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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회전문가 Sep 26. 2022

출처를 밝히는 일

주인을 찾아요

나는 꽤 부주의한 편이야. 기억력도 좋지 않지. 남들의 말을 새겨듣는 편도 아니고. 하지만 어떤 문장들은 뚜렷한 사유도 없이 머리에 꼭 박혀선 도통 빠지지 않을 때가 있어. 아무리 곱씹어봐도 그 말이 유달리 좋았다거나 그날이 더 특별했던 것도 아닌데 말이야.

오히려 당시엔 무신경한 표정과 목소리로 '아-' 또는 '음-'같은 건조한 탄성과 함께 고개만 끄덕였다고.


그런데도 어느새 내 안에 자리를 잡아버린거야. 탄성을 뱉고 숨을 들이쉬는 순간 들어왔나? 말한 당사자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이름을 쓸 때마다 빨간 펜에는 절대 손을 대지 않는 것처럼 난,


양치하기 전엔 꼭 물로 입을 헹궈. 유난히 크고 동그란 달을 보면 기도해. 상처받았다고 느낄 때 상처받은 건 나뿐만이 아니라는 말을 떠올려. 마음이 힘들어 책을 집을 때마다 풀을 뜯는 병든 사자를 생각해. 겨울이 되면 홍차를 마셔.


내 속에 내 것이 아닌 문장이 너무 많아. 나는 엄마의 말 조금과 친구의 말 조금. 지금은 안부도 모르는 동료의 말 조금과 이제는 잊어버리고 싶은 지인들의 조금으로 이루어진 사람. 출처도 모르는 문장들을 수천수만 개 끌어안고서 아침에 일어나 씻고,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홍차를 마시고, 사람들과 얘기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운동을 하고, 잠자리에 드는 지극히 평범하고 조금은 권태로운 일상을 사는 사람.


그러던 어느 날에 궁금해졌어. 내가 가진 것들 중 진짜 내것은 무엇일까. 나란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내 문장은 몇 개일까. 내가 믿는 것과 내가 안다고 자부했던 것들. 나의 취미. 성격. 가치관. 기쁨과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 웃음 코드. 습관 같은 것들은 전부-


어디선가 봤는데, 부모를 싫어하게 되면 스스로를 좋아하기 어렵데. 자신을 만들어낸 원본이, 출처가 불안하고 원망스러울수록 저들의 자식인 본인을 혐오하게 되는 거지. 내 피와 살은 저기에서 온 것이니까 나도 저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물론 우리는 알고 있잖아. 나의 원본은 오로지 나란 걸. 나와 닮은 사람이 수두룩 빽빽이어도 내 핸드폰 지문인식은 나만 열 수 있는 것처럼, 나는 오직 나 하나뿐이라는 걸. 근데 왜 우린 그걸 자꾸 잊어버리고 슬픈 표정을 지을까. 왜 상영이 끝난 영화관 같은 텅 빈 눈이 되는 거야. 왜.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자꾸 출처를 찾게 되는 게. 내 것이 아닌 건 돌려주기 위해서. 나를 괴롭게 한 많은 생각들, 문장들을 이제는 주인에게 보내고 싶거든. 그 후엔...


뭐 하나만 물어볼게. 만약 내가 출처도 모르는 문장을 너에게 던지고, 네가 그 문장을 내 것으로 기억한다면, 그건 그때부터 내 것이 되는 걸까? 아 물론 주인을 아는 멋진 문장들은 상업적으로 이용하게 되면 꼭 알릴게. 나 그렇게 무지한 사람은 아니다.


네가 만약 '그래도 된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바빠질 거야. 오랜 시간을 들여 못생기고 볼품없는 문장은 몽땅 분실물 센터에 맡겨 버리고, 고르고 고른 말들만 한번  닦아 선물해야 하니까. 선물을 마주칠 때마다 내가 생각나도록.  예쁘고 빛나는 것의 출처가 나라고 생각하도록.


그 후엔 나를 그리고 너를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래. 우리 그러자. 그렇게 살자.


아 참고로 이 문장은 [백만 송이 장미]라는 심수봉 선생님의 노래에 나오는 가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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