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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버 Sep 05. 2021

검찰청 얼굴마담이 입술주를했다


임용된 후의 내 생활은 술. 술. 술이었다.

연차별 선배들과의 대면식, 팀 회식 등 많은 회식들이 이어졌고, 내 주량을 정확히 알지 못했던 나는 다행히도 꽤 잘 마시는 편임을 알게 되었다.


폭탄주와 잔 돌리기는 검찰청의 문화이고, 술자리에서만큼은 여자도 예외 없다 는 말에 나는 주는 대로 꿀떡꿀떡 잘도 마셨고, 술 먹고 노래방 가는 코스가 불편했지만 이것도 사회생활의 일부라 생각하며 그럭저럭 따라다녔다.



그런데 입사 후 시보 딱지를 떼기도 전에 문제가 생겼다.




인사팀은 인사계장, A선배와 직속 사수를 포함한 남자 선배들과 여자 선배 1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소위 말하는 잘 나가는 에이스들만 모아놓은 집단이었다. 


일 잘하는 것은 기본이요. 인상 좋고, 말 잘하고, 술도 잘 마시는. 겉으로 보기에 완벽하게 사회생활을 해내는 사람들. 그 이면에는 야근과 주말출근을 불사하며 회사에 몸 바쳐 일하며, 윗사람에게 싸바싸바(?) 잘하고 능구렁이 같은 면도 가지고 있는.


그중에서도 처음 입사했을 때부터 나를 이름보다는 '시보'라고 부르던 A선배는 아무것도 모르는 내 눈에도 실세처럼 보였다. 호감형 얼굴에 경상도 사투리가 매력적이고 두루두루 친한 사람이 많아 보이는 선배였다. 유일하게 성별이 같은 여자 선배와 직속 사수도 있었지만, 내가 사무실에서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었고 나도 모르게 내적 친밀감 같은 게 높아졌다.





여러 술자리 중 인사팀 특성상 접대성 술자리가 종종 있었는데 나와 여자 선배는 얼굴마담처럼 불려 나가는 때가 있었다. 그날은 금요일 저녁이었고, A선배가 중요한 분들과 저녁 약속이 있다며 여자 선배, 직속 사수 선배, 나 이렇게 차출했다. 퇴근 후 청사 후문 쪽에 모여있는데 연차가 높은 왕선배 2명이 다가왔다.



'넌 뭐야?'라는 듯 나를 쳐다보는 왕선배의 눈을 읽었는지 A선배는 "이번에 임용된 XX 사번 신입인데, 인사팀에서 잠깐 데리고 있어요. 예쁘죠?"라고 말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보던 왕선배는 "쓸만하네."라고 답했다.



차를 나눠 타고 꽤 거리가 있는 한정식집에 도착했고 언제나처럼 대화 내용을 흘려들으며 가만히 앉아있었다.

여러 회식자리를 다니며 마시는 척 버리는 기술을 익혔지만, 식당 조명은 너무 밝았고 인원은 적었고 왕선배는 바로 내 앞자리에서 매의 눈으로 나를 보며 앉아있었다. 적당히 조절하자 싶어 조금씩 나눠마시고 있었는데, 내 앞자리에 앉은 왕선배가 큰소리를 쳤다.



[왕선배] "야! 너 입술주하냐?!"  
[나] "아, 죄송합니다"
[A선배] "아잇 선배님 얘가 아직 뭘 몰라서 그래요, 야! 시보! 선배가 따라주신 잔을 누가 그렇게 마시래?!"
[왕선배] "아이 XX, 술맛 떨어지게! X 년이 블라블라..."


※ 입술주 : 술잔에 입술만 살짝 적시듯 홀짝 거리는 것


회식자리에서 그렇게 진심으로 쌍욕을 하며 화를 내는 사람은 처음이었고,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져 얼굴을 잘 쳐다보지도 못했던 나는 손이 덜덜 떨렸다. 그 뒤로 나는 왕선배가 주는 술을 모두 받아마셨고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택시 뒷자리_ 내 옆에는 한 남자가 앉아있었는데, 그 남자도 만취상태였는지 내 스타킹을 벗기려다 거의 찢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앞자리에 운전하고 있는 택시기사의 무심한 눈이 백미러를 통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경찰서 앞이었다. 

내 옆에 있던 남자는 사라지고 뒷좌석에는 나 혼자였다.




  "아가씨! 정신 차려요~! 집이 어디예요?" 



경찰관이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행선지를 말 안 해서 택시기사가 나를 경찰서 앞으로 데려왔다며, 집이 어디냐며 짜증스러운 말투로 재차 물었다.


'아까 분명히 나 태우고 운전 중이었는데... 행선지를 모른다고?'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뭔가 이성적인 판단이 잘 안됐고 겨우 관사로 쓰이는 아파트 이름만 말했다.





관사로 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엄청난 양의 토사물을 쏟아내며 구토를 했고; 택시 뒷자리와 내 옷은 엉망이 되었다. 관사 입구에 도착하여 비틀비틀 택시에서 내리는데 택시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껏 오바이트를 하고 택시에서 내려 차가운 밤공기를 맞고 살짝 정신이 들자 '뭔가 이상한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택시기사는 택시비나 세탁비를 내라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비틀거리며 걸어갔고 뒤이어 내린 택시기사는 담배를 한 대 피어물고는 가버렸다. 방에 들어온 나는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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