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어를 배우던 시절, ‘짜이옌옌’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저 태국어 교재에 나오는 생활 표현쯤으로 생각했다.
태국어 '짜이'는 '심장, 마음'이라는 뜻이고, '옌'은 '차다, 시원하다'는 뜻이니 이것을 직역하면 마음을 차갑게 식히다, 즉 ‘진정해’, ‘마음을 가라앉혀’ 라고 번역되는 사실이 참 직설적이고도 재미있다고만 어겼다. 그러나 이 말이 훗날 태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장 중요한 주문이 될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었다.
나에게 애증의 태국어를 고르라면 망설임 없이 두 단어를 고른다.
첫 번째는 마이뻰라이(괜찮아), 두 번째가 바로 짜이옌옌(진정해)이다.
외국인으로서 태국에 살다 보면 피할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이민국 업무다. 비자 발급과 갱신은 물론이고 비자를 소지하고 있어도 90일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체류 신고까지, 외국인의 시간은 주기적으로 이민국으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 기한을 놓치면 벌금이 부과되고, 자칫하면 원치않게 불법체류자의 신세까지도 되버리니 잊어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일인 것이다.
주재원 가족인 경우는 비교적 상황이 나은 편이다. 주재원 본인은 비즈니스 비자, 그 가족은 동반비자를 받고 회사에서 대부분의 절차를 챙겨주기에 어려운 비자업무를 외국인인 나 혼자 처리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고 일이 간단한 것은 아니어서 이민국에 동행만 해도 반나절이 훌쩍 지나가거나 하루를 통째로 써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문제는 주재원이 아닌 경우로, 학생비자나 기타 비자를 직접 처리해야 하는 경우이다. 준비해야 할 서류는 많고, 이민국 담당자에 따라 요구하는 것과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 분명 지난번에 문제없던 서류가 이번에는 부족하다고 하면 영락없이 누락된 서류를 다시 복사해서 첨부하거나, 누락된 서류를 다시 준비해야 해서 하루 만에 끝날 줄 알았던 일이 며칠로 늘어지는 건 흔한 일이었다.
비자의 종류도 만만치 않았다. 한 번 출국하면 비자가 취소되는 단수 비자와 여러 번 출입국이 가능한 복수 비자가 있는데, 장기 체류자라면 반드시 복수 비자를 신청해야 한다. 이걸 놓치고 출국했다가 돌아오면 비자는 취소되고 모든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밟아야 한다. 이 저주와도 같은 실수가 우리에게도 벌어졌다. 막내아들의 일이 그랬다. 여권 기간이 만료를 앞두고 있어서 새 여권을 발급받고 기존 비자를 새 여권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남편 회사 직원의 실수로 복수 비자 신청이 누락되었다. 그 사실을 모른 채 학교 트립을 다녀온 뒤 비자가 취소되었고 그 일을 바로잡기 위해 우리는 꽤 오랜 시간과 적지 않은 비용, 그리고 그보다 몇 배는 더 큰 스트레스를 치러야 했다. 그때는 정말이지 ‘외국인의 설움’이라는 말을 온몸으로 체감했었다.
파타야는 관광특별자치구라는 이름에 걸맞게 외국인이 넘쳐나는 도시다. 그렇다보니 파타야 이민국(행정명 촌부리이민국)은 늘 북새통이다. 번호표를 뽑기 위해 서는 줄은 놀이공원 대기 줄을 방불케 하고 업무 시작 시간 전에 도착해도 점심시간을 넘겨서야 겨우 차례가 오는 날도 많다. 누락된 서류를 복사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복사를 한 후 다시 맨 뒤에서부터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이민국에 갈 때는 가능하다면 동행자와 함께 가는 것이 수고와 스트레스를 그나마 덜 수 있는 노하우라 할수 있다.
이민국의 그 긴 줄 속에서, 이민국 공무원의 냉담하면서도 위협적인 태도에서, 일처리의 비효율에서 극도로 화가 난 외국인들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장면이다. 소리를 지르고 항의하고 따지는 모습도 낯설지 않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말은 늘 같다.
"마이뻰라이."
"짜이옌옌."
화내봐야 너만 손해라는 뜻이다.
태국은 지난 10년 동안 여러 면에서 눈에 띄게 발전했다. 도로도, 건물도, 시스템도 많이 달라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행정서비스만큼은 좀처럼 속도를 내지 않는다. 이민국에 갈 때마다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유난히 또렷해지고 그럴수록 내 나라, 내 언어, 내 시스템이 너무도 그리워지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