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란 식탁 가운데에는 이제 막 가스레인지 위에서 내려와 뜨거운 김을 내뿜으며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국이 있다. 국이 담긴 뚝배기를 중심으로 배추김치, 백김치, 빳빳한 생김, 호두를 넣은 멸치볶음, 뒷마당에서 수확한 상추, 깻잎, 오이고추가 담긴 플라스틱 채반, 집 된장과 집 고추장을 섞어 만든 쌈장이 된장국을 수호하듯 일정한 간격으로 곡선을 그리며 놓여있다. 할아버지께서 "흠-"하는 의성어를 내뱉으며 된장 국물이 진하게 배인 두부를 숟가락으로 떠서 검은콩이 가득한 잡곡밥 위에 올려놓으면 본격적으로 가족 식사가 시작된다. 된장국과 김치, 김, 멸치, 쌈채소와 쌈장 그리고 잡곡밥. 우리 가족의 일상적인 상차림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늘 된장 냄새가 났다.
나는 할아버지께서 태어나시기도 전에 지어진 오래된 한옥에서 자랐다. 고동색 문형에 체중을 실어 힘껏 옆으로 밀면 묵직한 두 개의 나무문이 힘겨운 소리를 내며 양쪽으로 벌어진다. 대문 앞에만 서도 쿰쿰한 된장 냄새가 났는데, 목조 주택이라 된장 냄새가 나무에 배어 빠지지 않는 거라 생각했다. 우리 집에서는 늘 된장국을 먹었으니까. 대문을 열면 중후한 기왓장 아래로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살고 계신 안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안채 앞에는 커다란 직사각형 화단에 회양목이 울창하게 자라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부모님과 오빠와 내가 사는 작은 사랑채가 있었다. 부엌이 안채에 있어서 밥을 먹을 때마다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서 화단을 빙 돌아야 했다. 꽤 귀찮은 수고스러움이었다. 비나 눈이라도 오는 날에는 우산을 쓰고 부엌에 가느니 차라리 굶는 게 낫다며 철없는 투정을 부려 엄마 속을 썩였다. 사랑채 옆에는 수풀로 둘러싸인 작은 샘이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우리 집은 샘 집이라고 불렸다. 가뭄이 한창일 때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 샘에서 물을 길어갔다고 해서 불린 이름이란다. 엄마 말로는 무더운 여름날에 작두 펌프로 길어 오른 물은 삼다수보다 맛있었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내가 태어나기 전에 샘이 막혀버리는 바람에, 샘 집 손녀인 나는 기막히게 맛있다는 샘물 맛을 모른다.
안채 뒤쪽으로는 넓은 텃밭이 있었다. 왼쪽에는 크고 작은 장독대들이 줄을 맞춰 놓여있었는데 독 안에는 오래된 집 간장과 메주를 띄워 만든 된장, 짠맛을 뺀 굵은소금 등 각종 발효 식품들이 저장돼 있었다. 땅속에 묻힌 항아리는 울퉁불퉁 못난이 감자 보관소다. 감자를 꺼낼 땐 흙 위에 양쪽 무릎을 대고 엎드리는 바람에 바지가 흙투성이가 되곤 했다. 엄마가 자주 만들어주셨던 간식 중 하나가 들기름 감자구이였다. 압력밥솥에 찐 감자를 들기름에 구워서 설탕을 뿌려 먹는 음식이다. 여기에 방앗간에서 뽑은 하얀 가래떡을 굵직하게 썰어서 들기름에 같이 구우면 간식이 아닌 극상의 요리가 된다. 어렸을 땐 들기름 감자구이를 먹을 생각에 그저 신이 나서 옷에 흙을 묻혀가며 감자를 한가득 꺼냈더랬다.
텃밭 오른쪽에는 상추, 깻잎, 오이고추, 부추 등 각종 쌈채소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시장에서 모종을 사서 텃밭에 심는 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엄마와 나의 연례행사다.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을 땐 파란 플라스틱 바가지에 상추와 깻잎, 오이고추를 한가득 따서 흐르는 물에 씻고 채반에 바쳐 식탁에 올려놓는 게 내 몫이었다. 간혹 깻잎 뒷면에 붙어있는 작은 달팽이를 보고 한껏 인상을 쓰면, 엄마는 농약을 안 쳐서 건강에 좋은 거라고 나를 달랬다. 물에 여러 번 헹군 상추에도 벌레가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채소에 붙은 벌레를 떼어주면 난 마트에서 깨끗한 재료를 사 먹자고 투덜거렸다. 모종을 사서 심고, 수확해서 씻는 귀찮은 과정을 겪는데 벌레까지 있으니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었다. 어렸을 땐 벌레가 붙은 무농약 채소를 싫어했다. 귀한 줄도 모르고 말이다.
우리 집 식탁은 원형이다. 할아버지께서 살아계실 적에는 비타민부터 칼슘, 오메가3, 루테인을 비롯해 한의원에서 지어온 각종 환과 몸에 좋다는 정체 모를 가루가 식탁 위에 잔뜩 놓여있었다. 할아버지 연세가 많아질수록 식탁에 놓인 영양제 개수도 점점 늘어나서 나중에는 식탁의 반을 차지했다. 나머지 공간에는 식사 거리가 놓인다. 밥과 국, 4가지 이상의 반찬은 항상 차려졌다. 밥은 백미가 조금 섞인 잡곡밥이었다. 현미, 귀리, 조, 율무 등 갖은 잡곡 사이로 하얀 쌀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할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잡곡과 검은콩은 백미보다 많았다. 국은 열 번 중 아홉 번은 된장국이었다. 근대 된장국, 시금치 된장국, 바지락 된장국, 우럭 된장국, 얼갈이 된장국, 시래기 된장국 등등 된장국 종류가 많기도 하다. 반찬에는 김치가 빠지지 않는다. 배추김치, 백김치는 할아버지 밥그릇 바로 앞에 반드시 있어야 했다. 여름에는 시원한 열무김치와 동치미도 필수다. 김장철에 만들어둔 백김치에 무를 썰어 넣으면 동치미가 된다. 딱딱한 무가 아삭하게 숙성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더운 여름날 입맛이 없을 땐 하얀 소면을 삶아 찬물에 빡빡 헹궈서 살짝 얼린 엄마표 동치미나 열무김치에 말아먹었다.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 여름 별미였다.
할아버지께서 "된장국이나 끓여라."라고 말씀하시면 엄마는 바로 냉장고에서 국거리용 멸치 몇 마리를 꺼내 똥을 뗀 뒤, 다시마와 함께 끓는 물에 넣는다. 멸치 육수가 우러나면 다시마를 건져내고 애호박과 양파, 다진 마늘을 넣는다. 채소가 익었을 때 된장을 풀고, 깍둑 썰기한 두부, 대파, 고춧가루를 넣고 한소끔 더 끓인다. 간단하게 구수한 된장국이 완성된다. 엄마가 끓인 된장국에는 멸치가 가득했다. 아욱과 된장 국물을 떠서 크게 한입 먹으면 부드러운 아욱 사이에 까끌까끌한 멸치가 씹혔다. "으악, 또 멸치 씹었어." 인상을 쓰며 휴지에 멸치를 뱉어내기 일쑤였다. 멸치 뼈의 거친 식감이 싫었던 나는 된장국을 먹을 때마다 엄마한테 된장국에서 멸치를 빼자고 졸랐다. 곱게 눈을 흘기며 돌아오는 엄마의 대답은 늘 같았다. "멸치가 건강에 얼마나 좋은데. 할아버지 봐라. 멸치 뼈까지 다 씹어 드시니까 잔병치레도 없고 건강하시잖아." 그렇다. 할아버지 허락 없이는 된장국에서 멸치를 빼는 행위는 금기였다. 밥그릇에 쌀보다 많이 담긴 검은콩도 마찬가지다. 우리 집 식탁은 할아버지 입맛에 맞춘 건강 식단이 올라오는 곳이었다.
할머니는 지병이 있었다. 8년 동안 중풍을 앓으시다가 내가 11살 때 돌아가셨다. 폭설이 내렸던 날, 할머니께서 마당에 쌓인 눈을 쓸고 나서부터 갑자기 말씀을 못 했다고 했다. 그때 뇌경색이 왔고 풍을 앓기 시작한 거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3년 전부터 거동을 못 하셨다. 한 담장 안에 할아버지, 할머니와 다른 집에서 살았고 할머니랑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할머니와의 추억은 거의 없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안채 안방에 늘 누워계셨던 모습과 식사를 할 때면 옆으로 돌아누워 간신히 숟가락을 들고 국에 말아진 밥을 힘겹게 드시던 모습이 전부다.
할머니의 식사는 죽 아니면 국에 밥을 말아 드시는 것 중 하나였다. 할머니도 된장국에 잡곡밥을 말아서 드시는 걸 제일 좋아하셨다. 반찬은 드시질 않았다. 옆으로 누운 채로 식사하기 불편해서 반찬은 거르시는 것 같았다. 끼니 시간이 되면 엄마는 할아버지 밥상을 먼저 차린 후, 된장국에 갓 지은 잡곡밥을 말아 쟁반에 바쳐 안방으로 들어갔다. 창호지가 발린 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가 나면 할머니는 옆으로 돌아누워 밥을 드실 준비를 했다. 할머니 턱 아래로 쟁반을 바짝 붙이고 할머니 손에 숟가락을 쥐어 드리면 밥을 한술씩 떠서 드셨다. 엄마는 할머니께서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안방을 나갔다가 10분 후 컵에 물을 담고 빨대를 꽂아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식사를 마친 할머니 턱에는 된장국과 밥풀이 묻어있었다. 물티슈로 할머니 입가와 턱을 깨끗하게 닦아내고 물컵에 꽂힌 빨대를 할머니 입에 물리면 물을 쪽쪽 빨아 드셨다. 이렇게 할머니의 한 끼 식사가 끝이 난다. 나는 유치원에 다닐 무렵부터 엄마와 번갈아 가면서 할머니 식사를 책임졌다. 내가 초등학생이 된 이후로는 방학 때마다 할머니의 점심 담당을 맡았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날은 매미가 시끄럽게 울던 여름이었다. 아빠는 출근하셨고 할아버지와 엄마, 오빠는 외출했던 날이었다. 할머니는 안채에 계셨고, 나는 사랑채에서 만화를 보고 있었다. 엄마는 외출하기 전에 할머니께서 좋아하시는 소고기 미역국을 끓여 놨으니 국을 데워서 밥을 말아 점심에 드리라고 몇 번을 신신당부했다. 오후 12시가 되자마자 나는 부엌으로 뛰어가서 미역국을 데워 밥을 말아 물과 함께 할머니께 드리고 서둘러 우리 집으로 건너왔다. 만화를 이어서 봐야 했기 때문이다. 오후 4시쯤, 할아버지와 엄마가 집으로 돌아왔다. 할아버지께서 안채에 들어가시자마자 집 전화기에 호출 신호가 울렸다. 할머니가 이상하니 빨리 안채로 건너오라는 할아버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안채로 건너가자마자 "어머니!"를 외치며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집 전체에 울렸다. 할머니는 그렇게 떠나셨다.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내가 미역국을 덜 데워서 드렸나. 그래서 할머니가 체해서 돌아가셨나. 할머니께서 식사하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지켜봤어야 했는데.' 이런 후회막심한 생각을. 만화를 놓칠까 봐 미역국이 더 따뜻하게 데워질 때까지 기다리지도 못한 11살의 나를 2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원망하고 있다. 그날은 할머니가 미역국을 드시는 모습을 지켜보지도 않고 손에 숟가락만 쥐여 드리고 바로 방 밖으로 나왔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게 내 탓이라는 생각에 그때부터 미역국을 멀리했다.
2018년 4월, 정정하셨던 할아버지께서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 이곳저곳 보수가 필요한 100년이 넘은 안채를 리모델링하고 부모님과 내가 안채로 건너가서 살기로 했다. 지붕 기왓장과 마루, 기본 목조 골격을 제외하고 바닥부터 천장까지 싹 시공하는 대공사였다. 낡은 안채를 재정비한다고 했을 때 기뻤다. 이 집 나무와 벽지, 장판 구석구석에 배인 된장 냄새가 인제야 없어지겠구나 싶었다. 지독하게 더운 여름이 끝남과 동시에 공사도 마무리됐다. 안채는 새로운 살림살이로 꽉 채워졌다. 말끔해진 집에서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 기분에 마음이 들떠있었다. 케케묵은 냄새가 나는 집보다 아직 독이 남아있는 시멘트 냄새가 더 좋았다.
공사가 끝나고 3달 후, 아빠가 뇌경색으로 응급실에 실려 갔다. 본격적으로 안채에서 살기 직전이었다. 병원에서는 상태가 좋지 않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8년 전에 급작스러운 뇌출혈로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다퉜던 경험이 있는 아빠였기에, 최악의 상황을 예상했다. 설령 아빠가 살더라도 정상적이진 못할 거라 생각했다. 폭풍 같은 3주가 흘렀다. 아빠는 기적적으로 회복했다. 아빠는 그 옛날 할머니의 눈빛을 똑 닮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중풍을 앓아 초점이 정확하지 않던 할머니의 눈빛 말이다. 아빠는 보호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됐다. 다행스러운 건 걷고 말은 한다는 거다.
미식가였던 아빠는 뇌경색 이후 된장국만 찾는다. 두툼한 돼지비계가 가득 들어있는 김치찌개를 제일 좋아하던 아빠였는데, 이제는 된장국이 아니면 국에 숟가락만 담가 놓는다. 엄마는 밥 차릴 걱정은 안 해도 돼서 다행이라며 늘 된장국을 끓인다. 곰국을 끓일 때 쓰던 커다란 냄비가 창고에서 꺼내졌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진한 된장국용 육수를 대량으로 만들어 소분해서 얼려둔다. 엄마는 할아버지 식사처럼 끼니마다 새로 국을 끓이기 귀찮다고 했다. 아빠가 된장국을 달라고 하면 꽝꽝 언 냉동 육수 한 봉지를 꺼내서 약간의 물과 함께 냄비에 넣고 중불에서 녹인다. 육수가 녹으면 양파와 애호박을 썰어 넣고 끓이다가 된장 2스푼을 크게 떠서 풀고, 깍둑 썬 두부를 넣어 센 불에서 끓인다. 마지막에 청양고추와 고춧가루를 탈탈 털어 넣으면 구수하고 매콤한 된장국 완성이다. 할아버지의 된장국과 다른 점은 매운 청양고추가 들어갔다는 점과 잔뼈가 굵은 국거리용 멸치를 말끔하게 걸러냈다는 거다.
이제 동그란 식탁 위에는 할아버지의 영양제와 건강식품은 볼 수 없다. 오직 식사 거리만 올라오는 진정한 부엌용 식탁이 됐다. 아빠는 반찬도 잘 먹지 않는다. 할아버지, 할머니 입맛을 쏙 닮았는지 잡곡밥에 된장국만 먹는다. 아침에도 된장국, 점심에도 된장국, 저녁에도 된장국. 새집 냄새가 나던 우리 집에 다시 된장 냄새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토록 싫어하는 된장 냄새였는데 이제는 나쁘지 않다. 된장국이 좋아져서인지, 된장 냄새에 익숙해져서인지 모르겠다.
우리 집에서는 다시 된장 냄새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