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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버 Aug 29. 2021

23살 서울지검으로 출근합니다


서울 지방검찰청으로 첫 발령을 받았다.

다행히 지방에서 올라온 이들을 위해 관사로 쓰이던 아파트가 있었고, 나는 연차가 5년 정도 차이나는 선배와 같은 곳을 사용하게 되었다. 거실 겸 주방, 화장실 1개, 방 2개인 아파트에서 각자 방 1개씩 나눠 쓰는 구조였는데, 아주 독립적이진 않지만 개인방이 있으니 생활하기에 크게 불편함은 없었다.


아무래도 회사 사람들만 모여사는 아파트가 불편해 따로 원룸을 구해서 생활하는 동기도 있었지만, 서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게 있던 지방 토박이인 나에게는 왠지 모를 무서움보다는 불편한 게 나았다.




출근 전 주말, 엄마와 이삿짐을 싣고 서울로 올라왔다.

방 하나에 들어갈 짐만 챙겨 왔음에도 엄마와 둘이 정리하는데 꼬박 이틀이 걸렸다.


'이제 내일이면 나는 서울지검으로 첫 출근을 하고, 엄마는 집으로 내려가겠구나'

왠지 모를 떨리는 마음에 엄마 손을 꼬옥 잡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옆 방 선배님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후다닥 씻어야 한다는 생각에 최대한 빠르게 샤워를 하고 나왔다. 내가 준비하는 모습을 옆에서 흐뭇하게 지켜보던 엄마에게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하는데, 퇴근하고 오면 엄마가 없을 거란 생각에 마음속에 울컥하고 뭔가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티비에 나오던 지옥철이란 게 이런 거구나'를 느끼며 불편한 정장에 불편한 구두를 신고 불편하게 사람들 틈에 끼여서 겨우 도착했다. 까만 정장 인간들 사이에서 나도 자연스러운 척 검찰청으로 걸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발령받은 XX 사번 클로버입니다!"




임용 연락받으며 들은 설명대로 1층에서 출입증을 받은 후 인사부서로 향하는 길에, 눈에 보이는 사람마다 이렇게 인사했다.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기계처럼 인사만 했다.


첫 출근이라 8시가 되기도 전에 도착한 터라, 인사만 몇십 번을 하고 나서야 인사담당 A선배님을 만날 수 있었다.



[A선배] "오~ 너구나? 반갑다. 나는 XXX야"
[나] "안녕하십니까, XX 사번 클로버입니다!"
[A선배] "어 그래~ 먼저 근무하고 있는 네 동기한테 얘기는 들었어. 총무팀에 네 동기 한 명 있어. XX라고 연수원 동기라며, 알아?"
[나] "이름만 들어보고 대화를 해보지는 않았습니다"
[A선배] "그래? 걔는 너를 잘 알던데? ㅋㅋㅋ"
[나] "??? 아... 넵"



뭔가 실수한 건가? 친하다고 했어야 했나?? 

머릿속이 멍한 상태로 대화를 하는데 인사계장님이 들어오셨다.



[선배] "오셨습니까 계장님, 이 친구가 이번에 임용된 클로버랍니다"

[계장님] "아 그래? 반가워. 인사계장이네"

[나] "안녕하십니까, 오늘 발령받은 XX 사번 클로버입니다!"



인사계장님까지 뵙고 잠깐 앉아있으라는 선배 말에 구석 자리에 막대기처럼 앉아있으며 생각했다.

'나는 어느 부서로 가는 걸까? 떨린다'



계장님과 얘기를 마친 인사담당 선배가 다가왔다.

[선배] "시보! 아, 너는 지금 정식 공무원이 아니라 시보인 건 알지? 시보기간에는 잘릴 수도 있는 거다?"
[나] "... 아 넵!"
[선배] "너 인사계에서 근무할 거고 네 자리는 저기야"
[나] "?????"



대부분의 동기들이 실전 경험을 쌓는 사건과, 집행과, 공판과 등으로 발령이 나거나 스텝부서라면 총무 쪽으로 발령이 나는 게 보통이었다. 승진심사를 하는 인사부서에서 신입이 할 일은 별로 없었다.





같은 층에 있는 부서들을 돌며 수십 번 '안녕하십니까' 꾸벅거린 후 조직도를 익히는 와중에 오전이 금세 지나갔다. 점심시간이 되었고 "시보, 밥 먹자"라는 말에 쫄래쫄래 따라가서 도착한 백반집.


"너 총은 사 왔어?"

"아니요..."

"그거 안 사 오면 어떡해? 응?!"

"죄송합니다....."


이와 같은 식의 대화와 간단한 호구조사(?)를 받으며,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전화받는 법, 복사하는 법과 잔심부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에 호기심 가득한 표정의 A선배가 다가와서 말했다.


[선배] "너 누가 인사부서로 오게 했는지 알아?"
[나] "아니요"
[선배] "ㅋㅋㅋ나야. 네 동기한테 너 예쁜지 물어보고~ 예쁘다길래 내가 인원 필요하다고 국장님한테 말했어ㅋㅋㅋ"
[나] "아.. 동기가 그렇게 얘기했군요"
[선배] "ㅋㅋㅋ인사부에 신입은 처음이야. 우리가 곧 인사철이라 엄청 바쁜데 인원 충원이 안돼서 받은 거니까 열심히 해라~"



장난기 많은 선배의 농담에도 뻣뻣하게 굳은 표정의 나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로봇처럼 대답했다.


퇴근시간을 알리는 음악소리가 나오고 책상 정리를 하는 옆 부서의 소리가 들렸다. 보수적인 집단에서도 초! 보수적인 인사부 선배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30분쯤 지나자 계장님이 저녁 먹으러 가자며 일어나셨고, 내 쪽을 향해 말씀하셨다.



[계장님] "클로버도 저녁 먹고 갈래? 구내식당에서 저녁 줘~"
[나] "아니.. 괜찮습니다"
[계장님] "아 그래? 그럼 퇴근해 이만~"



구내식당으로 가시는 계장님을 따라나서던 장난기 많은 선배가 갑자기 고개를 쑥- 내밀더니 말했다.


[A선배] "시보! 계장님이 저녁 먹을래? 이러면 네~하고 따라가는 거야!"
[나] "아.. 죄송합니다"
[A선배] "잘해라~"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던 나는 선배의 어이없다는 웃음 섞인 한숨소리를 들은 후 '망했다...'는 생각을 하며 퇴근했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마치 세상에 혼자 남은 것처럼 외롭게 느껴졌다. 터덜터덜걸어 관사로 들어오니 먼저 퇴근한 선배의 티비소리가 들렸고, 나는 방으로 조심조심 들어갔다.



엄마가 가셨다.



방으로 들어오니 왠지 모를 외로움에 가슴이 찡-한 기분이었다. 침대에 기대앉으니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옆을 돌아보니 간이 화장대 위에 엄마가 써놓은 쪽지가 올려져 있었다. 엄마한테 처음으로 받아본 손편지였다. (이삿짐 견적서 뒷면에 짧게 적힌 글이지만 아직까지 고이 간직하고 있다)


'우리 딸, 엄마는 우리 딸이 너무 대견하다'라는 첫 문장에 눈물이 핑 돌더니,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는 엉엉 울어버렸다.



"엄마, 엄마 딸... 첫날부터 망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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