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실업자가 되다
재택 업무를 시작한 지 한 달,
은재는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한 차례 수정을 하고
코멘트와 함께
다음 수정 사항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게다가 은재는 어제 애인과 외박을 해서
늦은 오전까지 늦잠을 자고 있었고
(출근 해야 하는 애인과 함께 자면 기상이 늘 피곤하다)
회사 이름으로 온 메일을 보자마자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4개의 문단으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첫 번째는 수정 사항이 제대로 수정되지 않았다는 메시지였고,
두 번째는 두 번째 원고조차 요청 사항대로 작성되지 않았다는 메시지였고,
세 번째는 계약을 종료하고 싶다는 메시지였으며
네 번째는 이제까지의 원고를 폐기해달라는 메시지였다.
아, 정말 예감이 좋지 않았다니까.
그 말이 입밖으로는 나오진 않았지만
은재의 온 마음에 가득했다.
은재는 멍청하게 메시지를 들여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이후엔 수정 사항을 살폈다.
은재가 수정 사항을 지키지 못한 것이 맞았다.
하지만 두 번째 원고에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은재는 항의하듯 답장을 했다.
그리고 뒤이어 관계자는 은재가 어느 부분에서
자신들의 요청 사항에 응하지 않았는지
아주 장문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아주 꼼꼼한 설명이었다.
차근차근 읽어보니 업체의 계약 해지 통보가 납득이 갔고,
묘하게 느껴지는 친절함에 이전까지의 억울함이 사라졌다.
결국엔
은재가 요청 사항과 수정 사항을 불이행했고,
서로의 집필 포인트가 달랐던 것이다.
은재는 한숨이 턱턱 나왔다.
올해는 이 업무로 어떻게든 생계를 유지하려고 했는데.
이런 저런 계획까지 다 짜놓았는데.
몹시 우울했다.
그리고 드는 생각은 참혹했다.
어떻게 따낸 계약인데,
이렇게 한 달밖에 안 되어서 잘리다니.
모가지를 꺾이다니.
내가 조금만 더 잘 할 걸.
내가 조금만 더 신경 쓸 걸.
밤을 더 샐 걸.
자료 조사를 더 꼼꼼이 할 걸.
말귀를 잘 알아들었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부족했다.
멍청해.
난 글을 잘 못 쓰는 거야.
난 멍청한 글쟁이야.
.
.
.
서로의 집필 포인트가 달랐을 뿐인데,
그걸 알면서도
이런 생각이 구슬처럼 떨어졌다.
눈물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억울하고 속상했다.
점심도 먹지 않았다.
밥을 먹을 가치도 없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그래서
은재는 애인에게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를 했는데,
애인은 은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어느 부분이 부족했는지
신경써서 말하네.
너한테 분명 공부가 됐겠는데?
이제까지 다들 좋은 말만 해줬을 것 아니야.
은재가 바라던 반응은 아니었지만
그것도 맞았다.
은재가 글을 쓰면서
은재의 글을 봐온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재의 글을 칭찬만 했다.
당연히 면전에 대고 말하는 것이니
칭찬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아무튼,
이번 사건은
은재의 글에 대한 공식적인 첫 번째 비판인 것이다.
게다가 묘하게 친절했고.
은재는 그렇게 감상하면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솔직히
너도 힘들었잖아.
매주 두 번 시놉 보내준다고 해놓고
제대로 보내주지도 않아서
혼자 똥 참는 개처럼 있었고,
매번 원고의 방향이 '코믹 막장'인데
'코믹'이라는 게 뭔지도 너는 모르잖아.
해탈인듯 아닌듯,
때마침 애인의 점심 시간이라서
계속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
애인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훌훌 털어버리라고,
자존감 낮은 사람처럼 굴지 말라고
그런 이야기로 은재를 위로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속상한 마음을 달래주길 바랐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남들에게 이런 것들을 말할 자신은 없었다.
남들에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허물 없는 친구라도 말이다.
아니지, 허물 없는 친구라서 더더욱.
은재는 이럴 시간에 일자리를, 이란 생각이 들어서
구인구직 어플을 들어가 보았다.
'작가'라고 치고
다양한 구인구직을 보았다.
그런데
머릿속에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이
파도처럼 넘실 거리는데
멀미가 날 것 같이 어지러워서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잤다.
한 세 시간은 잤을까.
그리고 일어나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소재가 하나 생겼네.
수기로 써야겠다.
참 우스운 인생이다.
눈 뜨자마자 그런 생각을 하다니.
하지만 일어나야 한다.
한 번의 펀치로 가라앉을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은재는 아주 오래 수기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