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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버 Sep 14. 2021

너 꿈꾼 거 아냐?


아침에 눈을 뜬 나는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누워 눈을 끔뻑 거리며 천장만 바라보다가 생각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 생각은 '의문'이 아니었다. 처음 겪는 일에 대한 당황스러움과 왠지 모를 무서움이었다.



킁킁-

오바이트한 토사물이 묻은 옷을 그대로 입고 침대에서 잠들었는지, 내 몸에서 역한 냄새가 올라왔고 '현실'을 깨닫고 빨리 씻고 싶어 졌다. 샤워를 하고 나와 다시 멍하니 방 안 침대에 누워있는데, 같이 브런치 하자는 옆방 선배의 말에 거실로 나왔다. 멍-한 표정의 내가 이상했는지 걱정스레 물어보는 선배에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회식자리에서 술을 많이 먹어서 속이 안 좋다고 둘러댔다.





주말 내내 방 안 침대에 누워 천장만 보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월요일이 돼서 출근하는 아침.

출근 준비를 하는 내내 나쁜 짓이라도 한 사람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안녕하십니까~" 인사하며 사무실로 들어가니 "그래~어서 와"라는 선배들의 일상적인 대답과 평소와 똑같은 사무실 분위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한 평범한 월요일이었다.


'별 일 아닌 건가?'라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숨이 안 쉬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폐가 쪼그라들어 정상적인 호흡이 안 되는 느낌? 여러 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다가 조용히 일어나 여자 선배에게 차 한잔하자고 말했다. 


사람이 없는 창고로 들어갔다.


[선배] 무슨 일 있어?
[나] 저.. 그날 택시 탔던 기억이 없어서요. 선배님이 불러주신 거예요?
[선배] 응. 나랑 XX선배가 기사님한테 관사 주소 말하고 요금도 미리 내고 너 뒤에 태웠지~ '잘 부탁한다' 말씀드렸는데? 무슨 일 있었어??



나는 택시 안에서의 일을 얘기했고, 눈이 휘둥그레진 선배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야?! 분명히 주소 얘기하고 요금까지 미리 줬는데! 목적지를 모르면 택시가 왜 출발을 했겠어,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해"





사무실로 돌아와 앉아있는데 A선배가 평상시와 똑같이 장난스럽게 대화를 걸었다.


얼마 안 된 기간이었지만 A선배는 당시 내가 가장 믿고 존경하는 선배였다. 

그리고 그날 회식에 참석하라며 주최(?)한 분이었기에 얘기를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는 그날 있었던 일을 최대한 일목요연하게 얘기했다.


선배는 "... 강간이야, 성추행이야?"라고 먼저 물었고.

성폭행은 아니라는 답에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A선배는 살짝 쓴 미소를 짓더니 뜻밖의 말을 했다.


"너 꿈꾼 거 아냐??"



너무 예상 밖의 말을 들으니 머릿속이 하얘지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눈만 동그랗게 뜨고 선배를 쳐다봤다.


'중간중간 필름이 끊겨서... 나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은 마음과 왠지 모를 배신감이 동시에 들었다.


나는 확실히 꿈은 아니었다며 찢어진 스타킹, 실제 옷에 가득 묻어있던 오바이트 흔적, 경찰관과 나눴던 대화 등 기억나는 부분을 차근차근 얘기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그 남자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기에 "일단 알겠어"라며 나를 자리로 돌려보냈다.






어느덧 퇴근시간이 되어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침대에 몸을 기대고 멍하니 앉아있는데 동기 B가 생각났다. B는 어설픈 나를 친동생처럼 챙겨주던 동기 오빠였는데, 일도 잘하고 사회성도 좋은, 내가 생각하는 성숙한 사회인의 표본이었다. 한참을 핸드폰만 만지작 거리던 나는 B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오빠"
[동기 B] "응~뭔 일 있냐?"


한참을 머뭇거리다 답답한 마음을 쏟아내듯 말했던 것 같다.



여자 선배에게 말하지 못했던 것들도 왠지 동기 B에게는 말할 수 있었다. 같은 관사에 살고 있던 그는 바로 내가 있는 층으로 와주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멍청하게 서있던 나를 잡아끌어 관리사무소로 향했다.



관리사무소에서 CCTV를 확인하니 그날 새벽, 택시에서 내려 비틀비틀 걸어가는 내가 보였다. 그리고 요금과 청소비도 받지 않은 택시기사가 담배를 피어 무는 모습이 뒤이어 보였다. 택시기사는 터덜터덜 걸어가는 내 뒷모습을 꽤 오랫동안 빤-히 쳐다보며 담배를 피고는 이내 사라졌다. 



CCTV를 보는데 등골이 오싹했다. '술에 취한 20대 여성, 결국 변사체로 발견'  어디서 본듯한 사회면의 기사 제목이 떠오르고, 공부할 때 배웠던 판례들이 생각났다. '내가 운이 좋았던 건가?'라는 생각에 왠지 모를 안도감까지 들었다.


술에 취해 떡이 되어서는 혼자 위험하게 택시를 타?
여자가 조심성이 없네 쯧쯧..




아무도 내게 직접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수없이 봐왔던 댓글들이 갑자기 머릿속에서 튀어나왔다. 그런 생각이 들다니, 내가 나를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땐 몰랐지만 그 생각들이 내 발목을 잡았다.





안타깝게도 당시 관사에 있던 CCTV 화질은 그다지 좋지 못했고, 어두운 새벽에 가로등 불빛과 택시 라이트 조명까지 반사되어 번호판을 정확히 확인할 수 없었다. 큰 수확 없이 관사로 돌아가는 길, 나와 B는 생각했다.

'분명히 이상하다. 너무 이상해.'


뭔가 찝찝한 마음이 가시지 않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렇다고 여자 선배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다고 믿었다. 동기 B가 말했다.


"일단 들어가서 쉬어, 내가 도와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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