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해 나는 확실해지기 위해 나의 에너지를 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도 확실해지고 싶어서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생각을 한다.
다시 말해 새로운 창조가 이어진다.
나는 본성을 이행하고 있다.
위 문장을 또 평가하고 또 창조하고 있다.
그대들에게 이 글은 불확실할 것이다.
내가 고쳐 썼는지, 바로 쓴 것인지는 나만 확실할 것이다.
그대들은 이 글을 보며 불확실한 것을 마주한 채 또 창조할 것이다.
생각을 하거나, 댓글을 남기거나, 공감을 누르거나, 이 창을 닫고 폰이나 컴퓨터를 끌 수도 있다.
아니면 책을 읽으러 갈 수도, 여행을 갈 수도, 방을 나올 수도 있다.
혹은 음식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갑자기 죽거나 술을 마실 수도 있다.
결국 나 또한 그대들이 불확실하다.
허나 우리는 평가하고 창조하는 존재이기에 확실함을 갈망한다.
우리가 모인 집단은 확실함을 갈망한다. 그래서 인프라와 시스템이 존재한다.
그 집단은 어느 정도의 확실함을 부여하려 하고, 우리는 그 대가로 집단의 기준에 부응해야 한다.
등가교환이기에, 확실함을 받으면 그만큼의 확실함을 주어야 한다.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있다.
대한민국은 나에게 일부 확실함을 보장한다.
그 대가로 나는 대한민국의 법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나는 1초 뒤에도 이 글을 쓸 수 있다는 평가가 가능하기에, 지금 이 노트북이 강탈당하지 않는다는 평가가 가능하기에, 생존할 수 있다는 평가가 가능하기에 대한민국에서 살아간다.
그 대가로 나는 대한민국이 확실해지도록 살아가야 한다.
국가의 가치는 결국 얼마나 확실하냐이다.
그것은 경제적으로 평가될 수도, 인구 수나 행복도로 측정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은 그 국가가 얼마나 확실한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기술의 발전도 확실함을 갈망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확실하다고 믿는 사람과 연결을 유지하려고 우리는 연락을 한다.
파발과 봉화를 거쳐 지금의 전자 메시지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허나 기술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은 확실하다고 믿을 가능성을 점차 높여준다.
우리는 확실하다고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을 증대시키는 물품을 보고 혁신이라 부른다.
다시 말해 기술의 가치도 결국 얼마나 확실함을 보장하느냐이다.
사랑이라는 것도 본성에서 비롯된 행동이기에 확실해지기를 원한다.
허나, 결국은 불확실하다.
애인이라는 사람은 내가 확실하다고 믿고 싶은 존재라는 평가에서 출발하지만, 관계는 시간과 변화 속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을 선택하기도 한다.
결혼은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가 관계를 어느 정도 확실하다고 보장해 주는 시스템이다.
더 나아가 결혼이라는 단어가 관계를 어느 정도 확실하다고 보장해 주는 시스템이다.
허나 애초에 불확실한 세상이기에 확실한 것은 없다.
결국 인간관계는 나와 상대가 서로를 얼마나 확실하다고 믿는지에 달려 있다.
우리가 매기는 모든 가치의 기준은 결국 확실함이다.
자본주의에서는 돈이 가장 확실하다고 평가되기에 기준이 된다.
시간을 확실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 화폐가 될 것이다.
우리는 확실해지기 위해 살아간다.
다시 말해 우리는 확실해지기 위해 우리의 에너지를 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도 확실해지고 싶어서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생각을 한다.
다시 말해 새로운 창조가 이어진다.
우리는 본성을 이행하고 있다.
위 문장을 또 평가하고 또 창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