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를 읽고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고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가 생각난다. 카페는 어느 공원 옆 원룸 1층에 위치해 있었다. 사장님은 그 원룸의 주인이자 카페 사장이었다. 거의 40-50대로 보이는 사장님은 근면성실이 몸에 배어있는 분이었다. 아침이면 칼같이 가게에 나와 자신이 맡은 화장실 청소와 가게 주변을 정돈했다. 나는 그에 맞춰 커피기구들을 정리하고 행주를 빨고 바닥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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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반복적인 날이었지만 요새 사장님 원룸건물 세입자 중 한 아주머니가 자주 다녀가셨다. 그녀는 카페를 오픈한 초창기 때부터 사장님에게나 원룸이웃들에게나 항상 친절을 베풀었다. 키가 조금 큰 편에 단발 머리인 그녀는 단출한 옷을 선호했다. 오늘도 목이 늘어나기 시작한 티셔츠에 무릎을 크게 굽혀도 불편하지 않은 츄리닝 바지를 입었다. 그녀가 말을 할 때면 박하사탕처럼 시원했다. 그녀와 나는 대체로 책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 이런 저런 쓸모없는 이야기를 자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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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설거지거리가 있었지만 양이 많지 않아 신경쓰지 않고 그녀와 커피원두를 솎아냈다. 원두를 솎아내는 것도 내 일과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잠시 자리를 비우고 돌아온 사장님은 그 모습을 쓱 지나치셨다. 사장님과 나 아주머니는 서로 나름대로 말을 잘 섞는 사이였지만 그날따라 사장님은 함께 있는 모습이 썩 좋지 않았는지 설거지에 대한 야단을 진지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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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광경을 본 아주머니는 조용히 위층으로 올라가셨다. 나는 그상황이 머쓱해 사장님에게 죄송하단 말과 함께 설거지를 마친 후 혼자 커피원두를 다시 솎아냈다. 평소에는 그만한 설거지에 아무 말씀이 없던 사장님이 왜 그랬는지 커피원두를 솎아내며 생각했다. 우리셋(사장님, 나, 아주머니)보다 나와 아주머니만 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나름대로 사장님은 홀로 소외감을 느끼고 계셨던 것이다. 대화의 주체나 주제가 그녀와 나였기에 말이다. 즉 사장님은 혼자란 상실을 경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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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의 상실은 무엇인가를 잃은 것만이 아닌 어떤 기대와 바람이 섞여 더 큰 구멍이 생긴 상실이다. 자신도 함께하고 싶은 또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려 했던 기대가 있었지만 그러지 못해 생겨버린 상실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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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상실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서 느끼게 됐다. 젊은 여자와 남자, 중년의 여성, 선배와 그 애인 등 모두가 사랑 때문에 상실을 경험했지만 그전에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기대와 바람이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주인공인 와타나베가 수화기를 든채 너머로 들려온 ‘너 지금 어디야’에 ‘나는 어디에 있는가’란 질문으로 책이 마친 것처럼 우리에게 상실은 결국 자신에게로 질문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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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매일을 상실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어느 막연한 기대나 바람 때문에 현실에 충실하지 못한 채 바뀌지 않은 현재의 자신을 끊임없이 상실해가고 있지 않은가. 즉 상실이란 질문은 존재로서의 질문으로 넘어가게 된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느 과정에 놓여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로 말이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삶은 어떤 흐름에 뒤따라가기 마련이다. 생계의 문제가 직업으로 귀결되고 있는 현실에서 동일한 흐름에 뒤따르다 자신을 상실해버리는 시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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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는 현대에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