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회사에서 직급은 나이순이었다. 내가 속한 조직에는19개의 팀이 있는데, 팀원-파트리더-팀장은 대부분 나이순이다. 팀장은 2차 베이비붐 세대인 1970년 전후 세대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들은 피라미드 형태의 조직에서 운 좋게 30대 초반부터 파트리더가 되어 군대 지휘관처럼 지시만 하는 권위주의형 리더로 선입선출의 원칙을 지키며 팀장, 임원으로 차례대로 성장해왔다.
하지만 이제 70년 전후 팀장들의 장기 집권이 끝나가면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다. 팀장은 만 53세까지로 나이 제한이 있어 그전까지 진급이 되지 않으면 다시 팀원으로 내려가 실무 업무를 해야 한다. 2차 베이비붐 세대에 막혀 70년 중후반 세대들은 팀장이 되기가 힘들었다. 팀장 중 누군가 임원으로 진급을 하거나 퇴직을 해서 자리가 생겨야만 간신히 한 명씩 팀장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이제 회사가 젊은 조직을 표방하며 80년대생 리더들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파트리더들은 거의 80년대생으로 바뀌었고, 팀장들도 일부 교체가 진행되고 있다. 이제 50세가 넘으면 팀장도, 임원도 할 수 없도록 인사 제도도 바뀌었다. 70년 중후반 세대들이 다음 차례가 되었지만 곧 팀장이 될 수 있는 나이 제한에 걸리게 된다. 50세가 넘어서 평사원으로 실무 업무를 하는 건 괜찮지만 나보다 어린 팀장 밑에서 일한다는 건 솔직히 상상이 잘 안 된다. 호칭은 어떻게 해야 할지, 사석에서는 편하게 말해도 될지, 맘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어떻게 얘기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나이의 질서는 파괴되었고 나도 곧 역전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
팀장이 되면 여러 가지 혜택이 있다. 직책수당이 있고 통신비와 유류대가 지원된다. 대부분의 업무가 팀 단위로 진행되기 때문에 팀장의 재량권은 막강하다. 팀 구성 및 운영에 대한 권한을 가지며 팀의 방향키를 조정하는 선장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반대로 회사 및 상사, 타 부서로부터의 지시와 요청, 반대에 부딪히며,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 팀원들의 업무는 잘 돌아가는지, 업무 분배는 적절한지, 개인적인 애로사항은없는지 계속 신경 써야 한다. 팀의 성과와 실패, 팀원들의 작은 실수까지, 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팀장은 관련이 되고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팀원과 팀장의 스트레스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팀원들은 자신의 업무만 모두 처리하면 퇴근과 동시에 대부분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가질 수 있다. 하지만 팀장은 수많은 이슈와 심리적 압박으로 퇴근 후에도 회사 일을 머릿속에서 지우기 어렵다. 물론 조직과 사람에 따라 상황은 모두 다르겠지만 리더로서 권한이 커지는만큼 그에 따른 책임과 스트레스의 무게는 몇 배로 커진다.
훈련소를 막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은 이등병에게 병장은 신적 존재이듯이 사원, 대리였을때 팀장은 감히 범접하기 힘들 정도로 높은 위치로 느껴졌다. 팀장위에 담당, 상무, 전무, 부사장, 사장도 있지만 실무적으로 절대적인 권한을 지닌 건 팀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팀장은 한번쯤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해 한해 지나고 중간 관리자가 되어 보니, 확실히 스트레스와 책임, 무게감이 다르다. 회사를 오래다니면 금방 늙는 이유가 있다. 권위적이고 예민하면서 소심한 팀장들을 겪으면서 나는나중에절대 저런 팀장이 되지 말아야지 생각했었다. 하지만 계속 사람들을 상대하는 업무를 해오다 보니,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싶다. 관리적인 일보다는 실무에 집중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이제 팀장을 안 하려고 한다. 순서나 나이로 봤을때도 앞으로 팀장이 되기는 쉽지 않지만 못하는 거와 안 하는 거는 큰 차이니까 안 하는 것으로 정하겠다.
물론 직장생활하면서 때마다 진급하고 리더로 성장해가는게 큰 목표이자 성취감을 느끼는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모두가 팀장이되고 임원이 될 수는 없으니 스트레스 조금 덜 받고 내 업무에 집중해서 열심히 일하고 싶은 사람들까지 굳이 리더로 가는 대열에 합류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나이 들어 존경받는 멋진 리더가 되는 것도 좋지만 나이 들어서도 묵묵히 자기 일을 깔끔하게 해나간다면 그것 또한 후배들의 귀감이 될 것이다. 솔직히 20여 년을 회사를 다녔지만 후배들에게 존경받았던 상사를 떠 올리기가 힘들다. 팀장이 되면 후배들에게 좋은 선배로 기억되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다.
처음 입사했을 때는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려고 노력했다. 이직을 여러 번 하며 많은 경험을 하다 보니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것만으로도 참 소중하고 감사했다. 거기에 열정도 있고 체력도 있었으니, 매일같이 야근을 해도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었다. 나이가 들어 이제 상당히 고령자 계층에 속하게 되었지만, 업무에 대한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하고, 보이지 않는 일이라도 꼼꼼히 챙기려고 애쓴다. 더 이상 진급과 평가에 긴장하거나, 팀장 후보 간의 경쟁에 신경 쓰기보다 그동안의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전문적이고 성실하면서도 인간적인,배울 점 많은 선배가 되고 싶다.
남은 직장생활 후배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고, 꽤 괜찮은 선배로 기억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