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교사가 되기 위해 재수생이 되었습니다.
노량진 재수학원 이야기
2024.9.19
도시락을 싸고 노량진으로 버스를 타고 다니며 10년 만에 본격 수능 준비를 시작했다.
본격 준비를 하기 전 마지막으로 회사 동기들과 송년회를 했었는데 나 말고도 의전원에 합격해서 퇴사하는 동기도 있었다. 그 친구는 분명 컴퓨터 쪽 일도 잘했었는데 의사가 꿈이라고 했었고 나처럼 다시 도전한 것이다. 그리고 한 남자 동기의 순수한 말이 날아와 가슴에 꽂혔는데
"아, 그럼 재수생이 아니라 10 수생이네. 10년 만에 수능 준비하니까."
10 수생...
10 수생이라 주변에서 그렇게 반대한 건가...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수능준비하는 것에 반대를 했다.
나와 거리가 있는 화사 동료들이나 사촌들은 대부분 격려를 해주었다.
"너 이 회사 정말 들어오고 싶어 했잖아. 다시 잘 생각해 봐."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다시 수능 공부한다고 잘 볼 수 있을 것 같아?"
"그 나이 때에 맞는 니 역할이 있는 거야. 회사 좀 다니다가 아기 낳고 키우면서 자연스럽게 회사를 그만두던가 해."
하지만 내가 노량진 재수학원에 들어간 순간부터 지인들과의 거의 모든 연락이 끊어지고 반대를 했던 가족들은 체념하고 지켜보았다.
2월부터 재수종합학원 입학테스트를 보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동안 회사를 다니면서 준비한 게 있어서 꽤 괜찮은 반에 들어갔던 것 같다.
재수종합반의 시작과 동시에 출산을 한 친한 친구의 소식을 들으며 아, 내가 해야 할 일이 출산인데 이러고 있나 자괴감도 들기도 했다.
나는 꼭 해야만 하는 일에 나를 넣어둬야 성실하게 열심히 그 일을 할 수 있기에 재수종합반에 들어간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
내 또래의 여학생도 한 명 있었는데 우리는 친목도모는 거의 하지 않고 묵묵히 공부했다.
수능이 다 끝나고 밥 한번 먹었던 것 같다.
(그 친구는 안타깝게도 결국 교대 입학을 못했다...)
졸려울 때는 자연스럽게 교재를 들고 뒤에 나가 서서 수업을 들었다. 처음에는 나 혼자 그랬는데 나중에는 여러 명이 그렇게 했다.
담임 선생님은 나이가 지긋하신 국어 선생님이셨고 국어책 지문들을 잔잔하게 설명해 주셨던 기억이 있다. 가끔 명절 안부를 카톡으로 보내시기도 하시는데 그러고 보니 최근 몇 년은 연락이 안 된 듯하다. (현실에 치인 무심한 제자입니다...)
교대에 합격하고 한번 찾아뵙고 이야기 나눈 적이 있었는데 나를 포함해서 열심히 하던 나이 많은 사람들 덕분에 우리 반이 끝까지 제일 분위기가 좋았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 학원의 최고 쌤은 수학 선생님이셨다.
내용이 이해 잘되게 깔끔하게 설명해 주셨고, 때론 자신의 인생 및 타인의 인생을 재밌게 잘 이야기해 주셨다. 고등학교 전교 1등으로 입학한 자녀이야기, 고등학교 교사였던 자신이 학교의 부조리 때문에 그만둔 이야기, 우리 담임쌤이 운동권이었다는 이야기, 김태희는 왜 서울대를 나와서 괜찮은 삶을 포기하고 연예계에 들어갔을까 등 공부에 지칠만하면 이것저것 재미난 이야기들을 해주셨다.
다른 과목들, 특히 사탐은 이해가 잘됐다.
당시 서울교대를 목표로 하고 있어서 4과목이나 시험 봐야 했는데 법과 사회, 사회문화, 정치, 윤리, 한국지리를 공부했다. 이중에 뭐 하나를 포기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난다.
경험치가 올라사서 그런지 문제 이해력이 좋아져서 공부에 도움이 많이 됐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암기력이 너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외우는 부분도 많은데 잘 외워지지가 않아 괴로웠다.
학원 강의는 부족해서 인강도 많이 들었는데, 당시에는 pmp라고 했던 것 같은데 동영상 플레이어를 하나 구입해 강의를 다운받아 들었었다.
인강비도 만만치 않아서 앞뒤로 앉는 친구와 반반 나눠서 듣기도 했다.
한국지리는 이기상 선생님, 정치와 윤리는 최진기 선생님, 수학은 삽자루(지금 고인이되신...ㅜㅜ), EBS 수능특강 선생님, 영어는 김기훈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다.
매번 공부시간이 부족했다.
복습시간이 부족해서 몇 번은 두세 시에 잔적도 있었는데 다음날이 너무 힘들어서 금방 포기했다.
매번 수능특강 교재를 사서 풀고, 학원 교재도 풀고, 자이스토리 같은 기출문제도 풀었다.
하지만 모의고사 점수가 좋지는 않았다.
2,3 등급 때론 4등급도 왔다 갔다 했다.
해외경험이 있어서 영어 듣기 문제는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됐지만 독해가 문제였다. 어쩔 땐 1등급이 나오는데 어쩔 땐 3등급이 나오는 것이다.
아는 내용들이 많이 나오는 때와 아닐 때의 차이가 컸다.
언어, 수학, 사탐 그 어느 것도 쉬운 것이 없었다.
다만 끝까지 시험직전까지 포기하지 말고 학원을 다니며 공부하자라는 마음가짐이었다.
나중에 우리 반에서 남학생 두 명이 같은 교대에 합격하게 됐는데 알고 보니 성적이 잘 나오던 그룹의 아이들은 모여서 친목도모도하고 당구도 치러 가고 했던 것 같다.
그중에서 제일 공부를 잘했던 남자아이 하나는 계속 모의고사 성적이 잘 나오니까 약간 자만심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수능에서 언어영역을 망쳐서 그냥 다니던 학교로 돌아갔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다.
그렇게 정말 수능 전날까지 나는 재수학원을 갔고 드디어 10년 만에 2011학년도 수능을 다시 치게 된다. (참고로 나는 빠른 83년생으로 01학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