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전의 주인공은 시민이어야 할까 내빈이어야 할까
초기 한왕조에게 예법은 중요한 정도가 아니라 국가정체성 확보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500년 넘게 흩어진 전국이 통일 되어 하나의 국가가 되었기 때문에 정체성이 약했다. 서울, 부산,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각기 자신들끼리만 하나의 ‘나라’라고 인식했지 ‘대한민국’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다. 약한 정체성은 당연히 중앙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지고 반감은 반란으로 이어져서 다시 분열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예법은 중요했다. 상하간의 질서를 세우며 정체성을 공고히 하며 통치질서를 명확하게 했다. 예법은 국가에 대한 신뢰를 축적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소프트파워인 것이다. 국가의 정체성, 통일성과 같은 소프트파워의 중요성은 과거의 왕조나 현대의 민주국가에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예법이라는 것이 현대에 들어서는 의전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형태만 바뀌었지만 가지고 있는 중요성과 맥락은 비슷하다.
직업이 공무원이다보니 참 많은 행사를 보게 된다. 착공식, 준공식, 개관식, 출범식, 각종 축제 등등. 행사를 보면 의전의 모습은 약간씩 다르지만 의전을 통해 기획된 행사의 성격과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의전은 행사의 질서를 세우고 격을 완성하는 것이다. 때문에 준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손이 많이 가고 신경도 많이 쓰인다. 공식적인 의전은 통해 행사나 축제 프로그램 자체의 공식성을 확보하고 시민들에게 행정의 신뢰를 제공한다. 하지만 요새는 의전이 공식성과 신뢰성을 높이는 도구가 아니라는 느낌이 아니라 번잡하고 불필요하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많다. 특히 누군가를 돋보이게 하는 장식이 되어가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내부 공무원의 입장에서 보자면 더 그렇다.
그렇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행사에 참석하는 내빈들은 자신들이 주목받고 싶어한다. 정치인, 기업인, 행사관계자 등 대중에게 자신들을 내보이거나, 대중앞에 드러서는 사람들이기에 그런 경향이 강하다. 공무원은 행사가 시작되면 행사의 주체인 시민들을 신경쓰기보다 내빈들을 신경쓰는 경우가 더 많다. 내빈의 동선을 체크하고 자리 또한 잘 보이는 곳에 자리하게 한다. 소개를 할 때도 빼먹어선 안 된다. 만약 소개를 하지 못하게 되거나 중간에 예고 없이 방문한 사람이 있다면 행사 중간에라도 반드시 소개를 해야 한다. 자리도 직급이나 사회적 명예도에 따라 철저히 상하를 구분해야한다. 내빈들의 발언들도 미리 준비해야한다.
내빈들의 발언시간은 원래 5분이었는데 한참 길어질 때도 많다. 참석한 사람들은 지루해 하고 담당자는 속이타지만 중간에 끊을 수도 없이 애만탄다. 테이프 커팅 같은 행사를 하면 한 번 쓰고 쓰지도 않을 화려한 가위를 준비해야 하고 흰색 장갑도 정갈하게 놓아야 한다. 사진 촬영할 때 잘 나올 위치와 포즈들도 고민하게 된다. 만약 이 모든 것들 중 하나라도 실수하게 된다면 큰 일이 발생하게 된다. 실수가 생겨 소개하지 않은 내빈이 생기거나 자신의 사진이 잘 찍혀서 나오지 않으면 행사를 아무리 잘해도 나중에 질책을 받는다. 그래서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은 행사가 끝날 때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으며 다 끝나고 난 뒤에도 문제가 없었는지 노심초사 하는 경우가 많다.
주객전도가 벌어진 것이다. 당연히 주객전도가 되어 행사의 프로그램 자체보다 완성도에 영향을 준다. 행사의 프로그램이 완성도가 높아야 하지만, 저런 부분에 더 많은 신경을 쓰고 나머지는 예전처럼 비슷하게 ‘하던대로’ 진행하게 되는 것이다. 공무원의 업무 방식은 참신하고 괜찮은 방법보다는 안정적이지만 실수 없는 방식이 늘 선호된다. 그러다보니 내빈을 위한 과잉 의전이 시나브로 일상화 되어가고 있다. 얼마 전 한 지자체에서는 한 행사를 진행하는데 내빈 294명을 초청했다. 그런데 내빈 1명당 1명의 공무원을 지정하여 수행하도록 계획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해당 보도가 알려지자 비판의 목소리가 일었고 시민들에게 빈축을 샀다. 직원들 사이에서도 ‘불필요한 인력 동원’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결국 해당 지자체는 비판의 목소리를 의식한 듯 슬그머니 의전을 취소한다고 밝혔다. 만약. 언론과 시민들의 비판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정말 1대1 의전이 실행되었을 것이다.
이런 경향이 심해지다 보니 내빈이 아님에도 내빈처럼 대접을 받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시장은 행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람이 맞지만 시장의 부인은 민간인이다. 시장 부인이 행사에 참석하면 과장, 팀장, 주무관의 라인으로 구성된 시장의 부인의 의전을 담당한다. 심지어 해당 부서와 관련이 없는 행사에도 시장의 부인을 수행비서처럼 모셔야 했다.
시 관계자는 10년 전 만들어진 행안부의 ‘배우자도 공적 역할을 할 수 있다’가 근거로 모셨다고 한다. 시장의 배우자를 민간인이라고 하기에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장의 배우자들이 하는 모든 활동이 공적인 활동인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공적인 역할은 시장이 하는 것이지 시장의 배우자가 하는 것이 아니다. 공적인 역할을 하고 싶다면 본인이 공직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과잉의전을 보면 호가호위라는 말 외에는 떠오르는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