닿은 그곳까지 시선을 고정하고 잠시 숨을 골라본다. 오르고 내리는 계단 길에서 인생의 순간순간을 생각하며 삶의 어느 한 지점인가를 되짚어 본다. 무릎이 아프다고 운동도 안 하고, 공부한다고 종일 앉아 있느라 배둘레만 늘려 놓은 나의 게으름을 반성하며 이렇게 걸을 수 있고 함께 응원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참 좋다.


<은둔의 즐거움 p245

타인에게 줄 기쁨을 생각하는 마음은, 그러면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는 마음은 고독 속에서 충만함을 느끼는 헌신의 은둔자로 만들어줄 것이다. 그랬을 때 고독은 나의 충실한 반려 감정이 되어 '좋은 고독'의 즐거움이라는 기쁨이 되어 줄 것이다.>


15.1킬로미터의 올레길 걷는 즐거움도 있지만 제누비아호의 캡슐침대에서 느끼는 나만의 고독시간이 좋다. 책을 펼치고 하이디가 되어보는 4시간의 좋은 고독은 나만의 은둔의 즐거움이다.

깜박하고 챙기지 못한 스탬프 북은 친구의 완주 스탬프북으로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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