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은 새로운 도전을 하며 몰랐던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그중 가장 큰 도전은 낯선 환경 속에 나를 놓아두는 일이었다. 20대 후반 2년이라는 짧은 시간을 수도원에서 보내겠다는 선택을 한 후 두 번째. 자발적으로 낯선 환경에 나를 밀어 넣었다. 십 년 전 수도원의 삶은 태어나 처음으로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향이었다. 살아온 처지와 생각이 전혀 다른 이들과 함께 살을 부대끼며 살아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녔다. 그 어떤 삶보다 고귀한 삶을 살아갈 거라는 나의 착각은 관계 속에서 산산이 무너져 내렸다. 수도원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그 사건을 통해 느끼는 감정들로 인해 철저하게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자신에 대해 알아갈수록 타인을 이해하는 아량이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했다. '나'와 '너'는 다르다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지만 미처 깨닫지 못한 한 가지가 있었다. 그건 바로 '정체성'이었다. '정체성'을 알아 채기도 전에 2년의 수도원 생활은 끝을 맺었다. 그렇게 내면 작업은 마무리되지 못한 채로 난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수도원을 나온 지 딱 십 년째였던 2019년. 새로운 환경 속에 나를 밀어 넣으며 안 좋은 습관들을 버리고 남은 삶을 위해 좋은 습관을 들이려 부단히 노력하던 중 우연찮게 <아주 작은 습관의 힘>이라는 책에서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삶의 방향을 정하고 구체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정체성을 알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일까? 내 정체성은 무엇일까? 어떤 삶의 모습을 원하는 것일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이어졌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점점 깊어져만 갔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만 떠오를 뿐 어떤 말로 어떻게 표현해 내지 못하고 답답해하던 찰나 신영복 선생의 <담론>이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다.
신영복 선생은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청춘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는 복역한 지 20여 년 만인 1988년 광복절에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 해 성공회대에서 강의를 했다. <담론>은 신영복 선생의 강의 내용을 엮은 책이다. 그는 감옥이라는 제약적 공간에서도 배움을 멈추지 않았다. 죄인이라는 사회적 낙인이 찍힌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했고 그들을 이해하며 세계에 대한 인식 틀을 확장해 나갔다. 죄인이라는 프레임으로 재소자들을 바라보지 않고 존재 자체로 그들을 대하고 바라보려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들을 통해 얻은 깨달음 중 '공부'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공부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세계는 내가 살아가는 터전이고 나 또한 세계 속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란 세계와 나 자신에 대한 공부입니다. 자연, 사회, 역사를 알아야 하고 나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공부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키우는 것입니다. 세계 인식과 자기 성찰이 공부입니다.
그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공부라 말한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의 존재형식을 머리에서 가슴으로 느끼고 마지막엔 발로, 즉 직접 몸으로 움직여 실천하는 것이야 말로 진실된 공부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완고한 형식의 틀을 깨뜨리고 변화와 창조로 이어져야 한다. 이 변화와 창조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가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시작된다. 그리고 관계는 한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모든 존재는 고립된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관계 속에 놓여 있는 것이며 그러한 관계 속에서 비로소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정체성이란 내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적극적으로 조직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입니다. 정체성은 본질에 있어서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 생성(being)입니다. 관계의 조직은 존재를 생성으로 탄생시키는 창조적 실천입니다.
이 문장을 읽고 정체성에 대한 수많은 고민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계속 내부에서만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 오로지 고립된 나의 내면에서 그 까닭을 찾으러 발버둥 쳤기 때문에 혼란스러웠던 것이었다.그리고 알았다. 정체성에 대해 내가 고민할 수 있었던 것도 관계 속에 나를 놓아두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만약 내가 수도원을 나오고 지금까지 어떤 커뮤티니에 속해있지 않았더라면 삶의 방향과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희미한 목표들을 향해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는 것을 반복하며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세상이라는 곳에 무인도를 만들어 그곳에 스스로를 가둔 채. 선생의 말처럼 정체성은 관계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끊임없이 재생성되는 과정을 겪어야만 한다. 고립된 채 변하지 않는 존재는 결코 정체성을 형성할 수 없다.
나는 '나'의 정체성이란 내가 만난 사람, 내가 겪은 일들의 집합이라고 생각합니다. 만난 사람과 겪은 일들이 내 속에 들어와서 나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과 일들로부터 격리된 나만의 정체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관계다'를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독방은 내게 최고의 철학 교실이었습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계속해서 책을 읽으며 모든 사람을 주인공의 자리에 앉히는 인간학을 터득했다고 한다. 그는 공부를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로 행해지는 실천이야 말로 진실된 공부라 여겼다. 그가 감옥 안에서 실천할 수 있는 진실된 공부는 재소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유심히 살피고 그 사람의 인생사를 경청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사람의 인생사를 경청하는 것을 최고의 '독서'라고 생각하며 상대를 주인공의 자리에 앉힌 후 존재 고유의 아름다움을 보려 애썼다.
'아름다움'이란 '알다' '깨닫다'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세계와 자기를 대면하게 함으로써 자기와 세계를 함께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담론>의 신영복 선생은 계속해서 세계 인식의 확장을 강조한다.인식의 확장에서 우선 돼야 할 것은 '나'라는 사람에 대한 인식이다. 나를 아는 것에서만 끝나서는 안된다. '나'를 알고 '너'를 아는 관계가 이어져야 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사람이 서 있다. 실천적 중심에 서 있는 우리는 '공부'를 통해 인식을 확장시켜야 한다. 그는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공부라 말한다. 세계는 내가 살아가는 터전이고 나 또한 세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2019년의 끝자락에 <담론>이란 책을 만나게 되어 다행이다. 얼마 전 북 파티에서 인생 책이 무어냐는 질문에 나는 아직 인생 책을 만나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 내게 다시 묻는다면 <담론>이라 말할 것이다.
다른 책들과는 달리 이 책을 읽으면서 특이한 체험을 했다. 주역, 공자, 맹자 등 동양철학의 예시를 드는 내용이 나올 때 어렵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몇 챕터는 그냥 넘기자 생각했다. 어려운 부분을 넘기고 다른 챕터를 읽는데 이상하게 어렵지만 그 부분을 꼭 읽어야 한다는 마음이 자꾸 들었다. 이해하지 못해도 일단 읽어나 보자는 마음으로 넘겼던 부분으로 다시 돌아와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그냥 넘겨 버리려던 부분에서 큰 교훈을 얻었다. 그냥 넘겼으면 어쩔 뻔했느냐며 반성하며 읽었다. 어느 문장을 읽을 땐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책을 읽고 난생처음 가슴으로 진실된 울림을 느꼈다.
내가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햇볕' 때문이었습니다. 겨울 독방에서 만나는 햇볕은 비스듬히 벽을 타고 내려와 마룻바닥에서 최대의 크기가 되었다가 맞은편 벽을 타고 창밖으로 나갑니다. 길어야 두 시간이었고 가장 클 때가 신문지 크기였습니다. 신문지만 한 햇볕을 무릎 위에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은 살아 있음의 어떤 절정이었습니다. 내가 자살하지 않은 이유가 햇볕이라고 한다면,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하루하루의 깨달음과 공부였습니다. 햇볕이 '죽지 않은'이유였다면, 깨달음과 공부는 '살아가는' 이유였습니다. 여러분의 여정에 햇볕과 함께 끊임없는 성찰이 함께 하기를 빕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신영복 선생이 수감생활을 하면서 자살하지 않고 살아온 까닭을 '햇볕'이라 이야기할 때는 감동이 벅차올라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내가 왜 눈물이 나는지 생각해 보기도 했다. 눈물을 흘린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어 더 눈물이 났다.
그는 자유를 억압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삶의 이유를 찾았고, 제약적 공간 속에 놓인 자신과 타인의 관계를 통해 한 사람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이 되는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인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며 해답을 찾으려 애썼다. 이런 그가 몇 해전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에 또 슬픔이 밀려왔다. 그는 인생의 꽃다운 시기를 감옥이라는 곳에서 보냈지만 그곳은 그에게 있어 세상 그 어떤 곳보다 희망을 발견할 수 있던 곳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관계를 통해 얻은 깨달음이 이야 말로 나를 형성하는 정체성이며 그 정체성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이 책을 통해 나의 정체성이 어느정도 또렷해졌다. 나의 삶을 보다 적극적으로 살아갈 용기가 더 생긴 것 같아 다행이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자유를 깨달은 그의 말을 되새기며 우리 모두가 관계속에서 고유의 정체성을 찾고 자유로운 삶의 여정으로 나아가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자기의 이유', 이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자부심' 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한 아무리 멀고 힘든 여정이라 하더라도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이유'를 줄이면 '자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참고도서 : 신영복 <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