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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염부 Jun 21. 2024

진도가 너무 빠른뎁쇼

아빠의 티칭은 늘 퀵퀵퀵! 운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피타고라스의 법칙은 직각삼각형이 가진 세 변의 관계를 정리한 공식입니다. 중학교 때 배웠던 걸로 기억해요. 그리고 저는 유독 암기가 안 되는 학생이라서 왜 3:4:5의 비율을 가지는지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엄마는 저녁 준비로 바빴고, 마침 아빠가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배웠는데, 왜 하필 이런 비율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것보다는 a^2+b^2=c^2으로 파악해야 해."

"아, 그게 정석이긴 했는데 3:4:5가 훨씬 단순해서 좋잖아."

"그래도 말이지..."


저는 그날 아빠에게 수학 질문을 하지 않는 편이 행복했을지도 모릅니다. 마약 이름 같은 '코사인'에 평행선 공준, 이 법칙은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만 성립하는데 유클리드 기하학이 무엇인지까지로 이야기가 확장되었거든요. 이면지 뒷면에 다양한 선과 각, 숫자를 그려댔던 건 기억나는데 결국 상세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배만 고팠죠.


이처럼 아빠의 강의는 듣는 이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는 최대 장점이자 최대 단점이 됩니다. 원했던 것보다 심오한 지식을 사사받을 수도 있지만 그냥 수 시간이 사라지는 결과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특성은 운전 강습에서도 별다를 게 없었습니다.


저는 면허를 따고 바로 차를 몰았습니다. 애초에 면허를 딴 이유도 (혹시나 코로나균이 득실거릴 밀폐된) 통근버스를 타지 않기 위해서였으므로, 하루라도 통근버스를 덜 타고 싶었습니다. 출퇴근을 안 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적어도 3년을 관련 경력을 쌓기 위해 퇴사 욕구를 잘 참아냈습니다. 차는 있었냐고요? 그럼요. 너무 오래전에 쓴 글이라 기억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저희 집에는 무려 오토 기어를 갖춘 카렌스가 1대 있었습니다. 아빠차였지만 주말밖에 사용하지 않는 상황이었죠. 고로 저는 제 차를 사지 않아도 출퇴근용 자가용이 있는 셈이었습니다.


잠깐 달력을 살펴볼까요? 굳이 살펴볼 필요는 없겠지만 제게는 의미 있는 날들이자 나름 J스러운 계획을 짰던 몇 안 되는 기억이라 보여드리고 싶어요. 2022년 2월과 3월이 이어지는 한 주의 모습입니다. 저는 2월 28일을 혼자 운전해서 출근하는 첫날로 정했지요.

하루 전인 27일은 조수석에 아부지를 태우고 주행 연습을 하는 날입니다. 돈 들여 운전연수를 받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이미 통장은 바나나맛 우유 사기도 빠듯할 정도의 잔액만 남은 상태여서 하고 싶어도 못 했을 겁니다. 어차피 출퇴근을 위한 면허였으니 집과 회사를 오가는 길만 익히겠단 플랜이 제게 있었습니다. 하루 뒤이자 공휴일인 삼일절은 요양의 날입니다. 운전하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하루쯤은 축 늘어져 회복해 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계획을 들은 아빠는 쉬는 날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제 아빠인걸요. 그렇게 27일 일요일 아침이 되었습니다.


운전석에 제가, 조수석에 아빠가, 조수석 뒤에 엄마가, 운전석 뒤에 동생이 탔습니다. 온 가족이 총출한 데는 운명을 함께하자는 엄마의 농담 반 진담 반스러운 입김이 있었습니다. 시트를 몸에 맞추고 각종 거울을 조정하고 안전벨트를 몸에 두르고, 드디어 키를 돌리려는데...!


TIP. 브레이크를 밝은 상태에서 키를 꽂고 ON으로 돌린다. 끝까지 돌리면 안 된다. 80년대 우주선 시동 걸 때 들었을 법한 각종 기계소리와 함께 아이나비 오프닝 곡이 울려 퍼진다. 계기판에 수많은 아이콘이 뜨고 그중에는 'LPI'도 있다. 시동대기표시등인 'LPI'가 꺼지면 비로소 키를 끝까지 돌려 시동을 걸 수 있다. 이때 탈탈탈 소리가 난다.


출처: 부산실내운전연습장 굿드라이버 운전면허(https://blog.naver.com/jinmk0070/221490232496)


면허학원에서 몰아본 차와는 달리 LPG 차량은 시동 걸 때 고려해야 할 점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렇게 무사히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2바퀴 돌며 감을 익힌 뒤 드디어 좌측 깜빡이를 켜고 신호등이 있는 공도로 나갈 워밍업을 끝냈습니다. 제목에 걸맞은 이야기는 이제야 시작됩니다.


집에서 회사까지는 16km, 약 20여 분, 좌회전 2번, 우회전 2번, 지하차도 1회 통과, 고속화도로 진입 및 탈출이라는 미션이 주어진, 단순하지만 엄청난 모험의 길입니다. 우선 범의 아가리 같은 지하차도가 무서웠고요(수동으로 등도 켜줘야 합니다), 고속화도로 들어가서 쌩쌩 달리는 차들 사이로 들어가는 건 숨도 쉬지 못할 정도였으며, 제때 출구로 나오지 못할까 봐 가장 끝 차선에서 도통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도 회사에 잘 도착했다고 안심하려는 순간에는 평행주차가 기다리고 있었죠. 아, 그놈의 평행주차 못해먹겠더라고요. 그래서 당분간은 무척 일찍 출근해서 자리가 연속으로 3개씩 비어 있을 때만 노리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이 반대 순서를 따라 집에도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가족 모두 다친 곳 없이 안전하게요!


그러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단골 충전소를 가보지는군요. 회사야 오가며 익숙해진 길이라지만 충전소는 늘 뒤에 실려만 다녔기 때문에 길을 잘 모릅니다. 겁이 났지만 어차피 배워야 하지 않냐는 아빠의 말에 용기 내서 다시 아파트 단지를 벗어났습니다. 이번에는 우측 깜빡이를 켜고 출발합니다.


이 이후로는 뭔가 많은 일이 있어서 순서대로 모든 과정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인상 깊었던 사건들 위주로 간추려보자면요.

- 비보호 좌회전에서 하염없이 화살표 신호를 기다림. 신호등이 3구라는 걸 깨닫고 겨우 다시 여정을 떠남.(차가 거의 없는 곳)

- 경사가 꽤 심한 언덕길에서 신호 대기하다가 출발할 때, 바로 엑셀 안 밟아서 뒤차를 경악케 함.

- 가스 충전소에서 충전구 안 열어줌. 당황해서 트렁크부터 열어드림.

- 우회전할 때 속도를 안 줄여서 부모님 피 쏠리게 함.

- 날이 어두워져서 라이트 켠다는 게 상향등 켜버림(아빠가 빠르게 정정해 줌).

- 차선 이동 실패해서 좁디좁은 골목길 속으로 빨려들어감.

- 일방통행 역주행할 뻔함.

- 후방 주차할 때 밑도 끝도 없이 들어감(후방 카메라 없는 차였음).

등등이 있었네요...


오늘날 운전면허 따기가 너무 쉽다고들 하죠? 시험 볼 때는 충분히 어렵다는 생각했고, 그래서 저 의견 반대했으나, 천방지축 제 모습을 반추해 보니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그날도, 이후로 초보운전을 붙이고 다니던 수많은 날들에도 제 많은 배려를 베풀어주신 운전 선배들께 감사드려요. 다 제 죄입니다. 확실히 시험과 실전은 다릅니다. 토익 900점 땄다고 해서 영어로 프리토킹 가능한 게 아닌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해요. 면허는 최소한의 기준일 뿐이니 오만한 마음을 먹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


아빠의 운전 지도는 빡셌습니다. 일부러 어려운 길로 돌아가게 유도하기도 했고, 운전 시간 자체도 예상보다 다섯 배나 길었죠. 오후 2시부터 오후 7시까지 5시간 동안 운전하며 많은 오답노트를 써냈습니다. 지금 봐도 출퇴근용 길에서는 필요 없는 연습이 꽤 많았어요. 그러나 저 때 수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수습한 경험이 없었다면 운전을 계속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딱 필요한 수준만 익힌 자에게 도로는 너무나 가혹하니까요. 엄청난 인내심으로 무상 스파르타식 운전연수를 감내해 준 아부지에게 감사합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 사고 내거나 다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왔을 겁니다. 아빠는 아빠니까요. 그래서 과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저는, 지금도 종종 아빠에게 물어보는 것들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걸 배우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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