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클로버 Sep 23. 2021

착한 사람에게도 때때로 불행은 찾아온다

하물며 '나'는?


당시 나는 신분은 검찰 '수사관'이지만, 갑자기 훅-들어온 '첫 사건' 이자 '내 사건'에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동기 B는 달랐다.


검찰청에는 사건기록 송치를 위해 매일 경찰들이 드나드는데, 이들과 자주 마주치던 B는 안면 있는 형사에게 CCTV에 찍힌 택시 사진을 슬쩍 건네며 물어보았다.


사진 속 택시 번호판을 읽어보려 한껏 미간을 찌푸리던 형사는 결국 "정식으로 사건 접수해보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고 했다. 



[동기 B] "우리 둘이 이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못 알아낼 것 같아. 정식으로 사건 접수하자"
[나] "응, 고마워"
[동기 B] "그리고 너희 팀 XX선배 연락 왔는데.. 나한테 나대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네? 난 괜찮으니까 너는 무슨 말 들어도 사건 접수 꼭 해, 알았지?"



팀에서는 그 누구도 나에게 '그 일'과 관련된 얘기를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마치 내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는 듯 선배들은 모두 일이 바빠서인지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동기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얘기를 전해 듣자 왠지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득 될 것 없는 동기의 고민을 공유당한(?) 죄로 아직 신입인 동기가 괜한 일에 휘말린 것 같아 너무 미안했다. 미안해 어쩔 줄 몰라하는 나에게 그는 얘기했다.



너는 너만 생각하면 돼





영화처럼 주변의 말에 억눌리지 않고 정식으로 사건 접수해서 사이다스러운 통쾌한 결말을 맞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영화에서는 정식 사건 접수보다는 그들만의 비밀수사를 하는 경우가 많지만)


하지만 나는 영화에 나오는 수사관이 아니라 '용감한 피해자'도 못 되는 여자였다.

 

나는 나를 창피해했고, 나를 비난했다.

마치 내가 주요 피의자라도 되는 것처럼, 남에게는 하지도 못할 심한 말들을 '나'에게 쏟아부었다. 



집에서는 똑 부러지는 딸이었고, 학교에서는 나름 똑똑한 학생이라 평가받았다. 그런데 사회에 나와 부딪친 내 모습은 그야말로 찌질하고 자존감은 바닥인 겁쟁이에 헛똑똑이였다. 뿌리가 너무 얕아 약한 바람에도 이리저리 휩쓸려 쓰러질 것 같은 앙상한 나무 같았다. 그동안 내가 읽었던 수많은 자기 계발서들의 교훈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결국 나는 선배들의 의견에 따랐다.

티오가 잘 안 나고, 가고 싶은 사람이 많아 경쟁이 치열한 지역인 본가가 있는 관내.

다음 인사 때 그곳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말에 나는 입을 닫았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앞으로를 생각하자!'와 같은 현실적이고 영리한 결정 같은 게 아니었다.

사건 접수로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는 것도 무섭고, 그저 지금 상황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 숨어버린 것이다.

 

(결국에는 바로 고향으로 가지도 못하고 애매한 지역으로 튕겨져 개고생 한 것이 고구마 같은 나의 서울살이의 끝이다.) 





그날과 비슷한 악몽을 꿀 때마다 생각했다.

'도망치지 말 걸, 그때 정식으로 사건 접수할걸'

그런데 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내가 정말로 후회하는 건 그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은 외부에서 찾는 게 맞았다.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며 여자 후배에게 술을 강요하는 조직문화, 술에 취해 쓰러진 후배를 택시에 혼자 태워 보낸 무책임한 선배, 방관한 택시기사와 욕정에 미친 남자.



하지만 그때의 나는 문제의 모든 원인을 나에게서 찾으려 애쓰며 나를 부끄러워했다. 

내가 나에게 가장 모진 말을 하고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었다.


'내가 기분 나쁠 일이 맞을까?' 라며 내 감정까지 남의 판단에 기대어 생각했고, 내 마음은 들여다보지도 않고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에 관심이 쏠려서는 스스로에게 피해자 다움을 강요하고 있었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 김수현 작가


시간이 흐르고 그때를 마주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나서야 진짜 나를 힘들게 한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힘들었던 이유는 그런 일을 겪었다는 '사실' 자체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나쁜 일은 일어날 수 있는 거니까



나는 모든 문제를 내 탓으로 돌리고는 그저 숨고 도망치며, 나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으로 대처했던 그때의 나 자신으로 인해 더 오랫동안 힘들었던 것이다. 제때 해소되지 못한 감정은 찌꺼기처럼 남아 참 오랫동안 내 마음속 구석구석에 들러붙어있었다.





우리가 과거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진단하는 것은 그 과거에 머물러 뒤늦게 보상받기 위함도 아니고, 자기 연민에 빠져 비운의 공주님 취급을 받기 위함도 아니다.
그 고리를 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본문 中>



서툴고 약했던 과거의 나에게 운수 나쁜 일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어떤 형태로든 불운은 나에게 찾아올 수 있고, 또다시 나는 흔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의 경험과 생각들을 그저 흘려보내며 한탄하고 회피하지 않고, 차근차근 스스로 정리해서 감정적으로 해소하고 '나 자신'을 알아간다면.. 조금은 단단하고 어른스럽게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전 13화 너 꿈꾼 거 아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