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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kukuna Jan 31. 2020

지금 당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그것

 


이 낙타 그림이 뭔지 알아? 사막의 유목민들은 밤에 낙타를 이렇게 묶어두지. 근데 아침에 끈을 풀어. 보다시피. 그래도 낙타는 도망가지 않아. 나무에 끈이 묶인 밤을 기억하거든. 우리가 지닌 상처를 기억하듯. 과거의 상처가 , 트라우마가 현재 우리의 발목을 잡는단 얘기지. 난 화장실, 넌 불안증. 알아, 니가 알다시피 내 침실은 여기거든.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 중에서   




<괜찮아 사랑이야>의 재열은  강박증을 갖고 있다. 그는 몇 가지 색상에 집착하고  욕조에서 잠을 잔다. 욕조에는 노란색 쿠션과 이불이 깔려 있다. 몸을 한 컷 웅크리고 들어가는 욕조안에 있을 때 그는 편안함을 느낀다. 마치 엄마 뱃속에 있을 때처럼.


재열이 어릴 적 어머니는 재혼을 했다. 재혼남은 매우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걸핏하면 아내와 아이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봤지만 허사였다. 사람들은 의붓아버지가 폭력을 휘두를 때면 '남의 가정사니까'라고 말하며 재열과 엄마를 외면했다.  결국 재열의 집에선 큰일이 일어나고야 만다. 재열의 어머니가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살해하는데 그 죄를 형이 뒤집어쓰고 감옥에 가게 된다.


그렇게 고통스웠던 재열의 어린 시절은  무의식 속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어른이 된 재열은 상처 받은 내면 아이를 강우라는 환상의 인물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 중에 올라오는 고통스러운 기억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화장실로 종종 숨어든다. 화장실은 문은 오직 자신만 여닫을 수 있도록 도어록까지 설치했다. 화장실은 외부의 침입자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요새다. 그는 그곳에 처음으로 자신처럼 과거의 상처로 인해 불안증을 갖고  어른이 된 여자 해수와 함께 하며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 나간다.




# 트라우마 삶을 뒤흔들어 놓다.



트라우마는 감당할 수 없는 어떤 특정한 사건이나 상황 속에 놓여 있을 때 그 공포와 불안감이 무의식에 각인되었다가 후에 그러한 감정들이 다시 재현되는 것이다. 불안, 만성질환, 공포증, 강박적 사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 심신을 쇠약하게 만드는 증상이 나타나 현재를 온전히 살아가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마음에 새겨진 감정들로 인해  대인관계, 사회부적응 등의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사회적 재앙이나 자연재해 등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노출되면 트라우마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개인적인 삶에서 오는 트라우마, 즉 가족이나 친구 직장동료 등 개인적인 삶에서도 트라우마가 생길 수 있다. 특히 가족이라는 끈끈한 연대로로 맺어진 관계 안에서의 트라우마는 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되는가>의 저자 마크 윌런은 트라우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큰 사건에 휘말리지 않아도 우리는 가족과 부대끼며 사는 동안 트라우마로 남을 만한 일을 겪는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인간이 경험하는 트라우마의 대부분은 가족에게서 온다. 가족과는 다른 인간관계에서 볼 수 없는 강력하고 끈끈한 정서적 연대를 이루며 살기 때문이다. 가정폭력, 학대, 근친상간, 살인 등 가족 안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과 애착의 박탈 또는 결핍은 당사자뿐 아니라 이후에 태어나는 가족 구성원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되는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연구로 널리 알려진 네덜란드 출신 정신의학자 베셀 반 데어 콜트는 트라우마가 일어나는 동안 우리의 뇌에서는 언어중추가  닫히고 현재의 순간의 경험을 담당하는 내측 전두엽 피질이 차단된다고 한다. 트라우마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공포가 생기고 그 공포는 우리의 말문을 굳게 닫아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말문을 닫아 건 감정들은 무의식에 고스란히 남겨진다. 그리고 트라우마를 겪었던 비슷한 상황을 다시 체험하게 될 때 역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자신의 상태를 표현할 수도 타인에게 감정을 전달할 수도 때론 도움이 필요할 때조차 말문이 막혀버린다. 표현하지 못 한채 무의식의 수면 깊이 침잠한  트라우마는 한 사람의 생에서 끝나지 않고  후대까지 영향을 미친다.




<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되는가>의 저자는  과학자들이  트라우마가 한세대에서 다음 세대, 즉 3대에 걸쳐 유전이 될 수 있다는 생물학적인 증거들을 속속 밝혀내고 있다고 한다. 뉴욕 마운트 시나이 의과대학 정신의학과 신경과학 교수 레이첼 예후다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권위자이다. 그녀는 9.11 테러를 목격한 임산부와 이들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의 코르티솔 수치를 비교했다. 코르티솔은 부신피질에서 분비되는 스테로이드 호르몬으로 급성 스트레스나 충격을 받을 때 우리 몸이 정상으로 돌아가도록 도와주는 스트레스 호르몬이다.


예후다는 임신 중이었던 산모와 아기의 코르티솔 호르몬이 서로 연관이 있음을 알아냈다.


트라우마의 경우에 코르티솔 수치가 낮은 것은 어떤 후성유전학적 변화가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스트레스에 더 과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유전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정신질환과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더 걸리기 쉬운 체질이 된 것이죠.

 <sbs 스페셜 다친 마음의 대물림 트라우마 삼대를 챙긴다> 인터뷰 내용 중에서


출처: <SBS 스페셜 다친 마음의 트라우마에 관한 기사 >






# 현재 진행중인 치유되지 않은 트라우마


부모의 감정이 자궁 속에서 전해졌든, 인생 초기에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전이되었든, 아니면 무의식적인 의리나 후성유전학적 변화로 옮겨왔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과거에 무언가 해결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인생이 그것을 우리에게 보낸다는 점이다.

<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되는가>중에서



과거의 경험들은 고스란히 남아 현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무의식에 새겨진 나쁜 기억들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현재를 갉아먹는다. 문제의 중심을 사건에 두거나 그 일을 되뇌며 외부환경의 탓으로 돌린다. 때론 그 화살이  자신의 내면을 향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나쁜 기억들은 불평과 불만의 감정으로 다시 자리 잡는다. 도무지 끝이 보일 것 같지 않다. 반복되는 불행의 굴레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현실 속 지옥이나 다름없다. 나를 집어삼키는 이 거대한 불행에서 나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 삶을  회복시키는 첫걸음



언어로 기억되지 않고 신체 감각, 이미지, 감정으로  무의식에 저장된 트라우마의 파편들은 내면에서 살아 움직이면서 우리의 감정을 북받치게 만든다. 과거의 공포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상황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벌어질지 모른다. 감정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다. 이러한 감정들을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만들어야 한다. 어떤 단어나 문장으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언어로 표현해 냄으로 트라우마 치유가 시작된다. 기억을 재생시킨다는 것은 분명 힘든 일이다. 하지만 시작해야 한다.


<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되는가>에서는  트라우마를 표현할 수 있는 '핵심 언어'를 찾아 연결해야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본래의 행로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일단 핵심 언어로 상관관계를 파악하고 치유 이미지와 경험에 집중하면 새로운 신경 경로를 만들 토대가 놓이고, 거기서 부터 놀랍도록 효과적인 치유가 시작된다.



# 핵심 언어 지도의 네 가지 도구 




책에서는 트라우마의 치유를 위해  위의 핵심 언어 네 가지 도구를 이야기하며 각 도구에 해당하는 글을 적어보도록 권한다. 언어로 미쳐 표현되지 못한 감정들을 짧은 단어로부터 시작해 문장으로 연결해 가다 보면 자신의 핵심 트라우마가 어디서 기인됐는지 그리고  그 감정들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게 되면서 치유의 길이 열린다. 자신이 미쳐 알지 못했던 가족사에서 연결된 트라우마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가족과 화해하고 사건을 재구성하며 트라우마를 내려놓고  유전의 그물망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다.






지금까지 트라우마는 당사자가 직접  충격적인 상황들을 겪어야만 생기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트라우마가 유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예후다 교수가 연구한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자녀들과 9.11 테러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유전된 트라우마가 한 사람의 일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혹시 나에게도 대물림된 어떤 트라우마가 있지 않을까 하고.  



# 나의 이야기



작년 가을 즈음부터는 잠자리에 들기 위해 불을 끄고 침대 위에 누우면 헥헥 거리며 숨이 차올랐다. 어느 땐 숨이 너무 차올라 이러다 숨이 멎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밀려왔다.


이 증상이 처음 나타난 게 작년 가을 한창 혼자 이사 준비 때문에 애를 쓰고 있을 때였다. 집을 빼는 문제부터 이사 차량, 비용, 짐 정리, 재정관리 등등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니 힘이 많이 부쳤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쉬이 도움을 요청할 만한 가족도 내 곁엔 없었다. 당시엔 이사 날짜가 점점 다가오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 그런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이사를 하고 난 후 넉 달이 지났는데도 증상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숨은 계속 차올랐다. 숨이 찬다는 걸 의식하고 숨 고르기를 해야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마침 이 책을 읽으면서 트라우마가 유전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혹시 이런 증상이 유전된 트라우마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얘기한 대로 나의 트라우마에 대한 핵심 언어를 찾아보기로 했다.


1. 핵심 불평

자신을 괴롭히는 주된 문제로, 내면화한 것일 수도 있고 외부를 향한 것일 수도 있다. 흔히 트라우마 경험의 파편에서 유래하며 핵심 언어로 표현된다.


'무책임'


나를 제일 분노케 하는 상황은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책임감이 없을 때다. 특히 내가 전혀 관여하지 않은 일인데 상대방이 책임지지 못하고 그 피해가 고스란히 내게 오면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른다. 한번 폭발한 분노는 끝을 모른 채 지속된다. 내 삶의 핵심 불평은 타인의 무책임함으로 아무 잘못 없는 내가 피해를 보는 것이었다.



2. 핵심 묘 사어

부모에 대한 무의식적 감정을 드러내는 형용사와 짧은 묘사 어구

 


나의 아버진 자신의 삶 조차 제대로 케어할 수 없는 상태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결혼도 하기 전에 나를 먼저 임신했다. 두 분은 나를 낳고 동생을 낳은 뒤늦게 결혼식을 올렸다. 어릴 적 내 기억 속 아버진 어머니에 대해 좋은 소리를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다.


내가 아홉 살 되던 해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자의 길을 선택했다.  아버진 어머니와 헤어지고 나서 술에 취해 종종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네 엄마가 널 갖지만 않았어도. 넌 어쩜 그리 네 어미랑 똑같니. 말도 없고. 입 꾹 다물고 말이야. 어휴 답답해’ 아버지는 살아생전 나를 갖지 않았으면 네 엄마와 같이 살지도 않았고 내 인생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는 한탄을 자주 했다. 동생과 나는 무책임한 아버지 밑에서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성장했다. 어린 두 꼬마는 살기 위해 스스로 모든 촉을 곤두 세우는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방법이 옳고 그른 것인지 알지 못한 채.



각자의 삶을 선택한 두 분을 생각하면 무책임하고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3. 핵심문장

마음속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두려움을 표현하는 강한 감정이 실린 짧은 문장이다. 유년기나 가족사에서 해결하지 못한 트라우마의 잔류물이 담겨있다.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늘 불안했다. 부모로부터 정서적 안정감을 받는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왜 아버지는 우릴 키우겠다고 생각하신 걸까. 왜?


어머니와 헤어진 아버지는 마지막 남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동생과 나를 잘 키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우리를 데려간 걸까. 아님 어머니가 이젠 무책임한 남편 곁을 떠나 자유롭게 살고 싶으니 아이들은 맡지 않겠다고 양육을 떠 넘긴 걸까? 두 분의 속 사정이 궁금했다. 하지만 물어볼 수가 없다. 지금 내 곁에 두 분은 계시질 않는다.


어찌 됐든 어머닌 우리 곁을 떠났고 양육을 맡은 아버진 동생과 나를 거의 아니 정말 방치했다. 안전망을 잃었단 상실감은 어린아이에게 너무 큰 상처가 되었다. 아무도 우릴 돌봐주지 않는다는 건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감정은 자라오면서 피해의식으로 고스란히 자리 잡았다.



4. 핵심 트라우마

생애 초기나 가족사에 미해결 상태로 남은 트라우마로 행동, 선택, 건강, 안녕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마음 한편 상실감은 여전히 컸다. 누군가를 언제 또 잃을지, 아니 누군가가 날 언제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늘 초조했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 때문에 사람에게 다가가 관계를 맺는 일은 쉽지 않았다. 특히 누군가 내게 가까이 다가오면 의심부터 했다. 아무 조건 없이 내게 관심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의식에 사로잡힌 피해의식 때문이었다.  누군가 한발 다가오면 한발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외로움에 깊게 사무치는 어느 날 누군가 손 내밀면 그 관계에 너무 깊이 빠져들어 내 존재를 잊어버리고 지내기도 했다. 사랑받고 싶고 관심받고 싶어 모든 걸 상대방에게 맞췄다. 그러다 문득 상대방이 날 두고 떠나 버리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에 또 불안해졌다. 내가 끝내 두려워 바라보고 싶지 않았던 것은 언제 또 혼자 남겨질지 모른다는 '외로움'이었다.  



가족 중 누군가가 견디기 힘든 트라우마를 경험하거나 막대한 죄책감이나 비탄으로 고통스러워할 때, 그 감정이 지나치게 강하면 혼자 감당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버린다. 고통이 너무 크면 회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 본성이다. 그러나 고통스럽다고 감정을 외면하는 것은 그 고통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나는데  반드시 필요한 치유 과정을 스스로 중단하는 일과 같다.

<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되는가>중에서



#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과거. 하지만 현재는 내 선택으로 바꿀 수 있다.


핵심 언어를 알아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오랜 시간 묻어 두었던 감정들을 어떻게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몰라 끙끙거렸다. '책임감'이라는 단어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다는 걸 알고 '책임감'에 따라오는 감정들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계속 파고들었다. 그러다 보니 부담감, 상실감, 외로움이라는 감정 언어들이 잇다라 수면 위로 떠올랐다. 책임감이 없었던 내 부모들의 모습에 분노가 일었고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책임감에 집착했다. 내게 유일하게 남아 있는 혈육인 동생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역시 책임감으로 나타났다.


책임감은 상실감으로부터 멀리 달아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책임감이 있어야 사람들이 내 곁에 영원히 함께 해줄 거라고 믿기 시작했다. 책임감은 점점 부담스러운 삶의 짐이 되었다. 상실감을 다신 맛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책임감 있게 행동하려 애썼다. 내 삶도 나와 함께하는 이들에게도. 내게 상실감은 삶의 좌절이었다. 내 곁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 다시는 외로움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과거를 재구성해야 했다. 기억 속 부모와의 관계를 다시 맺기 위해 그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기로 했다. 내 부모가 힘들었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이해하고 싶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 어머니는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어머니의 입장이 한번 되보기로 했다. 한 여자로서 그녀의 삶이 어땠을지 상상했다.


'아버진 분명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어머니에게도 했을 거야. 답답한 여자라고. 그리고 어머니가 날 임신했을 때도 어머니 옆에 있어주지 않고 밖으로만 돌고 술만 마셨겠지. 어머니는 혼자 모든 걸 감당해야 하는 부담감에 힘들었을 거고. 어떤 말을 해도 아버지가 들어주지 않으니 힘들다 어떻다 아무 말도 안 했을 거야. 나를 갖었을 때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을까. 그리고 외로웠을 거야. 곧 태어날 아이에 대한  책임감도 부담스러웠겠지. 내가 어른이 되어보니 그 입장이 이해가 되는 것 같아’


 그리고 정말 밉고 싫지만 아버지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았다.


‘아버지 역시, 자신이 어떻게 어른이 되어야 하는지 몰랐을 거야. 할머니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으니. 귀하게 자란 할아버지는 사업한다고 돈을 다 날리시고 아픈 할머니 뒷바라지하느라 아이들은 뒷전이었어. 그래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지 할아버지께 배울 수 없었던 거야. 부모의 관심 밖에서 벗어난 아버지는 그래서 더 방황하셨을지도 몰라. 아버지도 사랑받고 관심받고 싶었을 거야. 아버지도 '아버지' 역할을 처음이었으니까. 두려웠을 거야. 자기도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고 기대고 싶었을 텐데'




내가 무책임한 행동을 할 때 모두가 나를 떠나면 어쩌나. 그리고 혼자 남겨지면 어쩌나 하는 외로움이 모두 내 감정이 아니란 걸 알았다. 아버지도 그랬고 어머니도 그랬다는 걸 이해하고 나니 오히려 내 마음이 이해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감정의 소용돌이가 삶 전체를 흔드려 할 때 내 의지로 빠져나올 수 있는 힘이 생겼다. 트라우마에 반응하는 속도와 감정의 깊이도 조절할 수 있게 되면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일도 편해졌다. 내 존재 이상의 그 무엇이 나를 감싸 안고 나의 안녕을 기원해 주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내 마음을 용기 내어 드려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트라우마는 더 이상 날 헤치지 않는다.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는  몸에 대한 관심은 많지만 정작 마음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인생에서 가장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몸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거의 집착증에 가깝다. 그런데, 마음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어떠한가? 마음이 감기에 걸리고, 마음이 암에 걸리고, 마음이 당뇨와 고혈압에 걸린다고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는가? 누구나 행복을 원하면서, 행복의 열쇠를 쥐고 있는 마음에 대해선 얼마나 많은 편견을 가지고 방치하고 함부로 대하고 있나? 이 드라마는 우리가 그간 쓸데없이 숨겨왔던, 다 안다고 하지만 사실은 잘 모르는, 우리 마음의 상처, 마음의 병에 관한 이야기다.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 홈페이지에서



지금 당신의 마음이 아프다고 나를 좀 봐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마음의 소리를 외면하지 말고 마음에게 귀를 기울여 보자. 당신이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그리고 그 마음의 소리를 알아채는 순간이 바로  당신이 모르고 있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길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참고도서 <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되는가>


#씽큐베이션#체인지그라운드#트라우마#트라우마는어떻게유전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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