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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시장 입구에서 시작된 하루들

카운터 너머의 작은 변화

by 지화


광주에서 일을 시작한 마트는 1호점과 2호점이 있었다. 마트에는 상시 근무자가 있었고, 사장님 부부가 왔다 갔다 하면서 관리를 했다. 나는 1호점에서 근무를 했다. 그곳은 시장 입구에 있었고, 평일 근무자와 주말 근무자가 있었다.

야채&청과를 담당하는 음식 솜씨 좋은 팀장님(언니)이 항상 점심밥을 준비해 주었다. 그 덕분에 여기서 근무한 1년 동안은 집밥을 계속 먹었다.

배달과 상품 진열을 담당하는 하는 실장님(삼촌)이 있었고, 카운터 근무인 나와 저녁 근무자 그리고 주말 근무자, 마지막으로 정육코너 사장님과 직원분이 근무를 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도 언니랑 삼촌처럼 추가 근무를 당연하게 하게 됐다.

1호점은 근처에 경쟁 마트가 많았고, 사장님 부부가 워낙 악덕으로 알려져서 아르바이트생들이 수없이 바뀌는 편이라고 했다. 그나마 언니랑 삼촌이 오랫동안 꾸준히 일해서 손발이 잘 맞았고, 이분들 덕분에 손님이 유지되고 단골이 늘었다고 시장 상인분들한테 전해 들었다.

나도 언니랑 실장님과 함께 일하면서 점점 마트 최적화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손님들은 단골 위주라서 꽤 괜찮았다. 간혹 진상을 제대로 만나서 실장님이랑 나란히 경찰서에 간 적도 있었다.

근무 시작하고 하루이틀이 지났을까. 어느 날은 유치원을 다니는 천사 손님이 “이모, 수고하세요” 인사하면서 아기들이 먹는 뽀로로 약과를 선물로 주고 갔다.

사랑스럽다. 무슨 표현이 더 필요할까. 시장이라서 그런지 아기들이 많았다.

곧 추석이 다가왔고, 추석 전후 근무 동안 여기저기서 음식과 음료가 쏟아졌다. 추가 근무가 많았고, 평상시보다 많은 손님들이 와서 그랬는지 다들 정신줄을 놓고 재미있게 일했다.

며칠 뒤, 할머니께서 빵을 사러 오셨는데 돈이 부족했다.
“그냥 줘.”
당당하게 말씀하셨고, 그 대화는 말싸움으로 번졌다.

그 뒤부터 나만 보면 화가 난 표정으로 소리 지르고 손가락질하시는 할머니가, 알고 보니 여기 유명한 블랙(진상) 손님이었다.

귀가 어두워서 소통이 안 되는 건 이해하지만, 귀가 안 들린다고 막무가내로 “해줘” 큰소리 지르고, 돈이 부족하면 “그냥 줘” 고성 지르고, 그게 안 통하면 손가락질하는 분이라서 다들 그냥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그런데 이분이 변하는 계기가 있었다.

제일 바쁜 추석 전날이 끝나고, 긴장이 풀린 사모님은 사무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나는 매장에 혼자 남아 카운터와 과일 포장을 하고 있었다. 카운터에는 할머니를 포함해 5명의 손님이 줄을 서 있었고, 나는 과일 보자기 포장을 하고 있었다.

바쁘고 정신없는 상황에서 할머니는 질문을 했고, 나는 대답을 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감동이라도 하신 건지,
“아이고 미안해, 바쁜데 할머니 도와줘서 고마워.”
처음으로 할머니에게 따뜻한 말을 들었다.

이날 할머니가 나에게 물어본 건 집에 TV 리모컨이 안 된다고 해서 내가 건전지 설명을 하고, “가지고 오면 해줄 거야?” 하셔서 알겠다고 대답했는데, 며칠 뒤 정말 오래 사용한 리모컨을 가지고 오셨다.

이날은 퇴근 시간이라서 나도 카운터 마감을 해야 해서 무척 바빴다. 약속은 했으니 건전지를 찾아 계산해 드리고 교체하려고 했는데, 부식이 돼서 잘 안 빠졌다. 끙끙거리며 다 해드리고 할머니를 봤는데,
“이제 텔레비 나와?” 웃으며 물으셨다.

나는 속으로 ‘자식이 있을 텐데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데 이 지경이 되도록 방관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가 났지만, 웃으면서 “이제 잘 될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할머니가 “안 되면 다시 와도 돼?” 하셨고, 나는 “언제든지 오세요”라고 대답했다. 웃으며 나가시는 할머니를 보니 마음이 심란했다.

그날 이후 할머니는 소리도 안 지르고, 나만 보면 웃으면서 인자하게 말씀하셨다. 원하는 상품을 못 찾으면 내가 카운터에서 나와서 찾아드렸는데, 브랜드와 가격대가 전부 달라 ‘어떻게 설명해 드려야 하나’ 생각하고 있으면 할머니는 “바쁜데 고마워. 여기서부터는 내가 찾을게. 계산하러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항상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고마워”라고 하셨다. 눈물이 났다. 어쩌면 사람이 그리워서 그랬나 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이날까지는 내 멘털을 크게 흔드는 손님은 없었다.
하지만 그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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