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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유진 Sep 25. 2024

불행하면 길어지는 일기장

일기의 역사

일을 잘린 지금

(그러니까 모가지가 꺾인 지금)


은재의 속에 살고 있는 푸름이

다시금 집을 지었다.

집을 짓고서

태연하게 은재를 초대하고

은재는 꽃을 들고 찾아갔다.


푸름의 파티는

다른 파티들과 다르게 무기력해서

은재는 얼굴을 책상에 붙이고

일기를 썼다.


오늘 푸름이 나를 초대했다.


로 시작하는 일기


그리고

푸름의 파티는 웬만큼 끝나지 않고,

일기도,

끝나지 않는다.


불행해지면 일기는 이렇게 길어진다.



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


초등학생 때 숙제로 쓴 일기를 제외하고

스스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때는

고등학교 2학년 11월 마지막 날이다.


그때 은재는

연말을 맞이해

하루 하루를 제대로 기억하고 싶었다.

허투루 하루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오래 전 선물로 받은 노트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첫 날의 일기는

'내일이 12월이라는 게 너무 슬프다고 느껴져서

한 줄이라도 일기를 써보려 한다'

로 시작해

'감자탕이 맛있었다'로 끝나는

시시한 내용이다.


이런 걸 왜 써두었을까 싶지만

당시 일기의 모토는

'사소한 것이라도 기억하자'는 것이었으니

이해하도록 하자.


은재는 몇 페이지를 더 넘겼다.


그러니 이후엔

일기장 속에서

누군가를 험담하기도 했고,

상처를 고백하기도 했고,

실수를 반성하기도 했고,

자제할 수 없는 것들을 기도하기도 했고,

미래의 나를 향해 약속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런 것을 보면

일기장은 은재에게 다분히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대나무숲과 같았다.


더욱이 당시 은재에겐

속 이야기를 할 만큼 친절하고 다정한 상대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오로지 은재의 문제다)


그리고 은재도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인데,

당시 일기장에

'우울하다'는 말이 자주 등장했다.

뭘 해서 우울하다.

뭐가 어때서 우울하다.

이런 것 때문에 너무 우울하다.



은재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우울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초기 상담을 받았을 때,

언제부터 우울감을 느꼈는지 물으셨는데

그때 버젓히 대답하지 못했던 것이 기억났다.

이 일기를 보았으면 대답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니 일기는

은재의 푸름에 대한 기록이다.


은재는 자신도 모르는 속도와 이유로

일이 그렇게 된 것에 꽤나 유감스럽지만

그건 불가항력이었다.

어쩌면 운명론적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행복하면 입이 바빠지고

불행하면 손이 바빠진다.

물론 이 경우 글을 좀 쓴다는 사람에 한에서만 해당되는 말이겠지만.


하지만 정말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행복할 때나 그저 그럴 때보다

불행할 때 글을 더 자주 쓴다.


행복할 때나 그저 그럴 때보다

불행할 때 글이 더 길어진다.


은재는 자신이 푸름에 갇혔을 때 썼던

수많은 일기와 수기, 그리고 소설들을 떠올렸다.


거의 대부분의 글들이 행복과 평소보다

불행과 우울과 슬픔을 뱉어내고 있었고,

더 불행할수록

더 우울할수록

더 슬플수록

문장은 많아지고 길어져 있었다.


왜 그럴까?

왜 우리는 불행할 때마다

긴 일기의 여정을 떠나는 걸까?


은재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푸름의 벽지로 둘러쌓인 공간에서

푸름의 노래가 나왔다.

푸름의 노래에 맞춰 푸름이 추는 춤은

너무 가녀리고 정적이다.


그 속에서

은재는 계속 일기를 썼다.

손이 멈추지 않아서

그러니까 쓰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손목이 너무 아팠다.


얘, 이제 그만 해.
다들 춤을 추고 있잖아.


옆에서 푸름이 말을 거는데

은재는 대꾸도 하지 않고 일기를 썼다.

그리고 불현듯 이런 문장이 생각났다.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역경이 없는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


그리고 이 문장이 떠오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일기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일기는 해피엔딩이고 말고가 없지만,

그 개념 자체가 없지만,

역경이 없는 일기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저 맑고,

그저 평탄한 일기는 단순히 기록일 뿐일 테고

재미가 없을 것이다.


이 사실을

아까 은재도 분명 느꼈다.

단순한 기록이었던

처음 쓴 일기는 크게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감자탕이 맛있었다'로 끝나던 일기)

심하게는 '왜 썼지, 저런 걸' 이런 생각도 들었으니까.

물론 일기를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거의 없고

(일기란 순간에 치중되어 있다고 은재는 생각한다)

누구에게 보여줄 리 없어

재미를 추구할 필요는 없지만 말이다.


아,

'일기를 보여준다'는 문장과 함께

떠오르는 재밌지만 소름끼치는 추억이 있다.

처음 만난 남자친구는

아무도 없을 때 은재의 집에 놀러와서는

은재가 쓴 일기장을 보려고 시도했었다.


일기장을 발견해서

180이 넘는 키로 은재를 압도하곤 했는데

그때 너무 악랄해 보여서 소름끼쳤던 기억이 있다.


그때 정말 화가 났었는데.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 상으론 은재가 울려고 했던 것 같다)

겨우 일기장을 빼앗았고,

마음같아선 그 자식을 발로 패고 싶었다.


일기는 개인적일 때에 비로소 날개가 돋는다.


그러니 모두 누군가의 일기를 알려고 하지 말기를.

일기는 언제나 개인적.

그 말을 기억하기를.


후하-


은재는 아침부터 쓴 자신의 일기에 마침표를 찍었다.

오늘은 이걸로 끝.

더 쓰지 말자.

일기에 너무 갇혀 있는 것도 별로니까.


그리고 은재는

일기를 쓰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몇 가지 팁을 전할까 한다.


1. 시간에 구애 받지 않기를
    > 언제든 일기를 쓰고 싶다면 쓰세요.
       '자기 전'이란 규칙도 너무 구식이라고 생각해요.

2. 분량에 집착하지 않기를
   > 한 문장이어도 좋습니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어가도 좋습니다. 

3. 아름다운 문장을 추구하지 않기를
   > 누구한테 보여줄 게 아니라면요.
      다만, 감각적인 묘사는 중요합니다!

4. 예쁜 글씨체로 써야 한다는 생각은 버리길
   > 이건 저도 부족한 부분입니다.
     겉보기에 집착하지 말고 의미에 집중합시다! 


그럼 모두 즐거운 일기 시간 되시길.


-올해로 9년 째 일기를 쓰고 있는

은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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