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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kukuna Oct 07. 2019

착한 일 안 해도 괜찮아.

일상이 선물인 걸 뭐......가끔은 아닐 때도 있지만 말야.

# 23일차 질문


기념하지 않는 기념일이 있다면?


언제부터였을까? 특별히 기념해야 하는 날들을 챙기지 않기 시작한 것이......

어릴 땐 착한 일 하고 부모님 말씀 잘 들으면 크리스마스에 내가 원하는 선물을 저 멀리 눈이 많이 내리고 추운 곳에 사는 산타 할아버지가 우리 집 굴뚝을 타고 내려와 내가 잠든 사이에 머리맡에 둔 양말 속에 두고 간다고 철석같이 믿었다.(그때 우리 집엔 굴뚝이 없어서 엄청 걱정했다. 선물 안 주고 갈까 봐) 그래서 늘 크리스마스 전날 밤엔 내가 가진 양말 중 가장 커다란 양말을 버리 맡에 매달고 잠들었었다.(큰 선물 받고 싶어서)

유치원에 다니고 있던 겨울 어느 날. 선생님께서 유치원에도 산타 할아버지가 온다고 하셨다. 난 집으로만 산타 할아버지가 오시는 줄만 알고 있었다. '유치원에도 오시면 그럼 선물을 두 번이나 받는 거야?'라며 마냥 즐거워했다. 하얗고 덮수룩한 턱수염에 새빨갛고 풍덩한 옷차림과 모자. 안경을 코 끝에 살짝 걸친 산타 할아버지는 썰매에 선물 보따리를 가득 채우고 내가 다니는 유치원에 오셨다.

아이들 이름을 차례차례 부르며 빨갛고 커다란 마술 주머니 안에서 선물을 하나하나 나누어 주며 '허허 허허'라며 호탕한 웃음을 지으셨다. 나보다 먼저 이름을 불린 친구들이 앞으로 나가 산타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선물도 받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앞서 선물을 받은 아이들은 하나같이 한 손으로 들기 어려운 반짝이는 포장지에 쌓인 커다란 선물을 받았다. 친구들이 받은 선물을 보며 '나도 착한 일 엄청 많이 했으니까 쟤들보다 더 큰 선물 받겠지?!'라고 생각하며 내 이름이 불리길 기대하며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내 이름이 불렸다.  난 산타 할아버지 무릎에 철썩 앉아 빨간 주머니 속에서 선물이 어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산타 할아버지가 내겐 건넨 선물은 아주 작았다. (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 주먹 네 개를 모은 정도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선물을 받은 난 무척 실망해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다른 친구들 보다 착한 일을 많이 안 한 건가. 나 정말 착한 일 많이 했는데, 왜 내 것만 이렇게 작아...... 산타 할아버지 정말 미워!나빠!!!' 선물을 받은 난 친구들이 보지 않게 구석으로 가서 속상한 마음에 눈물을 글썽 거리며 선물 포장지를 뜯었다. 그 안에 들어 있던 건 하얀 인형이었다. 끈에 매달린 하얀 솜털 덩어리 두 개가 인형의 두 귀였고, 핑크색 상의만 입고 있는 자그마한 몸집을 가진. 이게 토끼인지 곰인지 알 수 없는...것이 내 선물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선물이 우리 엄마가 유치원으로 보내줬다는 사실을 말이다. 점점 머리가 커 가면서 산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어른이 되고 난 후 산타에 대한 환상은 와르르 무너 졌지만 일 년에 한번 있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낭만적으로 즐기고 싶었다. 이십 대 후반까지 크리스마스는 무언가 특별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난 매년 돌아오는 성탄절엔 크고 작은 이벤트를 즐기며 보내곤 했다.

나이가 서른이 넘어가기 시작하면서 크리스마스는 뭔가 특별함이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아! 크리스마스 뭐 별거 없잖아!!!' 이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별다른 까닭은 없었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 자체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들이 부피가 커져가면서 삶의 무게감이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오롯이 나만이 즐길 수 있는 평범한 기념일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꼭 특별함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아도 일상 자체만으로, 숨 쉬고 있단 자체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어떤 특별한 순간이 될 수 있단 걸 알았다.(간혹 기분에 따라 아닐 때도 있지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2019년 10월 7일 밤 10시 20분 이 순간. 지나온 어느 날과 조금도 같지 않은 오늘. 세상이 정한 어떤 특별한 날도 아닌. 그리고 착한 일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 내게 있어서 만큼은 특별하다가도 특별하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오늘.


지금 바로 이 순간이 내겐 기념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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