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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버 Aug 29. 2021

나도 쓸모 있는 자식이구나


면접이 끝났다.

20분 동안 최선을 다해 정신줄을 붙잡고 최대한 '공무원스러운' 답변을 하고 나왔다.


얼마 후 면접 결과, 함께 준비했던 스터디원 전원 최종 합격이었다. 발표와 동시에 정해진 연수원 입소 날짜는 꽤 타이트했고 근교로 짧은 여행을 다녀온 후 바로 연수원에 입소했다.


법무연수원은 150여 명의 합격생과 수 십 명의 현직 공무원들이 6주 동안 합숙생활을 하는 곳으로 공시생들의 꿈의 장소였다. 합격의 기쁨과 함께 본격적인 일을 시작하기 전 누릴 수 있는 가장 꿀 같은 시간을 보내는 곳! 하지만 왠지 연수원 생활이 나에겐 그리 즐겁지만은 않았다.



많은 사람들과 오랜 시간 부대끼며 보내는 시간들이 설렘보단 불편함이 컸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긴 시간'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학창 시절 수학여행이나 친구들과의 여행도 2박 3일 이상은 가기도 전부터 진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을 만나며 에너지를 얻는 성향과 반대로, 나는 주로 혼자 있는 시간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에너지를 충전한다. 그래서 4인 1실로 한 방을 쓰며, 하루 종일 여러 명이 부대끼는 연수원 생활이 설레기보단 불편했다. 어느덧 퇴소할 날짜가 가까워지며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퇴소 후 바로 근무를 시작할지,
임용을 유예할지.




임용유예 사유는 학업과 질병이 있는데, 대학교 2학년 휴학 중인 나에겐 선택권이 있었다.


재충전을 하고 싶다는 마음과 아직 사회에 나갈 준비가 덜 되었다는 무서움에, 퇴소 날 '임용 유예하겠다' 부모님께 전화드렸다.


[아빠] '공무원이 학력이 무슨 상관이냐' 라며 바로 일을 하라고 화를 내셨고
[나] '학교를 다니는 것도 중요하고, 일을 시작하기 전에 준비가 필요하다'라고 반항했다
[엄마] '엄마가 도와줄 테니 아빠랑 싸우지 말고 바로 일 시작하자, 응?'  하시며 설득하셨다



강압적인 아빠와 그런 아빠의 눈치를 보며 딸들에게 받아들임을 강요하는 엄마의 모습이 익숙했지만 원망스러웠다. 결국 한 학기 정도를 임용 유예할 수 있었지만, '평생 일하며 살 텐데 왜 굳이 일찍부터 일을 시키려 했는지' 아직도 아빠의 마음은 이해할 수 없다.






직업에 대한 고민 없이 엄마의 말에 수험생활을 시작했고 운이 좋게 이른 나이에 합격했다.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에서 대부분의 10대는 그저 수능을 잘 보기 위해 공부한다.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생각해서 가지게 된 '꿈'이라는 것을 가진 소수를 제외하고) 그리고 20대에는 수능 점수에 맞춰 온 대학일지라도 앞으로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살 것인지 처음으로 '스스로' 고민해 볼 수 있는 환경에 놓이게 된다.



1년이지만 대학시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생각은 '나는 이제 뭘 해야 하지?'였다. 


수능이라는 목표가 사라진 내 인생의 의미가 뭔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던 21살의 봄, 또다시 엄마가 정해준 '공무원 시험'이라는 목표가 생겼고, 스스로 했어야 했던  '그 고민'은 내 머릿속에서 밀려났다. 그렇게 나는 10대에 이어 20대에도 스스로 고민하는 힘을 기르지 못한 채, 엄마가 정해준 빠르고 쉬운 방향으로 편하게 걸어갔다.


하지만 그 길은 빨리 갈 수는 있지만, 오래갈 수는 없는 길이었다.






학창 시절 공부를 꽤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다.

친구들보다 잘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지만 특별히 어떤 꿈이 있었다기보단 부모님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어린 시절 엄마의 모습은 어린 딸이 보기에도 항상 바쁘고 지쳐 보일 때가 많았다.


보수적인 집안의 큰며느리가 연이어 딸만 4명을 낳았으니, 주변 어른들은 차가웠고 무뚝뚝한 남편은 더 밖으로 돌며 엄마를 힘들게 했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렸을, 젊은 시절의 엄마는 속상한 일이 참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면 "네가 아들이었으면 엄마가 이렇게 살진 않을 텐데..." 함께 입버릇처럼 내뱉으신 말이 있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더니..."




어렸을 때부터 나는 그 속담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가지가 많아 바람 잘 날 없는 그 나무에서, 내가 엄마에게 어떤 희망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줄 수 있는 '그 어떤 희망'은 중학생이 될 무렵 찾을 수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보는 첫 시험인 반배치고사에서 내가 얼떨결에 전교 2등을 한 것이다. 초등학생 때는 시험을 보고 전교에서 등수를 매기는 일이 없으니 '경쟁'하고 '순위'가 매겨지는 일은 없었다.


그저 100점을 받거나 선생님이 써주신 좋은 멘트를 보여드리면, 엄마가 방긋 웃으며 칭찬해주시니 잠깐 뿌듯했던 게 전부였다.



그런데 처음으로 등급이 매겨진 딸의 순위가 마음에 드셨던 건지, 부모님은 내 생각보다 훨씬 기뻐하시며 칭찬을 해주셨다. 그리고 나는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다.



 '나도 쓸모 있는 자식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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