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맏이는 버거워서 말이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갑자기 부슬비가 내렸다. 이것저것 장을 보고 들어가는데 아뿔싸 늘 챙기던 우산이 가방에 없다. 다행히 비는 많이 내리지 않았다. 집까지 얼른 뛰어가야지 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정류장 벤치에 중학생 즈음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체육복을 입고 누구를 기다리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앉아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얼른 뛰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슬슬 다리에 시동을 걸고 있는데 내 앞에 반바지에 삼선 슬리퍼를 신고 검정 후드티 모자를 이마까지 뒤집어쓴 남학생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그리곤 벤치에 앉아 있던 여학생에게 우산을 쑥 하고 내밀었다. "비 거의 멈춘 것 같은데. 나왔네. 안 나와도 되는데." 남학생은 여학생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여학생은 남학생에게 받은 우산을 펼치지 않은 채, 늘 그래 왔듯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후 각자 핸드폰을 쳐다보며 내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둘은 남매였다. 아마 집에서 엄마 아빠 둘 중 하나가 동생 데리고 오라고 내 보낸듯싶었다. 몇 발자국 앞서 걷던 오빠는 동생이 잘 따라오고 있나 한 번씩 힐끗 쳐다보며 걸었다. 오빠의 시선을 눈치챌 때마다 여동생은 걸음의 폭을 넓혀 오빠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나도 그들이 걷는 방향으로 둘의 뒤를 따라 계속 같이 걸었다. 나와 같은 단지에 사는 모양인 듯했다. 무심한 듯 걸으면서도 서로를 의식하며 걷는 둘의 등짝을 가만히 쳐다보다 문득 어릴 적 생각이 났다.
난 어릴 때 오빠가 있는 친구들이 무척 부러웠다. 특히 오빠가 둘셋이 있는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내겐 두 살 터울인 남동생이 하나 있다. 동생은 머리가 커지고 몸집도 나보다 커지기 시작하면서 나를 자기 동생 대하듯 했다. 날 어찌나 만만하게 여기던지. 매일 같이 티격태격하고 어느 날엔 고성이 오가며 치고받고 싸우기도 했다. 우리의 싸움은 격렬했다. 말 그대로 애증의 남매 관계였다. 요즘 말하는 현실 남매. 필요 이외에 가까이하지 않는 관계. 우린 집안에선 서로 맞지 않아 으르렁대며 싸우다가도 집이 아닌 곳에 둘이 있게 될 땐 서로를 내심 의지하곤 했다. 내가 워낙 체구가 작았는데 그것 때문에 자기 누나를 누가 조금이라도 만만하게 보거나 업신여기는 것 같다 싶으면 나를 자신의 뒤로 밀어 두고 앞으로 나서며 나름 보호자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이건 아주 가끔 정말 아주아주 극히. 드문 일이었지만.) 이런 일은 거의 가뭄에 콩 나듯이 일어나는 희귀한 일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항상 오빠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오빠가 딱 셋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994년 <느낌>이라는 드라마가 한창 히트를 치고 있을 때였다. 극의 남자 주인공은 3형제였다.(손지창. 김민종. 이정재) 그들이 대학생활을 즐기던 어느 날 어여쁜 여동생이 나타나 함께 살게 된다.(여주인공은 우희진. 크. 그때 완전 청순 그 자체였는데) 이 드라마를 보면서 우희진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저렇게 잘생긴 오빠가 셋이나 있다니. 게다가 다들 여동생을 얼마나 이뻐하고 아껴주던지. 뭐 드라마니 깐 저런 오빠가 있지 현실에선 오빠들이 다 그렇지 않다는 친구들의 말도 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친오빠가 있었으면 하는 나의 상상은 드라마 때문에 더 극에 달했었다. 비 오는 날이면 잘생기고 멋지고 젠틀한 오빠들이 돌아가며 나를 마중 나오고, 어느 날은 두둑이 용돈도 챙겨주고, 내가 아파 끙끙대고 있을 땐 밤새 간호해주고, 부모님이 안 계실 땐 든든한 보호자 역할도 해주고, 밤늦게 들어오는 날엔 버스 정류장까지 데리러 나오고. 내가 결혼한다고 남자를 데리고 오면 다들 이 녀석이 내 여동생과 어울리는 남자인지 온갖 테스트를 해보는 오빠들.... 크...... 상상만 해도 든든했다. 이렇게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진짜 현실이었으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나만 보면 늘 꼬장꼬장 시비 거는 남동생을 내가 더 챙겨 줘야 하는 상황. 그래서 오빠 있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얼마나 샘이 나던지.
앞서 걷는 남매가 서로를 터치하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서로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걷는 뒷모습을 보며 이런저런 옛 생각이 떠올랐다.
'카톡' 동생의 메시지다. 이 녀석이 요 며칠 퇴근 시간대에 자꾸 톡을 보낸다. "누나!! 무늬오징어 먹어봤어? 이게 무늬 오징어야(사진 또 첨부 하심) 존맛이야. 회 처먹으면" "야, 징그럽게 생겼어. 저걸 어떻게 먹어 으~그리고 난 회 안 좋아하거든!" 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자기가 낚시해서 잡은 이 오징어가 무늬 오징어라고 자랑하며 동생은 사진까지 찍어 보냈다. 내가 회를 안 먹는 사실을 알면서 회 처먹으면 맛있다고 보내다니. 나랑 제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지만 아직도 나에 대해 참 모른다. 아니 잘 알면서 맨날 저렇게 지가 좋아하는 것만 말한다. 지 밖에 모르는 놈.
'나도 나를 잘 알고 나 좀 챙겨주는 오빠가 있으면 좋았을 텐데. 왜 나를 첫째로 낳은 거야. 아들 셋 낳고 나를 막내로 낳지. 달랑 둘만 낳아가지고, 난 의지 할 때가 없잖아. 첫째라. 으이그' 순간 다음 생에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기회를 신이 준다면 위로 오빠가 셋이 있는. 대신 나를 세상에서 제일 아껴주는 오빠들을 위로 꼭 셋을 주십사고 빌었다.ㅎㅎㅎ
나도 챙김 받아 보고 싶다고!!! 든든하게 말이야~ 나도 좀 기대고 싶다고~!!! 오빠들 한테 응석도 부리고 싶어!!!
# 오랜만에 이 노래 들으며 글을 쓰니 드라마 속 오빠들이 다 내 친오빠 같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