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는 유기체는 탄생과 동시에 '관계'라는 그물망에 자연스레 놓인다. 나를 낳은 부모와의 관계를 시작으로 다양한 관계 속에 머무르면서 크고 작은 수많은 경험들을 겪으며 삶을 꾸려나간다. 관계의 경험은 인간에게 다양한 감정을 선물한다. 긍정적이고 삶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감정은 물론이지만 때론 존재가 위협당할 만큼의 공포스러운 상처를 내기도 한다.
이렇게 한 사람에게 새겨진 과거의 상처들은 무의식 속에 조각난 파편의 기억으로 남아 떠돈다. 그러다 문득 어느 순간 어느 때. 과거 속 어떤 파편의 조각이 현재 상황과 맞물려 감정을 자극하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파편으로 저장된 그때의 기억과 감정들이 한데 뒤엉켜 현재의 나를 분노하게 만든다.
분명 어떤 일들이 마음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무의식에 자리 잡은 어떤 사건들이 현재와 연결 되어 나를 집어삼킬 것 같은 두려움과 고통을 주는 것인지 도통 알아낼 수 없을 때가 있다. 삶이 힘에 부친다는 생각에 이대로 모든 걸 멈추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아주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의지로 생의 모든 기억들을 취사선택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신경외과 교수이자 작가인 올리버 색스는 '기억을 잃은 존재는 생명력을 잃은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기억은 존재에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스스로 원치 않았던 외부의 무자비한 공격들로 인해 내가 고통받았고 힘겨웠던 기억들도 존재를 존재케 하는 이유가 될 수 있는 걸까? 그렇다면 우린 존재를 소멸시킬 수도 있는 거대한 힘을 가진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어떻게 대해야만 하는 걸까...
어떤 이들의 인생은이야기처럼 흘러가는 것 같다.내 인생에는 마침표와 출발이 많았다.트라우마가 그렇다.줄거리 사이에 끼어드는 것이다.(중략) 갑자기 일어나고,삶이 다시 이어진다.그 누구도 각오라 하고 알려 줄 수 없다.
출처: <몸은 기억한다>내용 중, 제시카 스턴 <거부:테러의 기억>
인생에도 예고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특히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사건들에 대해서 말이다. 모든 걸 집어삼킬 것 같은 고통에 대한 준비를 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피해 멀리 달아나 버릴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인생은 모두가 알다시피 그렇지 않다. 알 수 없는 일들이 부지기수로 벌어진다. 처참하고 비통한 고통이 끝이 날 거 같다가도 계속 이어진다. 그러다 어느 날 나도 모르게 다시 잠잠해진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인간은 존재가 위협을 받을 만한 공포스럽고 두려운 경험을 하게 되면 심리적인 외상이 생긴다. 우리는 이것을 '트라우마' 또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라 부른다.
본디 내향적인 내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하고 있다. 워낙 내향이 강한지라 일을 할 때는 외향의 가면을 쓴다. 원래 사람과의 교류를 어려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함께 근무하는 남자 직장 동료가 문자로 고객 응대를 잘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고객은 제대로 서비스 요청을 한 건데 그 말을 잘 못 알아듣고 남자 직원이 딴소리를 했다. 고객은 화가 잔뜩 나서 업장으로 씩씩거리며 찾아왔다. 그 고객은 체구가 크고 부리부리한 눈매에 억양이 세고 굵고 거친 목소리를 가진 삼십 대 후반 정도의 남성이었다. 업장에 들어선 고객은 나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내가 제대로 말했는데 왜 딴소리를 하냐고, 응대를 이딴 식으로 해! 내가 잘 못 했어? 네가 잘못했잖아! 어! 대답해봐! ㅆㅂ' 하필 그때 대기하는 고객들이 업장에 꽉 차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내 앞에서 고래 고래 소리를 치는 남성을 보며 공포와 두려움, 수치심이 밀려왔다.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내용조차 몰랐던 나는 화가 난 고객이 내리치는 칼날 끝을 마주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아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라 땅바닥만 쳐다봤다. 숨이 가빠 왔다. 호흡이 점점 어려워졌고 명치가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은 다시 힘을 잃어 가는 듯했다.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깨부터 목덜미까지 모든 근육이 딱딱해졌다. 고개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손도 머리도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전신 마비가 온 기분이었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누가 날 도와주길 바랐다.
하지만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고 외면했다. 그 사건의 발단이었던 남자 직원은 옆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시치미를 떼고 가만히 서있었다. 남성 고객은 자신의 감정을 내게 다 쏟아붓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어떤 방어 태세도 갖추지 못한 채 돌덩이처럼 굳어 버렸던 나는 남자가 떠난 뒤 말없이 눈물을 훔쳤다. 마음속에서 어떤 불덩이 같은 화가 치밀어 올라 내 몸을 온통 휘감았다.
사건 전말이 어떻게 된 지 알고 난 후 남자 직원이 당연히 사과를 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과는커녕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사건에 대한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또다시 이와 같은 일이 몇 번 더 발생했다. 그때마다 내 몸은 격하게 반응했다.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뿐만 아니라 일을 하는 동안에도 그리고 퇴근 후에도. 그렇게 며칠이 몇 주가 되고 몇 달이 되었다.
함께 근무하는 남자 직원을 볼 때마다 수치심과 공포,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가 내 옆에서 숨 쉬고 있다는 자체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싫었다. 어느 날엔 그의 머리를 돌망치로 내려쳐 산산이 부숴버렸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무책임한 부모님 때문에 책임감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나. 특히 아버지의 무책임 함에 대한 분노가 더 했기에 남자 직원의 위와 같은 태도로 인해 트라우마는 몇 배로 더 커져버렸다. 그리고 책임감에 대한 집착은 더 강해져만 갔다. 난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는데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거지? 아버지의 무책임함으로 인해 어린 내가 세상과 타인들의 비난을 견뎌야 했던 지난 날들과 남자직원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들이 오버랩되면서 계속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미안하다'라고 표현하지 않음에 분노는 더 극에 달했다. 아직도 일을 할 때 내 시야에 남자 직원이 보일 때마다 심장이 찢기는 것 같은 통증과 숨 가쁨, 목덜미가 뻣뻣해지는 증상이 나타난다.
과거 부모의 무책임함으로 인한 트라우마의 파편을 건드려 수면 위로 올라오게 만든 사람과 매일 오랜 시간 함께 일을 하며 지내다 보니 몸으로 나타나는 트라우마의 증상은 점점 심해져만 갔다.
과거와 현재의 감정이 뒤죽박죽 섞여버렸고 무책임함의 끝자락에 있었던 마주하고 싶지 않은 외로움이 공포가 되어 잠들기 전마다 숨이 차올랐다. 내일 또 그 사람과 마주해야 하는 환경에 놓인다는 자체를 이제는 견딜 수 없다는 표현이 온몸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몸은 기억한다>의 저자는 트라우마를 남긴 사건을 겪고 나면, 위험과 안전에 관한 인식이 바뀌고 이전과 다른 신경계로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저자는 포지스의 이론에서 자율신경계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핵심적인 생리학적 상태를 조절한다고 이야기한다.
1단계 '사회적 개입 유도'
위험에 처했다고 느끼는 순간마다 본능적으로 가동된다. 이 단계에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과 지원, 편안함을 구한다. 그런데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거나 위험이 갑작스럽게 닥쳐 그대로 맞닥뜨리면 좀 더 원시적인 생존 방식이 되살아 난다.
2단계 ' 싸움 또는 도주'
공격을 가한 대상과 맞서 싸우거나 안전한 장소로 달아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상황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거나, 제압당하거나, 붙잡혀서 그 노력에 실패로 돌아가면 이제 환경과 자신을 차단시키고 에너지 소모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방법으로 스스로를 지키려 한다.
3단계 '붕괴'
위의 2단계 상황에서 빠져나가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방법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환경과 자신을 차단시키고 에너지 소모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방법이다. 이 상태를 '얼어붙은 상태' '붕괴 상태'라고 한다. 이때 등 쪽 미주 신경 복합체에서 신체가 물러서서 중단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이는 위험에 대처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파충류의 뇌가 관여하는 마지막 응급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대부분 가해자에게 꼼짝 못하고 잡혀 있거나 아이가 자신을 겁주는 양육자에게서 도망가지 못하는 상황처럼 신체를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할 때 관여한다.
기능이 정지되고 세상과 분리되는 반응을 이끌어내는 등 쪽 미주 신경 복합체는 진화상으로 고대에 해당하는 부교감 신경계의 한 부분으로, 설사나 구역질 등 소화기관 증상과 관련이 있다. 또 심장 박동을 늦추고 호흡을 얕아지게 만든다. 이 시스템이 가동되면 상대방이나 자기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이 더 이상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인지 기능이 중단되면서 신체적 고통도 더 이상인지 하지 못한다.
<몸은 기억한다>p.142
저자는 트라우마로 인해 '싸움-도주' 반응에 갇혀버리거나 만성적인 기능 정지가 된 상태의 사람들이 이 방어 기능의 활성을 없애고 생존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1. 과도한 흥분을 잠재워라
2. 마음 챙김 이 없으면 마음도 없다.
3. 관계
4. 공동의 리듬과 동시성
5. 몸과 몸 닿기
6. 행동하기
다른 사람과의 리듬과 본능적인 감각의 인지, 목소리와 얼굴로 나누는 의사소통이 필요한 이러한 활동들은 사람이 싸움-도주 상태에서 벗어나 위험을 인지하는 현 상태를 재편하고 대인 관계를 다루는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몸은 기억한다.>p.147
인간은 점점 더 복잡해지는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가기 위해 진화해 왔다. 무리를 이루며 살다 짝짓기를 하고 아이를 기르고 공통의 적으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하기도 한다. 이렇게 진 사회성을 가진 개체로 살아가기 위해 배 쪽 미주신경 복합체가 발달하게 되었다. 저자는 이 복합체가 더 효율적으로 작동함으로 부교감&교감신경계가 더 조화롭게 활성화되고 개개인의 생리적 특성은 같은 집단에 속한 다른 이들의 특성에 맞게 조율된다고 한다. 생애 초기 아이들은 파충류의 뇌가 기능의 많은 부분을 운영한다. 미주 신경 복합체의 이런 가능들은 부모가 아이 스스로 조절 능력을 갖추도록 돕는다. 부모는 점점 성장하는 아이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고 미소를 짓소 관심을 보이면서 아이의 배 쪽 미주 신경체의 자극을 높인다.
부모와 아이의 이러한 상호작용은 아기의 정서 자극 시스템이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도록 도와준다. 배쪽 미주신경 복합체는 아기가 빨고 삼키는 행동과 표정, 후두에서 나오는 소리를 조절한다. 자극이 주어지고 이와 같은 기능이 생겨나면, 아이는 즐겁고 안전한 기분을 느끼며 이 기분은 이후 발달하는 모든 사회적 행동의 토대 형성에 도움이 된다. (내 친구인 에드워드 트로닉은 오래전에 내게 뇌는 문화적인 기관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즉 경험이 뇌를 형성한다는 뜻이다)
<몸은 기억한다.>p.143
유아기 때 부모와 이런 교감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안전한 양육환경에서 자라며 주변 관계와 외부 환경도 안전했다면 트라우마라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평안한 이야기로 흘러가는 인생을 살지 못했고 인생의 마침표와 출발이 많았던 이가 성인이 된 후 안전한 장소, 관계,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를 극복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단, 관계 속 신뢰가 전제가 되어야만 한다.
겁이 날 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서 나온 안심시켜 주려는 음성과 든든한 포옹만큼 마음을 진정하는데 튼 효과를 발휘하는 건 없다. 다 큰 어른도 깜짝 놀라면 겁에 질린 아이들이 반응하는 것과 똑같은 위안 요소에 반응한다. 즉 부드럽게 안고 달래주는 손길, 자신보다 덩치도 크고 더 강한 누군가가 그 문제를 해결해 줄 테니 안심하고 잠들어도 된다는 확신에서 위안을 느낀다. 회복되려면 몸과 마음, 뇌가 이제 안심하고 놓아도 된다고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본능적인 감정까지 안전하다고 느끼고, 그 안전한 기분을 과거 무기력했던 기억과 스스로 연결할 수 있을 때만 확신할 수 있다.
<몸은 기억한다>p.331
과거의 트라우마 조각을 수면 위로 띄웠던 남자 직원의 사건 후 가슴 통증은 더 심해졌다. 며칠 전 나의 소울메이트와 통화를 하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차오르는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친구에게 말했다.
'나 요즘 계속 숨차고 가슴이 답답하다고 그랬잖아. 그런데 너랑 이야기하니까 마음이 뻥 뚫린 기분이야. 나도 모르고 있었는데 지금 막 통화를 끊으려고 하다가 내가 숨을 가쁘게 쉬고 있질 않다는 걸 알았어. 네가 나한테 이런 존재구나. 내겐 없으면 안 될 존재. 고맙다야~'
존재가 존재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생명력이 있는 존재였다는 것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신뢰가 다져진 관계 속에 머물 때 트라우마가 몸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안심이 되었다. 이 증상이 내 의지로 안전한 관계속에 머물면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의 저자는 위의 방법들을 통해서도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하면서 한 가지를 더 이야기한다. 그것은 바로 언어를 통해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일이다. 앞서 읽은 <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되는가>에서도 글쓰기가 트라우마를 치유하는데 탁월한 기능을 한다고 말했다. <몸은 기억한다>에서도 내면의 감정에 다가다 보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고, 이어 기억이 나고 그 내용을 기록할 수 있는 문장이 떠오른다고 한다. 그것들을 적어 내려가다 보면 오로지 자신만이 연상할 수 있는 어떤 이야기로 표현된다. 글로 쓴 기억들을 나중에 읽어보면 파편된 트라우마의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조합된다. 그렇게 조합된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느끼면 현재와 과거를 분리 할 수 있게 된다.
지금 내가, 그리고 씽큐베이션 '자산시'에서 함께 하고 있는 글쓰기가 바로 이런 것이다. 처음 막연한 기억들을 떠올리려 할 땐 막막하고 두렵고 힘이 든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를 나도 모르게 적어내려가다보면 결국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이 된다. 글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 상처로부터 해방되고 치유되는 감정이 느껴진다. 이제 다시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생긴다.
트라우마가 한순간에 사라지지 않겠지만 이것만은 확실하게 믿는다. 트라우마가 서서히 과거 속 한 이야기가 담긴 경험으로 자리를 잡고 현재의 나를 집어 삼키지 않을 것이란 걸.
<참고도서: 몸은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