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어스 우먼

시리어스 우먼에서 벗어나는 것. 이것이 나의 시작이다.

by 블루

평범하고 착하게 사는 한 남자가 있다. 평범한 집안의 가장에 평범한 대학교수이자 평범한 생활을 하는 그에게 불행한 일들이 연달아 닥친다. 아내는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서 이혼을 요구하고, 아들은 말썽을 일으키는 문제아가 되어 속을 썩이고, 딸은 성형하겠다며 그의 돈을 훔쳐 가려고 하고, 함께 사는 남동생도 문제 투성이다. 그의 종신 교수직 전환 여부도 미뤄지게 돼서 학교와 계약 기간이 끝나면 실업자가 되는 상황이다. 설상가상 아내의 내연남이 막무가내로 집으로 들어왔고 그는 동네 모텔로 쫓겨났다. 너무 슬픈 상황이지.


그는 잇따라 겹치는 악재를 수습하기 버거워한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지, 어떻게 이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지 힘들어하다가 3명의 지혜로운 랍비를 찾아가서 자문한다. 하지만 원하는 답을 듣지 못했다. 마지막 랍비에게 들은 해결책이라고는 착하게 살라는 말이었다. 불행한 일만 연달아 일어나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랍비들을 찾아가서 조언까지 구했는데, 결국 방법을 찾지 못한 거다. 그는 상심에 빠졌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둘러보니 문제가 하나씩 해결돼 있었다. 아들은 성년의 날을 맞이하면서 성숙한 사람이 됐고, 아내의 내연남은 교통사고로 죽었고, 종신 교수직 문제도 해결돼서 평생 교수로 재직할 수 있게 됐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해피엔딩인 듯했다. 다시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려고 할 무렵, 주인공은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건강검진 결과가 좋지 않다는 잔인한 말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동시에 아들이 다니는 학교를 향해 거대한 토네이도가 몰려오고 있었다. 이렇게 다시 불행이 슬금슬금 밀려오기 시작했다.


영화 <시리어스 맨> 내용이다. 주인공 이름은 래리. 급한 불을 끄면 숨 돌릴 틈도 없이 태풍이 불어닥치고, 고요함을 즐길 차례가 되면 먹구름이 몰려와 거센 비를 쏟아낼 것만 같은 불안함을 느끼는 건 래리뿐만이 아닐 거다. 우리의 일상이다. 래리가 불행을 끝내고 평탄한 삶을 시작하기 위해 랍비를 찾아간 것처럼 우리는 무엇인가를 시작할 때 과거를 정리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현재의 삶을 재정비해서 새롭게 마음을 다잡는 절차를 밟는다. 시작은 지금, 이 순간 발생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 채.


래리의 이야기처럼 인생은 인과응보가 아니라 복불복이다. 마지막에 폭풍이 오는 장면과도 잘 맞는다. 래리가 사는 동네 사람 중에는 착하게 살았지만 그 폭풍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고, 행실이 나쁜 사람이지만 어디로 놀러 가서 사고를 피했을 수도 있다. 이처럼 인생의 모든 일은 독립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삶에서 겪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시리어스'한 시각이 아니라 유연하게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나에게 닥친 불행은 내가 잘못 살아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진의를 찾으려 심각하게 애쓰지 말고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시작이다.


나는 무언가를 시작할 때 영화 <시리어스 맨>을 떠올리며 단순하게 받아들이기를 되뇐다. 시작이라는 단어에 커다란 의미를 얹으면 화려한 끝을 생각하게 되고 알게 모르게 그 부담감을 짊어지게 된다. 시작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고 부스터를 가동해 출발하면 금세 추력이 떨어져서 원하는 결실을 보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특히 좋지 않은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낯선 장소에 가서 견문을 넓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확장하기를 기대하고 배움을 통해 나의 잠재된 능력이 폭발적으로 개척될 것이라는 등의 엄청난 결심을 시작에 동반하는 것은 위험하다. 사전적 의미처럼, 시작은 어떤 일이나 행동의 처음 단계를 이루거나 그렇게 하게 하는 것일 뿐이다. 삶이 무료해지면 취미 생활을 즐기고, 지식을 쌓고 싶을 땐 책을 읽고, 스트레스를 풀고 싶을 땐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는 것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행동을 하는 것 이상으로 '시작'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다.

나는 과거에서 벗어나고 싶은 삶을 살았다. 과거의 내 삶을 부정했다. 과거를 떨쳐내고 싶었기에 시작에 지나친 의미를 입혔다.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은 나를 슬럼프에서 벗어나게 해 줄 특별한 존재들이라고 여겼고, 내가 겪는 배움과 경험은 나의 잠재력을 최대치로 이끌어내 줄 거라 믿었다. 그랬기에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완전한 실패를 한 것처럼 좌절했다. 타격은 매우 컸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슬럼프에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가짐을 바꿨다. 깊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자고. 아직도 쉽진 않다.


영화 <시리어스 맨>처럼 내 삶에도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과격한 파동을 타며 한 번에 밀려오는 순간이 있을 거다. 그럴 땐 래리가 랍비들에게 자문하고 평소와 다르지 않은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처럼, 일상의 평범함을 이어가며 살면 해결하기 막막했던 문제들이 하나씩 정리돼 있지 않을까.


시리어스 우먼에서 벗어나는 것. 이것이 나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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