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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회전문가 Oct 12. 2021

노화 말고 성장

입맛이 변했어

오늘 아침엔 어머님이 끓여준 소고기 뭇국에 밥을 두 공기나 말아먹었어. 그런 나를 보곤 오빠는 웃음을 터트렸지. "이제 이게 맛있어졌어?"라는 말과 함께.


너도 알잖아. 나는 원래 구운 고기가 아니면 먹지 않는단 거. 고기란 자고로 종류에 상관없이 단단하고 뜨거운 불 판 위에서 노릇노릇하게 구워져 기름기로 겉이 반들반들한 게 옳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는 거. 내가 너에게 늘 미간에 힘을 주며 말해왔던 나만의 음식 철학이었는데. 게다가 맵지 않은 국이라니... 너 기억나? 매운 것만 먹는 나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았지. 돌이켜보니 정말 미안하다... 내가 입맛이 조금만 더 빨리 변했다면 너랑 덜 싸웠을 텐데. 


나 이제 이것저것 잘 먹게 되었어. 불고기가 이렇게 달짝지근하고 맛있는 음식이라는 걸 얼마 전에야 알았다 야. 보쌈의 담백함도, 몸을 녹이는 갈비탕도, 전날 술을 먹지 않았음에도 해장하는 기분이 들게 하는 맑은 지리탕의 진가도 이제야 알았다니까? 


음식뿐만이 아냐. 이제 너무 불편한 옷은 잘 입지 않아. 예쁘게 보이는 것보단 편하고 활동이 자유로운 옷들에 더 손이 가더라고. 그러다 보니 속옷은 늘 와이어 없는 브라렛만 입고, 바지를 살 땐 양 옆을 잡고 쭉쭉 당겨 스판 기를 확인한 뒤 구매해. 네가 옷을 사기 전 잡아당기면 할머니 같다고 면박을 주던 내가 말이야. 


무엇보다, 요샌 긍정적인 사람이 좋아. 옛날엔 세상 물정 모르는 애 같다며 싫어하던 사람들을 좋아해. 곱게 커서 인생의 쓴 맛을 모른다며 나무라던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나쁜 일을 당해도 액땜했다고 말하고, 행복이니 감사니 하는 오글거리는 단어를 잘 쓰고, 저도 모르게 안 좋은 말을 하다가도 퉤 퉤 퉤 하는 사람.


우리 늘 함께 자주 말해왔잖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돌아보니 나 이렇게 변했더라. 그리고 난. 변한 내가 더 마음에 들어. 물론 변화함에 따라 과거에는 이해할 수 없던 일들이 이해가 되고,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탓에 좋아했던 것들이 사라져 가고, 보기 싫은 것들이 보일 때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쩌면 나 아직도 자라고 있나 봐. 노화가 아니라 성장하고 있나 봐. 

나름 운동을 하는 지금의 나는, 운동을 하지 않고 매 끼니 매운 것과 단 것을 먹던 과거의 나보다 건강해. 단 것을 먹지 않으면 어김없이 생기던 두통도, 생리 때가 되면 나타났던 허리 통증과 다리 저림 증상도 이제는 없어졌어. 전보다 적게 자도 덜 피곤하고 적게 먹어도 배불러. 습관적으로 뱉던 욕설도 끊었어. 야 세상에, 담배 끊는 것보다 힘들더라. 담배를 피워본 적은 없지만 아무튼. 무엇보다, 지금 행복해. 


그래서 문득 아쉬운 마음이 들 때가 있어. 조금만 더 빨리 성장했더라면 지금보다 몸이 더 튼튼했을 텐데. 몸에 좋고 맛있는 음식들을 더 많이 먹었을 텐데. 삶의 갈림길에 더 옳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오랜 시간 강박과 죄책감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너와, 좋은 사람들과 예쁜 인연을 이어갈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어쩌겠니. 이미 시간은 흘렀고 상황은 모두 종료되었는 걸. 그래도 변한 탓에 후회도 하게 되고 좋다. 아, 이건 좋은 게 아닌가 하하. 야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게 낫다는 말도 있잖냐. 나 지금은 알아서 너무 좋거든. 앞으로도 더 성장해야겠지만, 성장할 수 있다는 걸 아는 지금이 옛날보다 더. 그래서 이렇게 너에게 고마웠다고, 미안했다고 말하는 편지를 써. 지나고 보니 과거의 내가 참 이기적이었고 서툴었었다고. 진심으로 고마웠고, 미안했다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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