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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세이스트 Dec 21. 2022

#13 당신의 전화는 절대 받지 않겠다는 다짐



<소설> 주인공 - 유현



"유현 씨, 10만 원만 빌려줄래요?"


그것이 시작이었다. 유현은 그 제안을 수락한 걸 뼈저리게 후회했다. 상사가 요구하는 액수는 점점 더 커졌다. 15만 원, 30만 원, 50만 원…. 하루가 다르게 금액이 불어났고, 전화가 걸려 오는 횟수도 잦아졌다.

그녀는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천만 원을 호가하는 샤넬 클래식 캐비어 숄더백을 메고, 백만 원에 육박하는 크리스찬 루부탱을 신고 다니면서도 늘 돈이 없어 전전긍긍했다. 어느 날은 단돈 천 원이 없어 점심을 먹으러 간 유현에게 전화한 적도 있었다.

매달 말일, 카드값을 상환해야 되는 날이 돌아오면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분주한 사람이 됐다.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돈을 빌리는 듯, 계속해서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사무실을 드나들었다. 그걸로도 부족해 유현이나 동료 직원들에게 사내 메신저가 아닌 개인 카카오톡으로 "혹시 저 10만 원만 빌려줄 수 있어요?"라고 묻기 바빴다. 업무에 집중하고 있는 직원들이 미처 카톡을 확인하지 못하면 직접 이름을 부르며 "카톡 좀 확인해 줄래요? 급한 일이라서요."라며 채근하기까지 했다. 그녀의 SOS를 확인한 동료들이 무슨 일 때문에 돈을 빌리냐고 물으면 항상 이렇게 답하곤 했다. 

"저, 오늘 카드값 못 갚으면 신용 불량자 돼요…."

일부 직원들이 그녀의 다급함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돈을 건네면 다음달부터는 그 사람에게만 또 다시 돈을 빌려달라 요구했다. 그중에 한 사람이 바로 '유현'이었다. 보기 좋게 그녀의 레이더에 걸려든 호구였던 것이다.

부모님으로부터 거절을 못하는 유전자를 물려받은 유현은 그녀가 전화를 걸어올 때마다 번번이 거절을 못해 계속해서 돈을 빌려주고 있었다. 가장 문제였던 건 처음 10만원을 빌려줬을 때 외에는 단 한번도 돈을 돌려받지 못했다는 것. 참다 못한 유현이 "과장님, 제가 돈이 급해서 그런게 언제쯤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면 그녀는 "내가 그 돈 떼먹을까봐요? 그깟 돈 얼마나 된다고, 걱정하지 말아요. 곧 줄게요."라고 오히려 당당하게 굴기 바빴다. 


그녀로 인해 유현의 스트레스는 나날이 커져갔다. 출근해서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사무실만 들어가면 속이 메쓱거렸다. 업무에도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그녀로부터 업무 메신저가 당도해도, 화들짝 놀라기 바빴다. 혹시나 또 돈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불안함에. 그녀와 점심식사를 하기 싫어 유현은 구내 식당이 멀쩡하게 존재함에도 집에서 도시락을 준비해서 회의실에 앉아 홀로 먹었다. 그녀와 함께 점심을 먹다가 체하는 것보다는 홀로 마음 편히 식사를 하는 편이 훨씬 나았으니까.


그렇게 한 달이 흘렀을까. 유현을 폭발하게 만드는 사건이 발발했다. 당시 유현은 심한 독감에 걸려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3일 정도 병가를 내고 요양하고 있었다. 약을 먹기 위해 죽을 먹고, 잠시 누워있는 데 전화가 울렸다. 밤 10시가 가까워지는 늦은 시각이었다. 이 시간에 누가 전화를 걸었나 싶어 확인해 보니 그녀였다.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했다. 분명 이렇게 개인적으로 전화가 온 것은 '돈'과 유관한 일임이 확실했으니까. 


유현은 그대로 전원을 꺼버렸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도록 핸드폰을 이불 속에 파묻어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밝아서야 핸드폰을 확인했다. 유현은 부재중 전화의 개수와 수십 통이 넘는 카톡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녀는 밤 10시~12시 사이에 무려 50통이 넘는 전화를 걸어왔었고, 카톡 역시 그에 못지 않을 만큼 많이 보내왔던 것이다. 카톡을 읽어보니 내용은 이러했다. 


카톡 1) 유현 씨, 몸은 좀 어때요? 내가 할 말이 있는데….

카톡 2) 유현 씨? 제발 전화 좀 받아요. 

카톡 3) 유현 씨? 핸드폰이 꺼져있네요? 일부러 전화 피하는 건가요?

카톡 4) 유현 씨? 나 지금 급해요! 당장 100만 원만 빌려줄 수 있어요?

카톡 5) 자꾸 이런 식으로 전화 피하면 유현 씨한테 좋을 게 없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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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 33)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죠? 두고 봐요. 복귀하면. 


부탁으로 시작한 카톡은 결국 협박으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유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강한 충격에 겨우 나아가는 독감이 다시 시작될 지경이었다. 밀려오는 두통을 애써 진통제로 누르내리고, 그녀로부터 온 카톡을 일일이 캡처해서 정리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인사팀 부장에게 메일로 발송했다. 그간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말이다. 


잠시 뒤, 메일을 확인한 부장은 유현에게 곧장 전화를 걸어왔다. 부장은 한숨을 쉬며 이 모든 것이 사실이냐 물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며. 사실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제보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땐 이 정도로 사안이 심각한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때 바로잡았어야 되는데, 여기저기 돈을 빌리고 다니는 그녀 마음은 오죽할까 싶어 한 번 눈감아주었던 것이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말하며 유현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미안함에 자꾸 목소리가 작아지는 부장에게 유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부장님, 그 사람이 그만두지 않으면 제가 퇴사하겠습니다."


그러자 부장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유현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약속했다. 징계 위원회를 열어 조속한 시일 내에 그녀를 회사 문 밖으로 내보내겠다고. 


과연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인사팀 부장은 유현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회사로 복귀한 이튿날 바로 징계 위원회를 열었다. 유현이 제출한 자료 외에도 그녀가 동료 직원들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협박했던 정황이 발각되어 그것까지 증빙자료로 테이블 위에 놓였다. 인사팀 부장을 비롯해 회사의 대표와 이사들은 그녀의 만행에 혀를 내둘렀다. 게다가 위원회 도중 누군가의 제보로 그녀의 또 다른 잘못이 드러났다. 


그녀는 정말 '돈'에 눈이 멀었었나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세상에나 회사와 거래하고 있는 외부 업체들과 대행사들의 대표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돈을 빌려주지 않으면 우리 회사와 앞으로 거래할 수 없을 것이라며 협박을 했다는 것. 대표는 완전히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인사팀 부장에게 법적으로 문제 있으면 자신이 다 책임질테니 당장 저 여자 내보내라며 고함을 질렀다. 


아수라장인 상황 속에서도 그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대답했다. 지금 자신을 자르면 당장 고소할 것이라고. 어디 해볼테면 해보라며 도리어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회사는 그날로 바로 퇴사를 명령했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도 어쩔 수 없이 짐을 정리하던 그녀는 대뜸 유현을 회의실로 불렀다. 왜 자신을 인사팀에 고발한 것이냐며 폭언을 할 줄 알았으나, 의외로 그녀는 유현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유현은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90도로 인사하며 사과를 건넨 그녀는 초점이 없는 눈으로 서 있는 유현에게 말했다. 


"유현 씨, 그동안 내가 정말 미안했고 내가 일부러 그런거 아니라는 건 알죠? 내가 회사 나가서라도 우리 계속 친하게 지내요. 그동안 오해는 다 풀고. 내가 또 전화할게요." 


유현은 대답 대신 애써 웃음을 지어보이며 회의실을 벗어났다. 


그녀가 나가고 회사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유현도 다시 직원들과 어울려 점심을 먹기 시작했고, 퇴근 후에도 사적으로 만나 함께 저녁을 먹기도 했다. 업무도 점점 더 손에 익었고, 성과를 인정받아 연봉도 파격적으로 높였다. 


그러나 가장 행복할 때 불행은 찾아오는 법. 동료들과 맥주 한 잔을 가볍게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으니 익숙한 불쾌함이 몰려왔다. 그녀였다. 


그녀는 그동안 잘 지냈냐는 흔한 안부 인사도 없이 곧장 본론을 말했다. 


"유현 씨, 나 돈 좀 빌려줘요. 내가 카드사로부터 계속 독촉 전화를 받고 있는 형편이야…"

"염치 없지만 나 250만 원만 급하게 입금해 줄 수 없을까? 내 계좌번호는 333-xxxx-...."


그녀가 자신의 계좌 번호 끝자리를 부르는 순간, 유현은 전화를 끊었다. 그 이후로 계속해서 같은 번호로 전화가 울렸지만 유현은 끝내 받지 않으며 차단 버튼을 눌렀다. 이 번호로 전화를 받지 않으면 분명 그녀는 다른 이의 핸드폰을 빌려서라도 전화를 걸어올 위인이다. 하지만 유현은 앞으로 저장되어 있는 번호 외에 걸려온 모든 전화를 받지 않는 초강수를 두면서까지 그녀의 전화를 끊어내리라 다짐했다. 


'절대 다시는 그 여자의 고단한 인생사에 엮이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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