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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세이스트 Oct 04. 2022

#7 당신은 내게, 내게 당신은


<소설> #7 당신은 내게, 내게 당신은  

주인공 : 도준, 미연 



“우리 광화문에 가볼까?”
 
일요일 아침, 미연은 커튼이 없어 햇볕이 쏟아지는 창문을 애써 손으로 가리며 물었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도준은 미연의 제안에 두말없이 그러자고 답했다. 곧바로 샤워를 하고, 준비를 하려는데 허기가 밀려옴을 느낀 미연은 그를 슬며시 쳐다보았다. 보아하니 그도 배가 고픈 눈치였다. 미연이 재빠른 손놀림으로 냉장고를 열어 김치를 꺼내들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오랫동안 냉장고에서 묵혀두었던 탓인지, 김치가 많이 쉬어버렸다. 시큼한 냄새가 코를 렀다. 수년간의 경험치로 미루어 봤을 때, 이럴 땐 반찬으로 먹는 것보다는 볶아 먹는 것이 좋으리라는 판단이 섰던 미연. 전날 밤, 깨끗하게 닦아둔 도마를 꺼내고 김치를 가지런히 썰어서 프라이팬에 넣었다. 김치만 넣기는 어쩐지 아쉬우니, 지난 명절에 고향에 계신 엄마가 캐리어 가득 챙겨준 스팸도 잊지 않고 재료로 사용했다. 물에 담가 염분을 최대한 제거한 후에 말이다.


세상에 김치볶음밥처럼 쉬운 요리가 있을까? 미연처럼 사과도 하나 깎을 줄 모르는, 그 흔한 된장찌개도 끓일 줄 모르는 바보도 김치볶음밥은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다. 김치와 스팸을 넣고 노릇해 질 때까지 달달 볶고 설탕 툭, 고춧가루만 약간 넣으면 금세 완성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미연은 참기름을 둘러 고소한 맛이 배가된 볶음밥 위에 통깨까지 손날을 이용해 잘게 부수어 넣었다. 동그랗게 만들어 접시에 넣고 달걀프라이까지 하나 올리니, 도준이 옆으로 슬며시 다가왔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며 칭찬을 건넸다. 도준은 미연의 볼을 손가락으로 ‘톡’ 튕기며 부지런히 식탁으로 그릇을 날랐다. 
 
곧이어 김치볶음밥 두 그릇과 보리차 두 잔이 전부인 조촐한 식사가 시작됐다. 도준은 한 입 먹고, 미연의 눈을 바라보고, 또다시 한입 먹고, 미연의 손을 잡았다. 한그릇을 비우는 내내 도준은 이렇게 맛있는 김치볶음밥은 오직 미연밖에 할 수 없다며 연신 칭찬을 귓가에 흘려 넣어 주었다.


미연에게 도준은 참 특별한 사람이다. 언제나 부족한 많은 자신을,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요리에는 전혀 소질이 없는 미연을, 그저 김치볶음밥 두 그릇을 만들어 냈다는 이유로, 라면 면발을 꼬들꼬들하게  잘 살려냈다는 연유로 ‘미슐랭도 울고 갈 지상 최고의 요리사’로 불러주는 사람이었다.

 

10년 가까이 변함없는 도준의 칭찬과 사랑 속에 나는 서서히 변해갔다. 언제나 불안 속에서 살던 미연이, 혼자 이불속을 파고 들어가 우는 날이 많았던 그녀가 달라졌다. 도준을 만나기 전의 미연의 삶은 '불안' 단 두글자로 정의할 수 있었다. 공황장애까지는 아니지만, 가끔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갑갑함에 숨이 막힐 때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당황스러운 상황이 생기면 있는 힘껏 도망가기 바빴다. 철저하게 외면해 왔다. 수시로 밀려오는 불안감에 모든 것을 버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 이를테면 태평양 어딘가에 떠 있는 섬으로 떠나고 싶었던 날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미연은 도준을 만나고, 뭇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달라졌다. 이제 미연은 불안하지 않다. 답답함을 느끼지도 않는다. 도준의 따뜻한 말과 위로가, 그리고 과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풍성한 칭찬이 내면의 모든 불안과 답답함을 잠재웠다. 
 
잠을 못 자서 그토록 괴로워하던 미연이, 새벽 3시까지도 잠들지 못해 언제나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던 그녀갸 이제는 베개에 빰을 묻자마자 2초 안에 잠들 수 있게 되었다. 위경련이 심해 한 달에 족이 5번 이상은 응급실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야 했던 미연이, 이제는 정말 이상할 만큼 위가 아프지 않다. 
 
미연은 어디에선가 '위는 스트레스가 많은 만큼 아프다'라는 구절을 만난 적이 있다. 분명 그럴 것이다. 내면의 불안으로 인해 머리를 쥐어뜯을 때면 항상 위도 격렬하게 흔들리며,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여 미연을 응급실로 내몰았으니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정확히 도준을 만나고,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으면서부터 위경련의 흔적은 미연의 몸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더는 희멀건 겔포스액에 의지하지 않아도 됐고, 냄새만 맡아도 역한 마즙을 코를 막고 억지로 삼키지 않아도 되었다. 


 도준도 미연으로 인해 조금은 달라진 점이 있을까. 매번 내가 물어도 돌아오는 도준의 대답은 ‘웃음’뿐이다. 무슨 의미일까. 달라졌다는 것일까, 아니면 조금도 달라짐이 없다는 뜻일까. 궁금하지만 애써 묻지 않는다. 
 
 미연은 도준이 싹싹 비운 김치볶음밥 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간다. 뜨거운 물을 틀려는 찰나, 도준이 잽싸게 고무장갑을 끼고 내 옆구리를 쿡 찔러 밀친다. 언제나 설거지는 도준의 몫이다. 연애 초반, 미연의 손에 물을 묻히지 않겠다는 상투적인 약속을 지키고 싶어서인 것일까. 미연이 싱크대 앞으로 가는 순간, 도준은 부리나케 달려와 대신 손에 물을 묻힌다.
 
 미연은 설거지를 하는 도준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스르륵 잠이 들었다. 눈앞이 밝았다가 어두워지는 느낌에 눈을 슬며시 떴다. 언제 설거지를 마친 것인지, 도준은 미연의 옆에 누워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민망함이 몰려와 이불로 얼굴을 가리니, 도준은 씩 웃으며 말했다.


 “이제 광화문으로 가볼까?”


냉기가 흐르는 미연과는 달리, 언제나 온기가 감도는 도준의 손을 잡고 버스에 올랐다. 도준의 듬직한 어깨에 기대어 흘러가는 창밖의 풍경들을 감상했다. 저녁 어스름이 밀려올 때쯤, 버스의 헤드라이트가 켜질 때쯤, 우리는 광화문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반겨주는 것은 세종대왕의 동상. 그 장엄함에 넋을 놓고 도준과 미연은 한참을 서서 바라봤다.
 

동상 너머에는 이제 막 조명이 켜지기 시작한 경복궁이 보였다. 미연은 언젠가 친구로부터 밤의 경복궁이 그렇게 예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호기심에 도준을 이끌었다. 가보지 않겠느냐고. 언제나처럼 도준은 미연의 의견을 따라주었고, 사람들을 따라 경복궁에 발을 들였다. 다행히 예약 없이 현장 예매만으로도 입장이 가능했다.한껏 신난 미연과 도준은 다리가 아픈 것도 잊은 채 근정전부터, 경회루까지 열심히 눈에 담았다. 


 너무 많이 걸었던 탓일까.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구두를 신었던 탓일까. 발이 심하게 저리고 아팠다. 그런 미연을 도준은 경회루 근처의 카페로 이끌었다. 자리가 없어 기다리려는 찰나에 누군가 밖으로 나갔고 경회루가 한눈에 보이는 명당에 앉을 수 있었다. 


잠시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커피를 마셨다. 미연은 도준이 커피를 홀짝이는 소리를 한참 동안 듣다가 손을 잡았다. 늘 따뜻하던 도준의 손은 뜨거운 커피를 잡고 마신 탓에 평소보다 더 온기가 감돌았다. 그의 온기를 빼앗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손을 빼려는 찰나, 그가 미연의 손을 자신 쪽으로 확 잡아끌며 말했다. 
 
 “아니, 왜 이렇게 손이 차가워?”
 
 그날따라 유난히 냉기가 돌던 미연의 손을 도준은 양손으로 마주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앞으로 내가 항상 따뜻하게 해줄게.”
 
 미연이 싱긋 웃으며 도준의 뺨을 어루만지자, 그는 다시 말했다. 
 
 “결혼해도 항상 자기 손은 따뜻할 거야. 차가워질 일 없어. 내가 그렇게 안 둬.”
 
 평소의 유순한 도준에게서 들을 수 없는 사뭇 단호한 어조로 말이다. 
 
 누군가의 단호함에 질색을 하는 미연이지만, 이런 단호함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결혼을 하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고들 입을 모으지만, 미연은 믿기로 했다. 도준의 다짐을. 도준의 선언을. 미연은 냉기가 뚝뚝 흐르지 않는,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손으로 언제나 도준을 어루만질 수 있을 것이다. 결혼을 하더라도 말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미연과 도준은 결혼 문제에 대해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혼식은 어느 호텔에서 올릴 것인지, 집은 어떻게 할 것인지, 아이는 몇 명이나 낳을 것인지, 양가 부모님께 매달 용돈은 얼마씩 드릴 것인지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았다. 현실적인 문제들이 도준과 미연을 기다리고 있지만, 때로는 눈물지을 날도 있겠지만, 둘은 안다. 서로의 따뜻한 손을 잡고 어떤 현실이든 기꺼이 마주하고, 또 헤쳐 나갈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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