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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내가 지켜온 작은 원칙들

아이의 질문, 어른의 무게

by 지화


"올 때마다 친절하게 맞이해 줘서 고마워."
"젊은 친구가 참 싹싹하네."
"얼굴처럼 말도 이쁘게 하네."
"아가씨가 있어서 올 때마다 기분이 좋아."
"퇴근길에 자네 목소리 들으면 힘이 나."
"피곤한 게 사라져서 나도 기분이 좋아."
"언제나 씩씩하고 친절해서 좋아."

칭찬만 계속 들었던 날들도 있다.

어느 날은 웃기기도 하고, 아이의 순수함에 조금 눈물이 나왔던 날도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손님.
엄마랑 남동생이랑 장을 보러 와서 계산을 마치고,
아이 손님이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묻는다.

"여자예요? 남자예요?"

그 순간 통화 중이던 아이 엄마가 당황해서 딸한테 짧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익숙한 나는 웃으며 받아주었다.
"이모가 좀 여자 같기도 하고, 남자 같기도 하지?"
그러자 아이가 웃었다.
아이 엄마는 미안함과 웃김이 동시에 섞인 얼굴로 다시 짧은 비명을 질렀다.
나는 아이의 그 순수함에 마음이 움직였다.

며칠 전엔 유치원 여자아이와 엄마가 왔다.
내가 아이에게 "이모가 얼른 삐리리 찍고 줄게요." 하자,
아이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엄마가 "이모가 삐리리 찍고 있네." 하자 아이가 단호하게 외쳤다.

"이모 아니야!"

엄마가 당황해서 "이모 아니면 뭔데?" 하고 묻자,
아이가 나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아이 엄마도, 주변 손님들도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순간들이 쌓인다.

어느 날은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봤는데,
한 아주머니가 계산도 안 하고 마스크도 없이 먹고 계셨다.
태도가 너무 당당해서 어이가 없었다.
내가 쳐다보자 "배고파서 먹었어. 자, 여기." 하며 껍질을 내 얼굴에 던졌다.

진짜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퇴근 30분 전이었다.
어이가 없을수록 냉정해진다.


그날 나는 그 손님에게 스스로가 얼마나 무례했는지 알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손님도 많은 퇴근 시간에 뭐 하시는 거예요?"

조용하지만 또렷하게 말했다.

반박할 틈이 없게 바로 이어서 마스크 착용, 계산 안 된 제품 섭취에 대한 경고, CCTV 촬영과 벌금 안내, 상품권 사용 규정 위반까지 또박또박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웃기까지 얹었더니 움찔하는 게 보였다.

반박도 안 하고 나가는 거를 보니깐 조금은 반성하겠지

제발 어디 가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카운터에 오래 있으면서 깨달은 게 많다.
"왜 저럴까?"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주변에 물어봤다.
"원래 저런 인간이야."
"그냥 무시해."
"너 원하는 건 절대 못 얻어."
"상대가 지랄하면 너도 같이 지랄해."
"근데 대화 자체가 안 되는 인간도 있어."

그런 말들이 돌아왔다.
사과를 원해봤자 돌아오지 않는다.
결국은 내 안의 응어리를 나만큼은 알아야 끝이 난다.

그날 오후에는 또 다른 진상도 있었다.
영수증도 없이 무작정 소리를 지르며 반품을 요구한 아주머니.
영수증은 버렸고, "언제까지 영수증을 갖고 있어야 되냐"라고 소리쳤다.
나는 응대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상품 진열 담당 실장님은 묵묵히 설명을 이어갔다.
그 열정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실장님이 사모님에게 상황을 넘겼다.
나는 안 된다고 했지만,
진상 손님도 좋아하는 사장님 부부는 늘 그들을 환영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저게 맞는 방식일까, 나는 왜 자꾸 저런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받을까.'
실장님처럼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사장님처럼 웃으며 넘기는 것도 나로선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방식이었다.

나는 다르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정답이고,
또 동시에 모든 것이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게 각자의 고유한 개성이라 믿고, 법에 어긋나지 않는 한 나는 존중하려 한다.
하지만 일할 때마다 그런 점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의 나는
"내가 너를 바꿀 수 있어."
그런 위험한 생각을 자주 했다.
덕분에 인생 수업료는 꽤 비쌌다.

그래서 얻은 결론.
"바뀌지 않는다. 그저 맞춰가야 할 뿐이다."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겠지만,
나는 가볍게 흔들리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는 흘려보냈을 하루에도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버텼고,
그건 결코 작지 않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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