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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진 Mar 03. 2023

91년생이 본 대한민국의 저출생

우리가 잃어버린 것, 그리고 나의 이야기


  지금의 저출생 현상에 대해 딱 부러지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각자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그것이 각자의 삶이 되었고, 그 결과를 '국가'라는 울타리로 묶어 갈무리해보니 이런 지표가 나온 것뿐이다. 기성세대의 잘못이라고도, 젊은이들의 잘못이라고도, 아니, 그냥 그 자체가 '잘못'이라고 할만한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다. 여기에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볼만한 지점이 있다. '잘못'이라는 말을 별다른 반발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 거기에 일말의 힌트가 있지 않을까.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 않아서 슬픈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분위기, 즉,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슬픈 것이다.



  우리는 동물이므로 본능을 갖고 있다. 번식에 대한 본능은 동물이 갖고있는 가장 큰 본능 중에 하나이다. 경험해보지 않았어도,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꾸리고 그 안에서 새끼를 낳아 양육하는 것이 당연한 방향이라는 것이 수세기 전부터 내려온 DNA에 새겨져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것을 거스른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그리고 그 엄청난 일이 특이한 몇몇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 현상으로 대두되는 것은 더더욱 희한한 일이다.



  출생률이 본격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년 남짓이다. 그렇다면, 최근 20여년 동안 우리나라 환경은 과거 어떤 시대와 비교해도 물리적으로 살기 힘들어졌는가. 혹은 기성 세대의 독식이 심해졌는가. 혹은 성차별이 극심해졌는가. 혹은 경쟁이 치열해졌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각자 다를 것이다. 거기에 대해 잘못된 부분을 찾아낼 필요도, 무엇을 고칠 필요도 없다. 그저 그 사람의 생각이 그러한 것이니까. 그런데 나는 이 질문을 하고 싶다. 정말 그러한가. 사실이 그러한가, 아니면 그러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이 두 가지 진술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존재한다.



  온갖 통계 자료를 가져와서 몇날 며칠을 밤새 토론 한다 해도 이 문제들에 대하여 답이 나올 리가 없다. 사회를 해석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치않기 때문이다. 저명한 사회학자들이 쓴 책들도 조금 더 많은 데이터가 분석된 설득력있는 가설이나 의견에 불과할 뿐이다. 페미니즘의 대두, 부의 양극화, 물질만능사회, 극심한 경쟁, 치솟는 물가……. 뉴스에서는 백날 이런 것들을 이유로 들이밀지만, 기준을 어디에 두고 이야기하는 것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저 메아리처럼 사람들의 입과 입 사이를 맴맴 돌 뿐이다. 



  어떠한 역사적 위기 속에서도 자발적으로 아이들을 낳지 않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던 적은 없었다. 심지어 전쟁 직후에는 베이비 붐 현상이 일어났다. 물리적으로 힘든 것으로 치자면 전쟁 직후만큼 힘든 때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인간이라는 동물은 본능적으로 아이를 낳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낳을 수 없는 이유-즉 전쟁이라는 요인-가 사라졌기 때문이고, 사람들이 많이 죽었으니 아이를 낳아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왜'라는 질문이 파고들 틈은 없다. '왜'라니, 그냥 당연히 그런 것일 뿐인데.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의 2030세대가 시공간을 막론하고 과거 어떤 세대와도 다른 지점은 무엇일까. 바로 개인이 느끼는 '감정'이다. 이것 외에는 어떠한 것도 분명한 것이 없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희망이 없다. 희망이 없는 이유는, 누구도 희망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불행하다고 느낀다. 모든 곳에서 실시간으로 불행을 주입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저출생의 진짜 이유이자, 슬픔의 근원이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는 현상 자체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국가 입장에서 보면 비상사태지만, 지구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있지 않은가.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누군가 '나는 지구를 위해 아이를 낳지 않는거야', '거지같은 나라 망해봐야 정신차리지.' 따위의 말을 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인간을 행동하게 하는 것은 '의식'이 아닌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무의식 속에 그토록 지구에 대한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라면 이미 위인 반열에 올랐어야했고, 나라가 망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기본적인 권리나 의무는 다 하고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사람들의 무의식에 박혀있는 것은 아마 일종의 감정일 것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나는 불행하다. 딱히 잘하는 것도 없고, 금수저를 갖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평생 노동해야 겨우 먹고 사는 노예로 살아가야 할 것이고, 어릴 때부터 나를 이해해주거나 인정해주는 이는 거의 없었고, 어른들이 시키는대로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남는 것이라고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직업, 텅 빈 통장 뿐인데, 물가와 집값은 계속 치솟고, 공권력과 법은 내 편이 아니고, 누군가는 나를 죽어라 미워하고-성별, 세대, 계급 등 만연해있는 혐오-, 전염병이나 미세먼지는 더 심해질 것이고, 돈 버는 놈들은 하나같이 사기꾼 아니면 관종 혹은 소시오패스이며, 나는 그럴 용기도 배짱도 없는 루저로 살다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아주 극단적인 예시이다. 그러나 인터넷이나 SNS에 들어가보면 이보다 더한 댓글이나 글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 공감대가 탄탄하다는 것은 유머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유머 속에 자학이나 혐오가 녹아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현실 세계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부모님, 친척, 주변의 어떤 누구를 보아도 별로 좋아보이는 사람들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결혼하라고 종용하는 부모님에게 결혼해서 행복했느냐고 쏘아붙이면 바로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아무도 모른다. 그들이 결혼하지 않고, 자식을 낳지 않고 혼자 살았다면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았을까. 또, 나 자신이라고 해서 무엇이 다르겠는가.



  모든 것은 '믿음'의 문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를 만나고, 미래를 약속하고, 나를 닮은 생명을 낳고,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여생을 보내는 것이 혼자인 것보다 나을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은 누가 주는가.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것은 나를 둘러싼 상황이 만들어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기성세대들의 잘못이라고 할만한 것이 등장한다. 결혼에 대해 불신하는 분위기가 공고해질 때까지 손을 쓰지 않은 것 말이다.



  이 대목에서 기성세대들은 매우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이라고해서 무엇이 다르겠는가. 위에서 시키는대로 열심히 살았고, 아이를 낳아 열심히 길렀더니 이제 와 이런 원망이나 듣고 있지 않은가. 충분히 억울할만 하지만, 현재 젊은이들의 불행에 끼친 영향이 지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 무엇을 했어야 하는가 묻는다면, 사람을 사람답게 살도록 해주었어야 한다. 남녀 차별적이고 가정보다는 입신양명에 무게를 두는 유교문화의 좋지 않은 관습을 없애야 했다. 아이들이 인터넷을 하며 보내는 시간보다 실제로 눈을 맞추고 함께 보내는 기억을 만들었어야 했다. 돈을 벌어야하니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면, 노동 환경이나 부의 분배에 대한 혁명이라도 일으켰어야 했다. 아이들이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어야 했다. 그 마지노선은 어디까지 였을까. 아마, 아이들이 다른 이들의 삶과 자신의 삶을 물질만을 놓고 비교하기 전까지 아니었을까.



  우리나라의 경제는 고도로 성장했다. 지금은 선진국이라고 하지 않으면 민망한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지금부터는 내 개인적인 견해다. 우리나라가 그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모든 것을 자본주의의 표상이라고 할만한 '미국'을 무조건적으로 베껴왔기 때문이고, 나라가 마치 일종의 사업체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또한, 유망하다는 이유로 IT 산업을 들여와 나라 전체가 IT 강국이 되도록 만들었다. 어른들이 돈을 벌러 나간 동안 아이들은 인터넷 세상과 입시 공부 사이에서 유년을 보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자본주의'와 'IT 산업'으로 대표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마치 그것에 집어삼켜졌다는 인상을 종종 받는다.



  나라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지, 국민이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지 분간할 수 없는 세월이 지나면서 또 한 가지 탈락된 것이 있다. 바로 '인문학'이다. 자연히 인문학에 포함된 '종교'와 '철학'이 사라졌다. 그것들은 단순히 학문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생각 속에서 점점 사라져 온 것이라고 본다. 돈, 돈, 돈. 일단 잘 살고보자. 나이 먹은 사람들의 삶의 지혜보다 새로운 시대의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눈이 시뻘겋게 되고는 했을 지난날들. 나는 그 시간을 살아온 사람들을 원망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그것이 지금의 현상을 이끌어 낸 원인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면 설명이 된다. 왜 하필 2023년의 대한민국이 0.78이라는 기록적인 출산률을 기록하고 있는지 말이다. 어찌보면 모든 것이 기록적인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 눈부시게 성장하는동안 반대쪽의 그림자도 같이 깊어진 것이다. 생각해보면, 기가 막히지 않은가. 한반도의 반쪽은 전 세계 유일의 공산주의 독재국가가 되어있고, 다른 반쪽은 자본주의의 표본이자 첫번째 소멸 예정 국가가 되었다니 말이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달리는 동안 거치적거리는데다 무겁기만 한 '인문학'을 놓고가기로 결정했고, 달리다보니 바닥에 떨어진 국민들의 '감정'을 채 추스를 새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 사실은 별로 슬프지 않다. 진실만 쏙 빼놓고 온갖 데서 갖은 억측으로 쳐맞는 것도 모자라 양쪽으로 나뉘어 싸우기까지 시작한 우리 세대가 안쓰러울 뿐이다.



  니체는 말했다. "신은 죽었다. 그리고 신을 죽인 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다." 뒤이어 말했다. "분명 신의 죽음은 무언가가 끝났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하지만 끝은 곧 또다른 시작이기도 하다. 이번 끝 역시 사실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 줄지도 모른다. (...) 신의 죽음은 곧 우리 인류의 부활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스스로 신이 됨으로서 우리에게 신을 죽이는 것을 비롯한 위대한 업적을 달성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신을 죽인 결과를 보고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니체가 말하는 '위대한 업적'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명령을 듣지 않고도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 영혼이 되어야 한다. 확실성을 갈망하지 않고, 안전망이 필요없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야 한다. 오히려 자신이 누리는 자유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에 기뻐하면서 가능성만을 즐기는 영혼이 되어야한다. 삶이 무엇을 내놓더라도 심지어 심연의 끝자락에 있더라도 춤을 출 줄 아는 자유롭고 쾌활한 영혼이 되어야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우리의 실패를 직감했다. 왜냐, 우리는 지금 전혀 춤을 출 기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불행은 나에게서 끝내겠다는 식으로 스스로 신이 되기를 선언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 * 나의 이야기



  나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해도 결혼이나 아이를 낳는 문제에 대해 아주 쉽게 생각했다. 결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아이를 낳아도 그만, 안 낳아도 그만.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그것은 너무 먼 일이었고, 일단 내가 하고 싶은 것이나 이루고 싶은 것들을 하기 바빴기 때문이다. 지금도 딱히 종교가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때는 확실한 무신론자였다. 오히려 신에 대해서라면 안티에 가까웠다. 나를 가난 속에서 키운 부모님에 대한 애증이 있었고, 사회 문제나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서슴없이 목소리를 높이고는 했다.



  그랬던 내가 완전히 변한 것은 피트니스 대회를 준비하면서부터였다. 거의 먹지 않고, 온 에너지를 운동에 쓰며 꼬박 한 달을 보내고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살까.' 뒤이어 이런 생각이 따라왔다. '내 인생은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다.' 어찌나 절박했던지 나는 불을 켤 생각도 못하고 의자에만 앉아 있었다. 그때 마음에 관련된 유튜브 영상을 보다가 한 성경 구절을 접하게 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강연자의 설명이 덧붙었다. "내가 너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음으로하여, 너희를 쉬게 하리라."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사람, 아무것도 안 해도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내 인생에 있었던가. 그 부분을 몇 번이고 돌려보는데 연신 눈물이 흘렀다. 나는 매사 활동적이었고, 리더를 도맡았고, 예술을 하겠노라 두 번의 대학을 갔고, 해외에 살다왔고, 그럼에도 뭔가 계속 채워지지 않아 한국에 돌아와 회사에 다니면서 운동을 했다. 운동을 하루라도 빼먹으면 나 자신이 나약하다고 자책하며 미친듯이 운동에 몰두했다. 그것은 모두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리더, 예술가, 해외 생활, 피트니스 대회 준비. 이런 것들이 누군가에게 보여주거나 인정받기 위한 것들은 아니었을까. 



  그때부터 실로 지옥이 펼쳐졌다. 세상에 태어나 나를 존재 자체로 사랑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 뭔지도 알지 못한 채 남의 인정만을 구걸하며 인생을 살아왔구나. 그 생각이 나를 절망 속에 빠뜨렸다. 부모님이 그토록 나를 사랑할지도 모르나, 나는 그것을 충분히 느끼지 못했다. 만약 느꼈다면 내가 그런 식으로 살아왔을 리가 없지 않은가. 서른 둘 나이로 어려서 못 받은 사랑을 내놓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는 정말 기로에 서 있었다. 이대로 죽을 것인가, 무엇이라도 붙잡고 살 것인가.



  그 구절을 보지 못했다면 나는 정말 죽음 외에 다른 길을 못 찾았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예수'인지 '부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딘가에 나를 존재만으로 사랑해주는 이가 있다는 것. 그리고 나에게 이 세상에 좋은 것들을 느끼라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라고 나를 보냈다는 것. 응당 그에 맞는 재능을 주었다는 것. 그 문장들을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되뇌었다. 나는 말라가는 화분에 물을 준 것처럼 서서히 살아났다.



  병원에 가서 우울증 진단을 받았고, 약을 처방받아 먹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고, 처음에는 격하게 말도 하셨지만, 이내 나를 깨지기 쉬운 유리를 대하듯 조심스러워 지셨다. 그리고 나에게 알려주려고 노력하셨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지난 날에 힘들어서 너에게 사랑을 충분히 느끼게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나는 이제 내가 가야할 길을 확실히 알고 있다. 사랑을 주고, 사랑을 느끼는 것이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앞으로 나의 식구가 될 사람들에게도.



  나의 객관적인 상황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고, 오히려 돈은 회사에 다닐 때보다 훨씬 쪼들리지만 나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고있는 기분이 든다. 세상은 예전과 달리 밝은 빛이다. 교회나 절에 나가는 것도 아니지만,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 왠지 더 살만해진다. 좋은 경험, 깊은 사랑을 충분히 느끼다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싶다. 그 아이에게 무조건적인 사랑 비슷하게라도 줄 수 있다면 좋겠다.



  저출생 뉴스를 보면, 젊은 세대가 자신을 향해 화살을 겨누고 매일 피를 흘리고 있을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팩트'도 아니고, '객관화'도 아닌 '우울'의 기운이 사회를 전반적으로 좀 먹고 있는 것 같아 화가 나기도 한다. 놓고 온 '사랑'을 찾으면 될 것인데, 누가 어디서 그것을 찾아다가 젊은이들 앞에 보여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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