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남기는 흔적, 계절이 남기는 흔적
내가 일하던 마트는 읍내에 있는 대형마트였다. 해외 식자재도 팔았고, 주변에 식당과 아파트가 많았으며, 편의점은 따로 없었다. 외국인 손님도 자주 왔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손님이 있다. 50대 이상으로 보이는 왜소한 아저씨였는데, 올 때마다 은근히 치근덕거렸고 눈빛도 불편했다. 거스름돈을 줄 때나 카드를 건넬 때면 내 손을 슬쩍 스치곤 했다. 불쾌했지만 참았다. 그러다 어느 날, 직감이 확 왔다. 뭔가 이상했다. 성범죄자 알림e를 검색해 보았더니 정말로 이름이 떴다. 등골이 서늘했다. 다행히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그 사실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마트 일을 그만둔 뒤에는 여름 한정으로 운영하는 냉면집에서 서빙 알바를 했다. 규모는 작았고, 사장님 부부와 주방 보조 언니 한 명, 그리고 나. 근무 시간은 점심 파트타임이었고, 밥도 잘 챙겨 주셨다. 짧게 일했지만 기억에 오래 남는 순간들이 있었다.
홀이 넓지 않아 식탁은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나는 쟁반을 들고 좁은 사이를 분주히 오갔다. 그러다 한 번은, 누군가 손바닥으로 내 엉덩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40대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가 씩 웃고 있었다. 무슨 말을 했지만, 당황해서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일행은 나와 그를 번갈아 보며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냈고, 곧 “사리 하나 추가요”라고 말했다. 정확한 증거가 없으니 뭐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괜히 내가 문제를 일으킨 사람으로 몰릴까 봐 조심스러웠다. 그 씩 웃던 얼굴은 한동안 잊히지 않았다.
또 한 번은, 전에 일하던 마트 직원분들이 식당에 온 적도 있었다. 서로 놀라긴 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자 직원들은 없었다. 나중에 들으니 그 마트는 자리를 옮겨 대형 식자재 마트를 새로 오픈했단다. 소문에는 그동안의 행실과 횡령 문제로, 예전 직원들과는 함께하지 못했다고 했다.
웃긴 기억도 있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외국인 손님 몇 명이 들어와 주문을 마친 뒤, 나를 계속 힐끔거리며 수군댔다.
“번호 물어봐.”
“남자 맞겠지?”
“잘생겼다.”
그때는 코로나19 시기라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나는 짧은 머리에 안경을 썼다. 목소리도 피곤해서 허스키했다. 그 말들이 귀엽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한동안 기억에 남았다.
이런 일들이 유난히 여름에 많았다.
시골이라 도시보다 안전하다는 말도 있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사건사고도 많았고, 소문은 빠르며, 갑질과 텃세는 오히려 더 심했다. 나는 학창 시절을 보낸 이곳을 애증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어디를 가도 이방인이었고, 그나마 가족이 있는 이 시골이 조금은 나았다.
하지만 여름만 되면, 어떤 것도 방어막이 되어주지 못했다.
가만히 있어도 경찰을 마주하게 되는 계절. 그래서 항상 조심했다. 길을 가다가 멀쩡해 보이는 남자가 손목을 잡고 “돈 줄게, 가자”고 하는 일이 한 달에 한두 번은 있었다. 술에 취하면 더 심했지만, 맨 정신에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여름은 그런 계절이었다.
지치고 스트레스가 쌓이니 몸도 자주 아팠다. 인간관계도 여름에 자주 틀어졌다. 그래서 나에게 여름은 피하고 싶은 계절이 되었다.
그런 경험들 때문에 장사를 하게 되더라도, 여름 장사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20대 초반부터 음식 장사를 꿈꿨다. 전주에서 단짝 친구와 식당을 해보고 싶었던 때도 있었고, 치킨집이나 혼밥 식당을 구상해 본 적도 있다. 마지막으로 구체적으로 떠올린 건 라면 가게였다. 면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여름 장사를 피하고 겨울 장사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냉면집에서 일하면서 여름 장사라는 형태를 처음 알게 됐다. 하루는 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언젠가 음식 장사를 해보고 싶다고 말하자, 사장님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겨울엔 네가 여기서 장사해. 우리는 여름만 하잖아.”
그 말이 참 고마웠다.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떠돌이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에서 잔잔하게 가게를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돈을 벌고 싶은 건 아니었다. 나이가 들면 라면 가게 옆에 게스트하우스를 열어보고 싶었다. 시골이라 빈 건물도 많았고, 청년 지원도 있었으며, 주변에서도 도와줄 사람이 많았다.
그런 꿈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나는 다시 떠났다. 짧은 식당 서빙 알바를 마무리하고, 그곳에서의 마지막 타지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