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변할 수 있어 속도가 더디긴 하지만...
퇴근시간! 땡! 하자마자 직장을 나왔다. 바로 울리는 전화. 모르는 번호다. 누구지? 하며 받았는데 부동산이란다. "집 나갔어요?" "아 제가 집주인 전화번호를 안 남겼었나요?" "집주인 번호 안 알려줬어요~지금 집 보러 가려고 하는데 집주인 번호 좀 알려주세요~" "그럼 제가 문자로 찍어 드릴게요"
계약기간이 만료되기도 전에 이사를 가게 된 터라 예전 집을 내가 내놓았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부동산에 내 번호가 남겨져 있단 걸. 갑자기 연락 온 부동산 중개인에게 문자로 예전 집주인 번호를 찍어 주기 위해 잠시 걸음을 멈췄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마을버스-지하철-마을버스를 타야 한다. 직장에서 지하철역까지 가는 마을버스 간격이 좀 긴 터라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한다. 하필 버스가 올 타이밍에 전화가 오는 바람에 버스를 놓쳐버렸다. 잠시 고민을 했다. 다음 버스를 여기서 그냥 기다릴 것인가? 아님 좀 더 걸어 내려가서 다른 정류장에서 버스를 탈 것인가? 네이버 지도 앱을 켜고 다음 버스가 언제 올지 검색했다. '어! 웬일이지?! 다음 버스 금방 오겠다~기다렸다가 타자~!'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났는데도 버스가 올 기미가 안 보였다. 다시 앱을 켜서 버스가 어디쯤 와 있는지 살폈다. 분명 몇 정거장 전이라고 표시되었던 버스가 사라지고 없다! 이런! 젠장! 또 당했다. 데이터 속도가 느려서 그런 건지 뭔지 잘 모르겠으나 아주 가끔 이렇게 버스 위치를 알려주는 앱이 반응이 느리거나 오늘처럼 분명 곧 오는 버스가 사라지고 없을 때가 있다.
오늘 퇴근도 딱 그런 경우. 망했다. 퇴근하고 30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직장 앞이다. '흐미... 다른 정류장으로 다시 걸어가야 하나? 꼭 이렇게 다른 데서 타야지 하고 걸어가면 버스가 온단 말이지. 이번에도 그러는 거 아냐?' 잠시 고민하다가 냅다 뛰기 시작했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해. 직장 근처에만 있어도 일하고 있는 기분이 들어 지친단 말이야.'
역시. 뛰기 시작하자마자 머피의 법칙이 일어났다. 타야 할 버스가 내 눈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으아아 아~왜 이러는 거야 왜!!! 왜!! 퇴근하자마자 부동산에서 전화가 와서 집에 못 가게 하는 거냐고~오~왜! 받지 말걸 그랬어'
갑자기 이 뚜벅이 삶에 대한 처량함이 밀려왔다. '차가 있었음 집에 가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길에다 시간 버리고. 뭐 하는 짓이야. 정말. 빨리 집에 가고 싶다'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을 타려고 개찰구를 지나려는데 열차가 들어온다는 안내방송 들려 또 헉헉거리며 뛰어내려 갔다. '휴우, 열차 놓칠 뻔했네. 열차는 바로 타서 다행이야.' 내려야 할 역에서 한 정거장 전쯤, 집으로 가는 버스가 어디쯤 와 있는지 검색에 들어갔다. 집으로 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타는 마을버스도 시간 텀이 좀 있는지라 만약 놓치게 되면 한참을 또 기다려야 한다. 앞서 당한 일은 까맣게 잊고 또 교통 앱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내려서 뛰어가면 버스를 딱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열차 문이 열리자마자 또 뛰어야 했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선. 문이 열렸다. 전속력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출구에서 나오는데 정류장에 버스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저 버스를 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길에다 시간을 또 버려야 한다. 달려!'거친 숨을 몰아쉬며 뛰어 다행히 버스를 탔다.
'헉헉헉. 오늘 집으로 가는 길이 왜 이리 험난한 거니. 나 집에 가고 싶다고 흑...'
버스가 집 앞에 서는 순간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와~!!! 드디어 집 앞에 도착했다!!!!' 어서 집에 들어가야겠다는 기쁜 마음에 또 달리려고 발을 내딛는 순간. 오른발 밑에 죽은 바퀴벌레 시체가 있는 게 보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다행히 오른쪽 앞 발가락 쪽이 땅바닥에 닿기 직전 발견했다. 온몸으로 트위스트 춤을 한번 추고 난 후 겨우 중심을 잡고 바로 섰다.
'오늘 퇴근길 진짜 스펙터클 하고만. 염병.... 할.... '
욕이 절로 나왔다.(속으로 한 겁니다. ㅎㅎㅎ)
씩씩거리며 겨우 집에 도착했다.
'카톡' 현관에 들어서 신발을 벗고 있는데 동생에게 톡이 왔다. 무릎이 아파서 병원에 들렀다 도서관에 가는 중이라고 했다. 순간 내 두 눈을 의심했다. 그리고 동생에게 말했다.
'너 도서관에 가는 거 잘 못 쓴 거지? 오타 났네'
'아니거든. 진짜 도서관에 가는 거거든. 나 요즘 술 안 먹을라고 일 끝나고 도서관에 가려고 노력 중이야 왜 이래! 나 가끔 간다고~'
'내 살아생전 니 입에서 도서관에 가서 책 본다는 이야기 처음 듣는다~ 이야~ 이런 일도 다 있구나'
머리 검은 짐승은 믿지도 말고, 인간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말도 다 거짓부렁이었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동생과 이야기를 나눈 지. 두 시간 후.
지금 이 글을 쓰는 저녁 10시 즈음 다시 동생에게 톡이 왔다.
도서관에 왔단 말을 내가 믿지 않는 것처럼 느꼈는지 동생은 도서관 입구에 걸린 작은 간판 사진을 찍어 보내면 '도서관이 일찍 문 닫네 10시면 문 닫아?'라고 물어왔다. 세상에 동생 입에서 도서관 일찍 문 닫는다고 아쉬워하는 말을 들을 줄이야. 천지가 개벽할 일일세.
"오우~도서관에도 가고 기특하네 동생!! 앞으로 도서관과 책이랑 더 친해지길 바란다 동생아! 오늘 니 덕에 하루 마무리 기분 좋게 하는구나~ 아픈데 어서 괜찮아져야 할 텐데 걱정이네~약 잘 챙겨 먹고~누나가 영양제 좀 챙겨 보내줄게~푹 쉬어~잘 자라!"
오래간만에 동생에게 특급 칭찬을 날려 주었다. 아낌없이 마구마구. 엉망진창 혼비백산 퇴근길 때문에 안 좋았던 기분이 동생 덕에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낼모레 불혹인 녀석이 도서관에 갔단 말이 이리도 기분이 좋을 줄이야.
덧. 동생아 앞으로 꾸준히 책과 친해지길 바래. 제발.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