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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NY May 24. 2024

진화심리학적 관점으로 접근한 불교

느낌은 환영, 실체 없는 나

1. 명상하는 진화심리학자

  진화심리학 전문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로버트 라이트'는 성인 ADHD로 인해 다른 사람들 보다 주의집중력이 떨어지며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쉽게 분노를 표출하는 불 같은 성격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 2003년 여름, 명상 수행 캠프에 자원한다. 매사추세츠바에 있는 통찰명상회에서 주관하는 7일간의 명상 수련회에 참여한 그는, 매일 5시간 반씩 행하는 좌선과 걷기 명상, 하루 세 차례의 묵언 식사와 가벼운 소일거리를 하며 명상의 효과가 어떤 것인지 몸소 체험하게 된다. 명상에 의한 마음과 몸의 변화를 단순히 정신의 평안과 안정적 부분에 귀결하는 일반적 내용과 다르게, 그는 전문적인 불교 용어를 일방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불교와 진화심리학을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명상의 효과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다. '공()'과 '무아(無我)'의 '실체가 없음'에 관한 진리를 진실로 이해하기 어려운 요인은 무엇인지, '매트릭스에 사는 삶'의 직시가 어려운 이유를 진화심리학적 관점에 서서 그 핵심을 날카롭게 꿰뚫는다. 


2. 괴로움과 깨달음은 하나


  불교의 가르침은 행복을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 불교는 무작정 행복을 먼저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에 먼저 초점을 둔다. 불교가 추구하는 특별한 앎, 지혜를 얻는다는 의미는 '고통'의 정신적 기제를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 고통을 알아야 고통을 피할 수 있다는 불교적 통찰은, 상당히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번뇌 즉 보리(煩惱卽菩提)'라 하여 괴로움과 깨달음을 연기적 관계로 보고 차별을 두지 않는 점에서 보면 '고통'과 '고통이 사라진 상태'는 양면의 동전과도 같다. 불교에서 말하는 괴로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통상 삼법인(三法印)을 모르는 상태에서 비롯된다고 이해하면 된다. 삼법인은 초기 불교 교의를 요약한 핵심으로,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의 내용이 있다. 모든 대상은 생성하고 멸하는 물리적 법칙에 따라 영원하지 않고, '나'라고 여길 만한 본질은 없으며,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괴로운, 이 세 가지의 변하지 않는 진리를 터득하면 괴로움이 와도 2차, 3차 고통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가르침을 모르고 살면 괴로움의 상태에서 덫에 빠질 위험이 언제든 도사린다. 저자는 '형상 없음'과 '나라는 실체가 없음', '현실 세계는 고통'의 접근을 가로막는 요인에 대해, 각각 '본질을 추구하는 본능', '움직임을 통제하는 자아가 있다는 착각', '느낌에 기반한 잘못된 판단'에 대응하여 설명한다.


3. 환영을 만드는 느낌에 의한 '일체개고()'


  불교에서 '느낌(Vedana)'은 매우 중요하다. 감각기관으로 받아들인 대상에 집착하게 되는 원인을 '느낌'으로 보기 때문이다. 느낌에는 세 가지가 있다. '좋은 느낌', '좋지 않은 느낌', '좋지도 좋지도 않은 느낌'으로, 12 연기에서는 느낌 다음에 대상을 가지려는 욕구(受), 대상을 붙들고 합일이 된 상태(), 애(受)와 취(取)에 의해 변화가 생겨버린 마음의 습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로 전전하며, 고통 속에 빠진다고 본다. 불교를 배우다 보면, 느낌은 고통을 유발한다는 말을 자주 듣기 때문에 느낌은 나쁜 거다라는 편견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진화심리학적 입장에서는 '느낌' 자체를 나쁜 것이라고 정의하지 않는다. 인간은 '느낌'을 통해 나에게 이익이 되는 대상인지, 해로움을 끼치는 대상인지를 판단하고, 생명체가 대상에 다가가거나 피하는 등의 옳은 선택을 내리게 해주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분명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느낌이 문제인 것일까. 


  진화심리학자들은 행동과 생각, 선택, 판단과 같은 인간의 고도의 정신작용이, 사실 우주의 비밀을 밝혀내거나 도덕적인 행동과 같은 고상하고 대단하고 세련된 일을 하기 위해 발달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사실 인간의 뇌는 좋은 유전자를 퍼트리기 위한 목적으로 자연선택을 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자연선택은 '좋은 유전자 전달하기'위해 '느낌'이라는 수단을 사용한다. 자연 속에서 뛰어다녔던 선조들은 생존과 번식도움이 되는 상황과 대상을 찾으러 다닐 '느낌'에 전적인 도움을 받았다. 목숨을 위협하는 존재는 피해야 했고, 구하기 힘든 당보충을 충분히 해줘야 했으며,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환경이 많이 바뀌었다. 현대 사회에는 전쟁이 아닌 이상, 무기를 들고 싸우거나 들짐승들을 잡아서 먹을 일이 없다. 원시시대처럼 나를 지키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화를 내거나, 죽이는 행동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당이 귀했던 옛날 사람들한테는 단 음식이 영양식이었지만, 그렇다고 단 음식을 막 먹으면 바로 당뇨병 직행일 것이다. 우리 몸에서 '느낌'이 발생하는 기저에는 아직도 고대 사람들의 생활 패턴에 맞춰져 있는 부분이 있다. 


   좋은 유전자 전달하기 - 자연선택 - 느낌 - 잘못된 선택과 판단


  과거의 자연환경에서 살았을 때와 깊은 연관이 있는 '느낌'이 매번 나에게 옳은 판단을 제공해 줄리가 없다. 좋은 유전자를 자연선택하는 과정에서 '느낌'은 '환영'을 유발하여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밧줄을 뱀으로 착각하게 하거나,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거나 따라오는 듯한 불안감에 휩싸이게 만들거나, 누구한테도 인정받지 못하고 버려지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 등, 실제보다 상황을 더 괴롭고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점에서 느낌은 현실을 진실되게 직시하는 것을 방해한다. 느낌에 따라 대상에 '좋고', '나쁨'이라는 라벨(Label) 붙여 판단을 내리고, '이로움'과 '해로움'이라는 실제적 본질을 대상에 반영하기 때문에 대상에 라벨이 잘못 붙여지는 경우에는 실상을 잘못 보는 결과를 초래하기 십상이다. 불교에서 '느낌(Vedana)'을 괴로움 발생의 중요한 원인으로 꼽은 데는 이러한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다. 


감각 - 느낌/쾌락 - 이끌림 - 갈망 - 불충족 - 고통(dukkha)


   쾌락의 느낌이 최대한 오래 지속되지 못하게 함으로써 더 큰 쾌락을 얻고자 하는 굴레는 형성된다. 쾌락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우리를 계속 불만족한 상태에 처하게 만든다. 결국 느낌에 대한 환영은 대상을 지속적으로 갈망하게 만들어 우리를 고통으로 안내한다. 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좋은 느낌 때문에 한 선택이 되려 피해를 주는 결과를 봐서도 우리는 알 수 있다. 도박과 마약에 의한 도파민 중독과 계속된 당 섭취로 인한 비만, 알코올중독 등 주변의 가까운 곳에서 느낌에 의한 갈망을 통제하지 못하면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들이 그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 문제만 봐도 좋은 느낌이 정말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내용의 중요한 내용만 꼽자면, 행복의 길로 가는 길 앞에서는 오히려 고통을 직면해야 하는 것, 나의 느낌이 언제나 맞을 수 없다는 것, 느낌과 감정은 영원하지 않으며 취하려고 했을 때 갈망과 고통의 크기가 더 커진다는 사실, 3가지가 되겠다.


4. '자아'를 통제하는 주체가 있다는 착각과 '제법무아(諸法無我)'


  '무아(無我)'를 자아가 없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불교전공자인 나도 순간적인 화이트아웃을 피할 수 없다. '나'가 없다는 것이 내 몸이 사라진다는 말인가?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접근한다. 그러나 불교는 사람을 미치게 할 목적으로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 절대로. 무아(無我)의 의미에 접근하는 3가지가 있다. 1) 시간적인 흐름에서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는 육체는 무상하다. 2) 몸이 특정한 상태로 되기를 원하지만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3) 불교적 관점에서 자아를 구성하는 5가지 요소인 (몸), (느낌), (형상), (행위),  (마음작용)을 각각 살펴보면 어느 것 하나 영원한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의 세 가지 내용만 숙지해도 좋다.


  '자아가 있다'는 말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오고 가는 여러 영향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유지되는 어떤 속성이 나에게 있다는 의미다. '자아'가 있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면, 자신의 이기적인 신념을 강화시키는데 일조하게 된다. 이는 곧 생로병사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죽음과 늙음을 피하고픈 마음으로 인해 허망하고, 우울하고, 공허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불교는 자아를 '통제'의 가능성과 연결 지어 설명한다. 내가 내 몸을 통제할 수 있다면 '자아'가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없는 것이다. 당연히 내 몸이니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또 그렇지 않다. 배가 아플 때 통증을 스스로 멈출 수 있나, 심장과 장기의 근육을 자유자재로 통제하여 멈출 수 있나, 심지어 생명과학에서는 심장과 장기를 '불수의근'(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근육)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절단 사고를 겪고 나서 생기는 환상통과 돌발 통증 때문에 고통받는 CRPS는 어떤가. 여기까지만 봐도 내가 내 몸을 제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나. 고로 무아는 '내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몸이라고 해서 나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불교에 대해 너무 이상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서 현실적인 안목으로 접근한 '불교는 왜 진실인가'는, 정곡을 따뜻하게 찌르는 부드러운 안내서라고나 할까. 과학과 마음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저자의 현대적인 통찰이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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