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트라우마의 시작 2호선 서초역에서
나는 흔히 말하는 출산 후 육아우울증이 아니었다. 정신과를 가게 된 계기는 육아우울증으로 인한 신체화 증상이었지만, 육아우울증이 정신과 방문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우울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울한 감정을 느끼는 것과 우울증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우울증은 약물 치료가 필요하다. 상담해 주시는 원장님께서도 우울증은 나의 의지나 노력만으로 고쳐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우울증은 유전이나 환경적인 영향도 있지만, 스트레스로 인한 뇌 안의 신경전달 물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여성의 경우 호르몬의 영향으로 인해 몸속의 생체 리듬의 변화로 시작될 수 있으므로 감기처럼 원인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 몸속 신경전달 물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원인은 무엇일까? 내가 기억에 꼽을 수 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꼽자면 바로 압사 경험이다.
나는 압사 경험이 있다. 압사를 떠올리면 우리가 몇 년 전 겪었던 끔찍한 사건이 먼저 생각나겠지만, 나는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그러니까 유난히 퇴근 시간이 기다려지던 금요일 6시경에 그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십 년 전 2014년 몇 월 며칠인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는 2호선 서초역 안에서 압사의 끔찍함을 경험했다. 당시 나는 안산에 사는 이모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고, 삼성부터 시작해서 사당까지 연결되는 마의 2호선 라인을 거쳐야 했다.
자애로우신 이모 덕분에 공짜 밥에 잠자리까지 제공되었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생활비를 아끼는 대신 나는 시간을 길바닥에 버리는 나름의 사치를 하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젊었고, 나에게 시간은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경기도민이 된 가장 큰 이유는 서울의 비싼 월세였지만, 무엇보다 내겐 보증금 몇백 조차도 없었다. 고시원 생활도 몇 달 해봤지만, 월수입 백 이하의 프리랜서에겐 그것이 바로 사치였다.
방송작가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나에게 월급은 고작 80만 원이었다. 그마저도 방송이 나가지 못하면, 떼이기 일쑤였고.. 하물며 그때는 열정 페이라는 말도 없었기에, 월급을 주면 주는 대로 경험을 쌓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끈기와 근성이라는 포장지에 예쁘게 쌓인 노동력이 비열하게 착취되던 시절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렇게 얹혀살게 된 안산 살이는 방송작가를 그만두고도 계속되었다. 아직 나는 젊었기에 괜찮은 미래가 있을 줄 알았기에… 공짜밥의 헛배부름이 가스가 가득 찬 더부룩한 마음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회사를 옮긴 이후 나는 허울만 그럴듯한 3.3 프리랜서에서 9to6의 월급 노동자가 되었다.
나의 회사는 역삼역, 금요일 퇴근 시간 그날은 유난히도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안산으로 가려면 빨리 2호선 사당역에서 4호선으로 환승을 해야 했다. 6시 칼퇴를 해도 집에 도착하면 8시 반 9시를 능가하는 한마디로 마의 퇴근 코스였기에 최대한 2호선에서 시간 절약을 해야 8시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웬만하면 만원 지하철을 타었고 몇 정거장만 가면 되었기에 조금만 참자는 심정으로, 몸을 웅크린 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지하철로 출퇴근이 잦아지면서 내 몸하나 내 가방하나 안고 웅크릴 자리만 있으면 그저 다행이라 생각하던 때였다. 그런데 그날은 유독 교대역부터 사람들이 몰아치더니 나는 점점 더 끝으로 밀려났다.
출입문 쪽에 서있던 나는 서초역에 다가오자 반대편 문까지 밀려났고 순간 심장이 멈춘 것처럼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답답함을 느꼈다.
내 몸은 거짓말처럼 움직일 수 없었고, 내 발은 이미 땅에서 떨어져 있는 공중부양 상태였다. 눈앞이 하얗게 핑- 돌면서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손발이 차가워지면서 온몸의 피가 아래로 쏠리는 것만 같았다.
순간의 직감에 살려고 발버둥 쳤다. 여기저기서 그만 타요! 밀지 마요! 하는 곡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나는 죽을힘을 다해 사람들 다리 사이를 비집고 내렸다.
메고 있던 가방끈이 찢어지는지도 모른 채, 그저 가방을 안고 죽기 살기로 내렸다. 죽기 살기로 내렸다는 말이 적확하다.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속이 울렁거렸다.
화장실에서 토악질 몇 번을 하고.. 조금 숨을 고른 뒤 몇 번 출구인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 지상으로 올라갔다.
추운 겨울 서초역 어딘가의 차가운 밤공기가 나의 숨통을 열어 주었다. 편의점에서 물을 사 마시곤 그제야 살 것 같았는데… 사람 마음이 간사하게도, 조금만 참을 걸 그랬나.. 몇 정거장만 가면 사당인데... 하면서 그날은 매우 늦은 귀가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땐 미처 몰랐다. 사소하리 만큼 일상적인 단 몇 분의 경험으로 십 년이란 시간 동안 만원 지하철을 탈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릴 줄은...
몇 해 전 일어난 핼러윈의 악몽 그 사건 기사를 나는 읽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믿을 수 없었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압사를 당해서 목숨을 잃다니 지하철을 탄 것도 아니잖아!
키보드 워리어들이 말하는 본질을 넘어선 고인들의 대한 조롱과 사건 현장을 퍼 나르는 영상에 나는 모욕감을 느꼈다.
나는 이제 어디로 다녀야 하나, 지하철도 못 타는데 이제는 길조차 마음대로 걸을 수 없다니...
서초역 사건 이후로 나는 버스를 타고 다녔고, 언제든지 내릴 수 있게 출입문 쪽에 앉거나 서 있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그것은 지금도 그렇다.
안산의 이모집을 벗어나 새로운 자취방을 구했을 때도 회사와 지하철의 거리가 최대한 짧은 곳으로 동선을 짰다. 폐쇄적인 극장이나 공연장을 갈 때면 항상 대피로 가 가까운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압사의 경험은 항상 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렸다 탔다를 반복하며 약 없이 견뎠던 몇 년 후, 나는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결혼을 했다. 신혼집은 강남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이라.. 2호선 중에서도 가장 복잡했다.
그날 역시 사람이 많은 금요일 퇴근 시간 강남역에서 도무지 지하철을 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1시간 넘게 지하철을 떠나보내는 스스로에게 무력함을 느꼈다.
그렇게 한대, 두대, 세대.... 열대 이상을 보냈을까..? 7시에 퇴근 한 나는 집에 9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고작 15분 거리인 그 짧은 시간을 2시간이나 강남역에서 기다렸던 것이다.
그날의 절망과 무력함 그리고 왜 하필 내게 이런 병 같지도 않은 병이 생겼는지... 나는 또 자책했다. 친정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엄마 나 지하철을 못 타겠어..." 엄마의 답은 " 네가 너무 예민해서 그래..." 그날 나는 자책을 넘어 자괴감을 느꼈다.
그래도 그때까지 병원은 가지 않았다. 약을 먹는 것이 두려웠고, 공황장애 책을 읽어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폐소공포증, 폐쇄 공포증, 광장공포증 다양한 불안 공포증들 사이에서 나는 유일하게 지하철에서만 그 감정을 느꼈기 때문에 지하철만 잘 컨트롤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핑계이겠지만 먹고사는 게 바빠, 정신과를 갈 생각 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출산 후 수십 권의 심리책과 육아서 그리고 정신과 상담을 통해 이것은 트라우마이자, 불안장애의 일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정확히 기억나는 내 트라우마의 시작은 2014년 4월 16일 안산이었다. 내가 꽤 오래 살던 안산...
내가 태어난 고향은 아니지만, 보증금도 없고 월세도 부족한 내게 작지만 안락한 공간이 있었던 따뜻했던 그곳, 어떤 사람들은 몇몇 사건사고와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산다는 이유로, 그 지역을 폄하하지만 나에겐 지친 몸과 마음을 받아 준 따뜻한 도시였다.
20대 초반부터 29살까지 살았던 그곳에서 수많은 아이들의 죽음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던 그 시점이 내 몸에 이상을 느낀 시점이라 여긴다. 4월 16일이 되면 이상하리 만치 몸이 아프고 기분이 다운된다. 그렇게 나는 지금까지도 벗어나지 못하는 트라우마에 갇혀 산다.
이유는 뭘까…? 내가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희생정신이 투철해서?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참사 발생 이틀 후, 단원고 분향소를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아이들의 얼굴을 보자 나는 눈물이 터져 나왔다. 오열하듯 눈물을 흘렸다. 희생자들 중에 내가 아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여러 사연을 들었고, 특별하다면 특별하고 평범하다면 평범한 우리의 이야기들 속 그곳에 내가 있었다.
참사 후 그저 눈물만 나는 일상이었다. 결국 나는 그들이었고, 그들은 곧 내가 될 터였다. 평범한 일상 속에 만원 지하철을 타고 고되지만 편안하고 안락한 보금자리를 찾아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 하루하루의 삶의 무게는 무겁지만 그 발걸음만큼 음 경쾌했을 일상의 소중함을 알아갔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내 트라우마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사건에 대해 이렇게 이입하고 슬퍼하는 것에 대해 더 어린 시절로 돌아가야 하는다는 것을 알았다.
출산은 나에게 고통이었지만, 나를 성장시키고 나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탄생이었다.
아이가 준 선물은 내게 행복 그 이상이었다. 고통스럽고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나는 믿는다. 내 남은 삶들 중 트라우마는 같이 따라다니겠지만, 더 이상 그것을 거부하며 살진 않겠다고.
자연스러운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조금 더 치유하고 안정을 취하다 보면 내 곪아 터진 마음의 상처가 아물어가진 않을까..
정신과 약을 끊을 그날이 빨리 오길 고대해 본다.
ps 안녕하세요 운이 좋게도 브런치 작가에 선정이 되어 글을 발행할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다소 무거운 주제일지 몰라, 가볍게 쓰고 싶었는데 쓰다 보니 진지한 느낌을 지울 수 없네요
그냥 저처럼 속앓이 하는 많은 엄마 아빠 그리고 글을 읽는 분들과 함께 아픔을 치유해 나가고 싶어요
속풀이 하듯 쓰는 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